연인들의 코스

영화 <비포 선라이즈> 촬영지 기행

by Total Eclipse






줄리 델피(Julie Delpy)가 연기한 여주인공 셀린을 시시는 무척 부러워했을 것이다. 우연에 과감히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여행자. 그것도 만인의 관심을 받을 리 없는 자유로운 영혼. 자신의 사후 백 년도 지나지 않은 제국의 공간을 강물이 흐르듯 만끽하며 걷는 셀린을 보며, 황후는 자신의 신분을 하늘에서조차 원망했을지 모른다.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는 비포 트릴로지(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비포 미드나잇)의 시작이고, 배경이 된 빈 시내의 장소들은 사랑의 공간으로 재해석돼 많은 여행자들의 필수 방문지가 되었다.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는 영화에 등장한 장소들을 무척 꼼꼼하게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화 종결부에 남녀 주인공이 지나온 장소들을 한 컷씩 이어 붙여 관객들로 하여금 되새김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30년도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두터운 팬덤을 보유한 <비포 선라이즈>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안내서가 되어 세대를 뛰어넘는다. 익을 대로 익어버린 사랑의 풍전등화나 되돌아보는 사랑의 기승전결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서 납덩이같은 부담이 없다. 우연한 만남이 사랑으로 진화하기 직전까지의 여정을 그린 영화는 여행지로서의 빈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오늘도 세계의 젊은 남녀들은 줄리 델피가 되어, 에단 호크(Ethan Hawke)로 변해 빈을 찾는다. 젊음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민망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30년 전의 내가 되어 영화 속 빈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야겠다.

비포2.jpeg 영화 속 배경이 된 알트 운트 노이 레코드샵


파리까지 가려던 셀린(줄리 델피)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제시(에단 호크)의 제안으로 빈에 내려 짧은 여행을 함께 하기로 한다. 아직 낯설기만 한 두 사람은 하나씩 궤적을 맞춰가며 도심을 걷는다. 어색한 기운은 간혹 흐르는 음악이 해체해 주곤 하는데, 그래서일까. 셀린과 제시는 한 레코드숍에 들어가 LP를 뒤적이며 음반을 고른다. 숍에 마침 청음실이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음악에 집중하기보단 서로를 의식하느라 시선 처리는 좌충우돌이다. 간질간질한 심장은 좁은 공간에 자발적으로 갇힌 둘에게는 필연적인 증상. 남녀의 사랑을 다룬 영화에서 배경음악은 강력한 장치가 되어 연인들을 부추기는 촉매가 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영화에서 LP플레이어를 통해 나오는 음악은 두 남녀의 달아오른 표정에 가려 완벽히 조연으로서만 기능한다. 가수가 누군지도 상관없고 음악이 어떤지도 모르겠다. 그저 우리 둘을 가두어놓는 수단이면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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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_145453.jpg 알트 운트 노이 레코드숍


영화 속 모습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알트 운트 노이 레코드숍(Alt & Neu Records)은 <비포 선라이즈> 때문이 아니라도 찾아가 볼만한 곳이다. 링 슈트라세의 동남쪽 경계 바깥에 있는 빈 박물관들의 집합소, 무제움스 큐바르티어(Museums Quartier)에서 도보로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 어차피 빈의 예술품을 관람할 작정인 여행자는 들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곳이다. 영화 촬영지 포스터는 "그래 여기가 거기 맞아." 식으로 과하지 않게 부착돼 있다. 유명세에 기대지 않는 전문 음반가게로서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특히 클래식과 재즈 음반의 보유량이 엄청나다. 수년 전 황학동과 회현동의 중고 레코드숍을 전전하며 재즈 음반을 디깅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도 음악의 도시 빈에 왔으니 클래식 LP 한 장쯤은 업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전설적인 성악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의 음성이 담긴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나그네(Winterreise)」 중고 LP를 골랐다. 한화로 만 5천 원 꼴이라 희소가치를 따진다면 월척급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알트 운트 노이에서 레코드판이 그려진 에코백 구매는 의무에 가깝다. 중고 LP 한 판의 가격이라 크게 부담이 없을뿐더러, 에코백을 산 고객에게는 숍에서 선정한 LP 중 하나를 무작위로 백에 넣어준다.(확인해 보고 영 맘에 들지 않으면 교환도 해 주신다.) 덤으로 얻은 음반 역시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래저래 냉장고 자석에 비할 수 없는 가성비 기념품이다. 가게의 운명은 이름을 따라간다고, 오래된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막 사랑의 도입부를 건넌 젊은 영혼을 싣고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듯하다.

비포3.jpeg 영화 속 프라터의 관람차 안


미국에서 온 제시, 프랑스인인 셀린은 서로의 깊은 곳을 알아간다. 남녀가 서로를 알아가려는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스킨십이다. 그런데 둘은 초급과정을 단숨에 뛰어넘어 프라터의 관람차 안에서 첫 키스를 한다. 노을이 지는 빈의 전경을 배경으로 삼은 밀폐된 공중의 공간.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는 작은 세계에서 제시와 셀린은 호기심이 연인의 감정으로 모습을 바꾸었음을 실감한다. 그야말로 정분이 난 것이다. 관람차 안에 놓인 남녀는 위험하다. 동승자 없는 관람차에 올라탔다는 것은 어쩌면 찐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 빌드업이었음을.


어둠이 스며드는 빈에서 프라터는 홀로 반짝인다. 들뜬 마음들이 숙면을 거부하고 모여든 불야성이니 그럴 것이다. 제시와 셀린은 연애 초기 우리가 그랬듯 각자의 인생관을 표출하고 상대의 지난 시간을 탐색한다. 다른 것들끼리 끌리는 법. 제시는 현실에서 한발 물러난 남자다. 원하지 않던 존재가 되어 태어난 제시는 부모의 이혼도 무심히 받아들이며 초점 없는 눈으로 삶을 대하는 듯하다. 반면 셀린은 역경을 극복한 건축가인 아버지 밑에서 세상 경험을 하고, 극복하고 투쟁할 적은 어디에나 있기에 어느 세대에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밤은 찾아온다. 전시회 벽보에 인쇄된 점묘 화가,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의 그림을 보며 셀린은 '쇠라의 그림에서 인간의 형체는 늘 일시적'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배경에 녹아드는 공포를 느꼈던 걸까. 그러나 영화 속에서 셀린과 제시는 배경을 무심히 부리며 공간이 그들을 따르게 한다. 두 사람 모두 세상의 어스름에 묻혀 희미해질 것 같진 않다. 매력과 더불어 강단을 지니고 있는 그들이다.

도심 속 묘지에서 셀린은 자신이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노파라고 생각한다며 성숙하다 못해 초탈한 죽음관을 드러내는 반면, 제시는 항상 어른될 준비만 하고 있는 영원한 열세 살 꼬마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삶의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는 여자는 죽음이 두렵고, 사는 거 별 거 없는 듯 행동하는 제시는 죽음이 알고 싶을 뿐이다. 나와 다른 사람. 그래서 둘은 죽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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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터 대관람차
20240827_184959.jpg 대관람차에서 바라본 빈 시내
20240827_192754.jpg 프라터 놀이공원


빈의 중심가에서 북동 방향으로 도나우강을 건너면 세계 최고(最古)의 놀이공원을 만날 수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냥터였다는 이 일대는 1766년부터 일반에 개방된 여가 공간이었다고 한다. 무려 260년이란 나이를 먹은 프라터(Prater)는 테마파크계의 시조새인 셈이다. 직사각형 상자들이 부챗살에 끼워진 듯한 영화 속 구형(舊型) 관람차는 1897년부터 운행되었다. 1897년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한 해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놀이기구들이 하나씩 조성되었고, 도심과 가까운 프리터는 빈 시민들의 놀이터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그들에게는 최소한 증조할아버지 이하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의 장소일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엔 한식당을 비롯한 솜씨 좋은 동양 음식점들의 거리가 있어 소시지와 슈니첼로 기름진 위장에 아시아의 매콤함을 두를 수 있다. 프라터는 여행지로도 산뜻하지만 빈의 중산층 가족들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로컬 스폿이기도 하다. 대도시의 긴장감을 툭 내려놓고 열세 살 제시처럼 휘젓고 다니면 될 일이다.

비포1.jpeg 영화 속 알베르티나 미술관 테라스에서 두 사람
"Isn't everything we do in life a way to be loved a little more?"

"우리가 살면서 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좀 더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닐까?". 영화 속 명대사로 꼽힌 셀린의 말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대화로 모든 부분을 채워나간다. 대사의 분량이 어마어마했겠구나. 외워서 나오는 문장의 발화가 그렇게나 자연스러울 수 있다니, 괜스레 두 주연배우들의 수고와 능력에 고개가 숙여진다. 자칫 수다스러워질 수 있던 주고받기식의 전개는 감정이입이라는 마법 덕에 전혀 요란하지 않은 몰입을 이끌어낸다. 대화는 현실적이고 연기는 보이지 않는다. 익명의 집합체인 기차에서 숙명의 짝을 맞부딪혀 세상으로 나간다는 설정이 누군가에겐 상상 속 사건일지 몰라도, 영화를 보고 난 누군가에겐 농후하게 그럴듯한 일상이 되어버린다. 잘은 몰라도 <비포 선라이즈> 덕에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에서 내린 영화 주인공의 후계자들이 꽤 생기지 않았을까. 제시와 셀린의 모든 행동과 대화는 그러니까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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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_165531.jpg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테라스


북적일 정도는 아니어도 미술관 테라스에는 5분에 한 번 꼴로 영화를 재현하는 커플이 영화 속 그 난간에 기대어 맞은편 빈 슈타츠오퍼(Wiener Staatsoper), 즉 오페라하우스 쪽을 바라본다. <비포 선라이즈>의 여전한 파급력을 실감한다.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를 맡아 위상이 한층 높아진 오페라의 산실과 빈의 미술 전시 대표 격인 알베르티나 미술관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격이다. 알베르티나(Albertina)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위인 알베르트 공의 이름을 딴 궁전이었다. 알베르트는 알아주는 매술 애호가이자 수집가여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개인 컬렉션 규모를 자랑했는데, 궁전은 그의 사후 미술관으로 아예 기능을 바꾸었다. 알베르티나는 클림트를 비롯한 빈의 화가들은 물론이고, 모네,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과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를 위시한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내용에 더해 외모도 매혹적이다. 빈에서 찾아보기 힘든 옛 것과 새것의 조합을 건축미를 통해 구현한다. 2003년 리노베이션으로 테라스 층에 날개 형태로 길게 뻗어 나온 구조물이 생겼는데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긴다. 알베르티나의 내부 역시 외부와 딴판이다. 매입등이 은은하게 비추는 고품격 인테리어는 최고급 빌라의 거실을 연상시킨다. 전통과 현대의 앙상블은 시너지를 일으키며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20240827_170721.jpg 미술관 테라스의 청동기마상


제시는 그런 말을 한다. 서로를 파악할 대로 파악한 커플은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게 되고 습관까지도 공유하게 되면서 서로에게서 점차 멀어지게 된다고. 이에 대한 셀린의 반격은 영화 속에서 두 사람 사이 가장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일 거라고 생각해. 나는 내가 누군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알 때 정말 사랑에 빠질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 가르마를 탈 지, 그날엔 어떤 셔츠를 입을지. 그가 그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정확하게 알고, 난 정말 그때가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하고 알 수 있을 거라 확신해.

숱하게 오고 가는 대화는 결국 두 사람이 영원히 커플이 될 수 없음을 예고하는 것인지. 화면 아래 자막으로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음에도 영화의 배경이 생생하다. 도시의 분위기와 사랑의 설렘이 공명을 일으켜서였을 것이다. 인생에 대한 해석과 사랑에 대한 개념은 살아온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일지라도, 서로 다름이 마찰을 일으키며 만들어내는 불꽃은 그저 아름답다. 미술관 테라스의 청동기마상 아래에서 아침을 맞은 제시와 셀린은 임박한 떨림의 종말에 몸서림 치며 기차역으로 향한다. 하룻밤 연인으로 지내고 쿨하게 헤어지자는 다짐은 허물어져버리고 말았다. 냉정하자는 엄밀함은 사랑이란 놈 앞에선 한갓 서명 없는 계약서일 뿐이다. 셀린이 곧 기차를 타야 하는 9번 승강장에서 6개월 뒤 만나자는 황급한 재회의 약속을 하고, 셀린은 파리로, 제시는 미국으로 돌아간다. 결국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후속작 <비포 선셋>이 만들어진 이유가 된다.


예술의 공간 빈은 사랑의 도시가 되었다. 도시는 영화에 빚진 셈이다. 오늘도 완결되는 사랑을 꿈꾸며 세계의 연인들은 빈의 품속으로 속속 도착하고 있다.

20240827_075012.jpg 빈 서역(Westbahnhof)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열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