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 빈 중앙묘지 ①
1874년, 교외의 광활한 토지 위에 조성된 빈 중앙묘지(Wiener Zentralfriedhof)는 도시가 작정하고 망자들의 거대한 집합소를 만들었음을 증명한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존재가 곧 역사가 된 예술가들도 처음 묻혔던 땅속에서 다시 지상으로 꺼내진 후 이곳 중앙묘지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비좁아진 빈 시내에 더 이상 묘지를 허락할 공간이 없어 시신들은 대규모 이사를 갔고, 그렇게 빈 도심 남쪽, 짐머링(Simmering)에 들어선 묘지는 전 유럽에서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추모의 공간이 되었다. 조성된 묘지 개수만 33만 개, 납골 등 기타의 방식으로 모시는 망자의 수만 해도 300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수도 빈의 인구가 200만 명이니 이 정도면 가공할 만한 영혼의 머릿수다. 산 사람들보다 월등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망자들의 메트로폴리스, 빈 중앙묘지는 규모를 떠나 고귀한 예술혼의 성지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공간이다. 연중 참배와 존경의 기운이 끊이지 않아, 산 자와 죽은 자는 공명하며 소통을 하고 있는 듯하다. 유럽의 묘지에 관심이 없는 여행자 일지라도 빈 중앙묘지는 메이저급 방문 스폿이 아닐 수 없다. 올스타의 향연을 방불케 하는 대가들의 공동체를 직접 확인하러 사람들은 오늘도 달뜬 표정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묘지에 들어오는 게 이토록 설렐 일인가. 설레지 않으면 이상할 일이다.
유럽의 묘지만큼 날씨가 분위기를 좌우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새파란 하늘 아래 회백색 구조물은 해변의 모래알처럼 양명한 빛을 반사하고, 암갈색의 비석조차 음영의 대비로 경쾌한 오브제가 된다. 무덤을 받치는 잔디의 초록은 마치 인조잔디의 그것처럼 노골적인 원색이 되어 방문자의 눈을 부시게 한다. 설레서 들어오는 마음가짐은 망자들의 공간을 너무 밝게 비추는 것 같아 민망해질 정도다. 슈퍼스타들이 잠들어 있는 성지라 해도,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는 날이나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초겨울의 무자비한 시간에 이곳은 전혀 다른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비감은 짙어지고, 상실의 기억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살갗을 후벼 팔 것이다. 변검처럼 딴판의 얼굴을 지녔을 이 추모의 공간을 인정해야 한다. 두근대는 심장에 잠시 침착해질 것을 명령한 뒤 묘지의 중심으로 차분히 나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가의 묘역을 알리는 표시가 보인다. 왼쪽 사선 방향으로 걸어가니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세를 타는 삼인방의 구도가 등장한다. 너무나 많은 여행자들과 추모객들이 거쳐가는 순례의 현장이다. 세계 어느 묘지가 버스를 타고 온 단체 관광객의 목적지가 될 수 있을까. 고결하지만 압도적인 음악가의 묘역에선 일 년 내내 교향곡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묘역의 왼쪽부터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기념비가 서 있다. 삼각형의 코끝이 되어 맨 앞으로 돌출한 센터. 정작 모차르트 기념비 아래에는 그의 시신이 없다. 가묘인 셈이다. 모차르트는 1791년 사망한 뒤 이곳 중앙묘지에서 차로 불과 10분 거리인 장크트 마르크서 공동묘지(St.Marxer Friedhof)에 다수의 시신과 함께 매장되었다. 유골이 섞이고 분해되면서 정확한 무덤의 위치는 파악하기 어려웠고, 사람들은 그가 누워있을 만한 장소에 나무십자가를 꽂아 대략의 위치만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 현재 장크트 마르크서 묘지 내 나무십자가는 번듯한 기념비로 모습을 바꾸어 서 있으나 공허할 뿐이다. 온전한 모차르트의 흔적을 기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장크트 마르크서 묘지도, 중앙묘지도 헛헛하긴 마찬가지다. 재정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말년의 그여서 혼자만의 무덤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설, 전염병으로 사망했던 까닭에 급하게 감염자들과 함께 묻혔을 거라는 설, 귀족 신분이 아니면 시신을 한데 묻어버린 당시의 풍습 때문이라는 설 등 해석은 분분하지만, 어떤 이유로도 도무지 정당화되지 않는 것이 모차르트의 장례 방식이다. 잘츠부르크의 신동으로 왕국을 섭렵하며 유명세를 떨쳤던 당대 최고의 음악가가 다소 궁핍한 말년을 보냈다는 이유로 범인(凡人)들과 한구덩이에 묻혔다는 것은 나보다 음악인들이 먼저 분기탱천할 일이 아니던가. 오스트리아 전역에 산재한 모차르트의 유산은 그의 천재성을 숨 돌릴 틈 없이 증명해 주지만, 마지막 순례지라 할 빈 중앙묘지의 기념비에선 맥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그에 비해 베토벤과 슈베르트는 한 쌍이 되어 안온한 사후 세계를 공유하는 듯하다. 독일 본(Bonn) 출신인 베토벤은 모차르트 사망 이듬해인 1792년 빈으로 와 장엄한 그의 시대를 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애와 고독을 극복해 나가며 불세출의 악성으로 거듭난 그는 1827년 세상을 떠났다. 선배 모차르트의 최후와 달리 수많은 장례 행렬의 추모를 받은 베토벤은 아름다운 생의 결말을 맞았다. 한편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슈베르트는 적어도 존경하는 베토벤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었다. 베링 공동묘지까지 베토벤의 관을 운구한 슈베르트는 바로 다음 해인 1828년, 만 서른한 살의 나이로 숨져 운명처럼 베토벤과 같은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베링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유해는 1888년 빈 중앙묘지에 이장되어 음악가의 묘역에 나란히 눕게 되었으니, 대가들의 인연은 사후에 더 빛났던 것이다. 죽어서도 돈독하게 곁에 있는 두 음악가는, 유해가 없는 그들의 선배 모차르트를 위해 천상의 레퀴엠을 공동 작곡했을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시간의 무서움을 깨달은 인간은 예술을 창조해 영원한 존재인 척 가장한다. 고를 수 없는 각자의 시절에 태어나 여행과 같은 삶을 잠시 거쳐갈 뿐인 인간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야속해하며 나름의 흔적을 남기려 한다. 그 흔적은 존재와 생의 의미를 묻는 철학일 수도 있고, 삶을 해석하는 음악과 미술이 될 수도 있다. 어둠에서 빛이 태동하듯 소리는 침묵으로부터 비롯되고, 삶은 죽음이 있어야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죽음을 극복하는 삶, 침묵을 깨고 나오는 소리, 어둠을 젖히는 빛은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을 거쳐 철학이 되었고, 예술로 구체화되었다. 결국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과 조우한 세 음악가는 그래서 억울할 것이 없다. 벼락같은 유명세보다 중요한 것은 인류와 존재에 대한 고민을 연금술을 이용해 유산으로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의 훈령은 섬뜩함을 넘어 창조력 만발한 삶의 축복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예술의 본질이다.
음악가의 묘역 우측엔 브람스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기념비가 서 있다. 독신으로 살아온 브람스의 고독은 그대로 조각이 되었고, 왈츠로 음악계를 평정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보무도 당당하게 기념비의 가장 높은 곳에서 추모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음악가 묘역 중앙 무대의 세 선배를 옆에서 호위하는 듯한 모양새나 그들만의 단단한 개성은 감출 수가 없다. 세상 어느 묘지에서 이런 구도가 가능할까. 여기는 명예의 전당이다.
빈의 중앙묘지는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고전이 되었다. 추모와 참배에는 마땅히 클래식을 감상하는 자세가 동반되어야 한다. 클래식의 정수는 기본에 충실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 널리 알려진 음악가 묘역의 영웅들과 보내는 시간은 찬란한 예술의 역사를 몸으로 흡수하는 과정이다.
내리쬐는 늦여름 태양빛은 묘지의 초록을 0에서 10까지 분절시킨다. 반사 각도와 엽록소의 능력에 따라 제각각의 초록을 뿜고 있는 중앙묘지의 숲은 언제든 낭만적인 야외 공연장으로 변신할 것만 같다. 필요한 것은 이곳에 누워 있는 대가들의 지휘와 연주일 뿐이다. 광대한 짐머링의 공동묘지에서 환상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망자들은 차고도 넘친다. 귓전에 울리는 선율을 툭 털어내고 음악가의 묘역을 나선다. 여기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음악과 결별을 선언했던 한 인물은 그래서인지 멀찍이 홀로 떨어져 누워있다. 어찌 보면 외따로 놓인 묘지는 더 주목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다음은 그를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