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 빈 중앙묘지 ②
300만 혼령이 떠도는 빈 중앙묘지는 망자들의 초 거대도시와도 같다. 계획적인 부지 구획으로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 조성은, 링 슈트라세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도시의 궤적을 그려나가고자 했던 빈의 세기말 정신이 이룬 업적과도 일맥상통한다. 산 자들은 무리를 지어 음악가의 묘역으로 수렴하고, 중앙묘지에 누워있는 망자들은 사후의 동지들 덕에 외롭지 않다. 묘지를 바라보는 우리는 더욱 외롭지 않다. 죽음은 죽어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인간은 최대한 죽음 가까운 무엇을 표현하는데 매달려왔다. 묘비를 장식하고 글귀를 써넣으며, 그 아래 죽은 자의 영혼이 쉬고 있음을 애써 확신해야 스스로의 실존이 증명된다는 듯이. 효과는 컸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의 묘역에서 추모객들은 환청을 들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슈베르트의 가곡이 공기를 타고 넘실거렸다. 죽음은 비극이지만 통렬한 고통 뒤 이렇듯 향기로 화하는 것이다. 대가들의 영혼을 그들이 묻혀있는 땅 위에서 들이마시며, 추모객은 나의 삶 역시 언젠가 양명한 영혼으로 모습을 바꾸게 될 것을 짐작한다. 죽음이란 건 두려워만 할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세심하게 계획된 묘지는 그러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의 미학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정신승리의 기념물이기도 하다.
전통을 파괴하는 자의 필요조건은 한때 전통을 따랐던 경험이다. 바로크 이래 낭만주의 시대까지 유럽의 음악엔 변주는 있었으되 개혁은 존재할 수 없었다. 형식과 권위가 안정된 음의 조합을 보장해 주었으며, 명백한 이론이 바탕이 된 작곡과 연주는 청중의 감동을 자아내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시대를 이끌었던 천재 음악가들도 음률의 변용에 힘을 썼지, 혁명적 파괴와 해체를 시도해 본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1951)는 그래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좌충우돌하며 나아가느라 받은 충격의 총체는 전통과 이별한 형식이었다. 제2의 빈 악파 대장으로서 제자 안톤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와 삼각편대를 구성한 쇤베르크는 당시 음악계를 넘어 사회문화계 전반에 충격을 던졌다. 그를 이야기할 때면 부록처럼 따라 나오는 '무조 음악'과 '12음 기법'은 동시대 미술계에 등장한 전대미문의 추상화와도 비견될 수 있지만, 그보다 더한 마찰을 일으켰다. 실제로 쇤베르크는 칸딘스키, 코코슈카와 우정을 나누면서 화가로서의 비범한 재능도 보여주었다. 도대체 그의 무조음악과, 무조음악이 진화해 완성된 12음 기법이란 게 무엇인가. 문외한이라 돋아난 궁금증은 최대한 쉬운 이해를 구하러 다니게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둔한 두뇌의 소유자인 나는 최대한 쉽게 풀이를 하고 싶었다.
그럼 가보자. 먼저 무조음악이란 익숙한 것을 박살 내버린 시도라 생각한다. 해체주의이며 무정부주의다. 엉덩이에 땀이 나도록 앉아 바이엘을 뚱땅거리던 시절 익숙했던 악보의 일부를 보자.
삼 형제가 동시에 내는 소리는 예를 들어 이런 조합이었다. 도미솔 - 파라도 - 솔시레. 수학이 적용된 화음의 원리일 테지만 골치 아픈 설명은 피하자. 아무튼 보통의 악보에선 곡 하나의 서사가 으뜸 - 버금딸림 - 딸림, 그리고 다시 으뜸화음으로 돌아오는 방식이다. 도미솔에서 파라도로 가면 변화를 느끼고, 파라도에서 솔시레로의 전환은 급격한 긴장을 선사한다. 긴장은 해소되어야 하는 법. 딸림화음은 반드시 도미솔의 으뜸화음으로 귀환해 문을 닫고 나서야 한 편의 전통적인 곡이 완성되었다. 귀가 순해지는 안정감의 공식. Ⅰ - Ⅳ - Ⅴ - Ⅰ의 순서는 클래식이었다. 쇤베르크는 이를 파괴했다. 중심이 되는 화음이란 없다. 마땅히 돌아와야 할 으뜸음이란 것도 없다.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절대자가 없는 구성의 화음 배치로도 훌륭한 음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거다. 붙박인 질서를 해체하고, 존재자의 우열을 부정한 쇤베르크의 이론이다. 분노한 전통이 그의 멱살을 잡고 얼마나 흔들어댔을까. 무조로 구성된 그의 대표작은 <달에 홀린 피에로(Pierrot Lunaire)>라는 연가곡이다.
다음은 무조음악이 진화한 12음 기법이다. 형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를 넘어선 음계의 극단적인 공산주의 형식이다.
피아노를 기준으로 한 옥타브는 반음씩 오르며 총 12개의 음으로 구성된다. 도-도#-레-레#-미-파-파#-솔-솔#-라-라#-시. 보통 악보 한 마디 안에는 위에서 본 화음의 정형적인 배열로, 특정한 음이 다른 음보다 반복되어 등장할 가능성이 월등하다. 마디 하나가 으뜸화음을 표현했다면 도미솔 위주로 채워졌을 것이고, 버금딸림화음의 마디에선 파라도가 지배했을 것이다. 쇤베르크는 마디 내에서조차 우열이 생기는 것을 거부했다. 한 옥타브 안의 모든 음을 공평하게 한 번씩 등장시키고 나서야 다음 음렬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도#와 레♭가 같은 음이란 걸 이해하면 위의 음렬은 반복도 없고 겹침도 없는 공평무사한 12음들의 분산이다. 각자 한 번씩 선을 보인 뒤에야 다음 차례로 넘어갈 수 있다. 누구 하나라도 두 번 얼굴을 내밀면 그 즉시 퇴출이다. 용서가 안 된다. 똑같이 밥 한 술을 떠야지 욕심을 부려 두 세 숟갈을 퍼 먹다 걸리기라도 하면 바로 진실의 방에서 마동석과 마주쳐야 한다. 쇤베르크는 천재적인 음감으로 음악이 구축될 것 같지 않은 구성 방법을 택해 그만의 작품을 창조해 낸다. 한 사람당 한 표씩 행사하는 민주주의의 근본원칙이자 누구도 차별하지 않지만 누구나 한 번씩 힘을 보태야 하는 음률의 공산주의다. 말하듯 노래하거나 노래하듯 말하는 슈프레히슈티메(Sprechstimme) 창법으로 연주되는 <바르샤바의 생존자(Ein Überlebender aus Warschau)>가 그의 대표적인 12음 기법 작품이다.
한데 뭉쳐 다니던 화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진다. 질서는 흐트러진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은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에서 실체가 되는 듯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의 기법 또한 어느 특정한 음에 무게추를 달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인해 또 하나의 질서가 되어버린다. 해체가 극에 달하면 부활이 되는 것인가.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블랙홀이라는 실체로 관측되는 원리와도 같을 것이다.
모든 결과물은 그것이 형성된 원인이 있다. 대체 쇤베르크 안의 어떤 요소가 수 세대에 걸친 견고한 음악적 질서를 갈아엎게 만들었을까. 음악에서의 추상화를 창조해 낸 그의 삶은 변주의 연속이었고, 대나무의 마디처럼 변혁의 흔적은 확실했다. 피카소의 초기 그림이 너무나 정형적이어서 놀라는 것처럼, 쇤베르크의 초기 음악은 낭만파의 전통을 답습했다. 당시 유럽 음악의 지배자였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를 추앙하는 동시에 정통 독일 음악의 계승자임을 자랑스럽게 천명했다. 그의 음악에 변곡점이 생긴 건 불협화음의 빈도가 높아진 베토벤 후기 작품들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견조한 틀 안에서 약간의 변칙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러니 쇤베르크의 대기권 탈출은 그의 개인적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주류 독일 문화권에서 내쳐질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한 그는 각지의 유대인이 서서히 탄압을 받는 것을 목격하며 가치관에 균열을 일으킨다. 아직 홀로코스트의 공포는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유대인 스스로의 각성을 외치며, 신원 보증의 방편이었던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과감히 개종한다. 그의 능력은 음악에 국한되지 않았다. 유럽에 산재해 있는 유대인 중 상당수는 고국에서 추방되거나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예언을 하며, 자신이 유대 민족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는 언급마저 주저하지 않았다. 정세를 내다보는 안목은 탁월했고 리더십은 강력했다. 그러나 정작 죽는 날까지 그가 괴로워했던 것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시기에 이미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었던 자신이었다. 이역에서 동족의 비극을 바라봐야만 했던 쇤베르크는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학살을 처절한 음악으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12음 기법의 작품 <바르샤바의 생존자>는 탄생했다. 당초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미련을 두지 않았던 그는 바흐에서 시작된 독일 음악계의 줄기를 어떻게든 이어 잡으려 했지만, 독가스처럼 서서히 퍼진 파시즘의 먹구름 아래에서 고국에 등을 돌리고 오직 유대인으로서 존재했다. 쇤베르크의 무조와 12음 기법은 삶의 불협화음이 재료가 되어 만들어진 전인미답의 신세계였다.
빈 중앙묘지에서도 쇤베르크의 무덤은 전설들이 뭉쳐 있는 음악의 묘역에서 따로 떨어져 있다. 미국에서 1951년 숨을 거둔 그는 23년이 지난 뒤에야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유해를 모시고자 한 빈 시의회의 의지가 작용했다. 그의 묘석은 독특하다. 마치 걸출한 조각가를 추모하는 느낌이다. 정사각의 집합인 정육면체도 아니다. 각 변은 커브를 그리며 유려하게 하강과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 길이도 각각 다르다고 한다. 육면체는 주사위처럼 안정적으로 놓이지 않고, 뾰족한 모서리로 육중한 몸체를 지탱하고 있다. 심지어는 땅을 썰려는 기세다. 무덤의 주인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묘석은 주인의 음악과 닮아버렸다. 더 이상 조성으로 흡수되지 말고 그렇게 독립해 존재하라. 하나하나로서 기괴해 보일지 몰라도 너희들의 연속은 해방된 질서를 만들어낼 것이다. 불안해하지 마라. 때로는 불편하고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는 너희 개별로서의 기초는 음악계 전체를 지탱할 것이니.
중앙묘지가 빈에서의 마지막 여정인 까닭에, 벨베데레에서 가까운 쇤베르크 센터를 놓친 게 무엇보다 억울했다. 뭐 하나쯤은 남겨놓고 가야 돌아올 핑계가 되는 법. 그때가 되면 내 귀는 12음 기법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이 광활한 공동묘지에 잠들어있는 대가들의 유산은 절대 겹치는 법이 없다. 빗각으로 어긋나 보이는 쇤베르크의 인생과 작품은 오스트리아가 영원히 품고 가야 할 유산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