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 빈 중앙묘지 ③
장례의 방식은 지역과 시대, 문화권에 따라 다양했다. 한 시대의 압축인 한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때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사회적 합의가 바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업사회의 정착민은 거주지 부근의 양지바른 땅에 그들의 선조를 묻고 망자의 사후에도 대면을 청했다.(비록 얼굴을 바로 볼 수는 없어도) 묻힌 곳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던 까닭에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가 누워있는 바로 그 자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안부를 묻고 축복을 기원하며 지난날의 추억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망자의 혼(魂)은 하늘로 흩어지지만 백(魄)은 대지로 스며드는 법이라 믿었기에, 흙은 선조의 이불과도 같았다. 유교문화권의 매장 방식이 바로 그랬다.
동남아시아의 한 원시 부족은 시신을 관에 넣어 암벽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이른바 애장(崖葬)이다. 절벽 꼭대기가까지 관을 메고 가는 수고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으나, 외부로부터 시신 훼손과 부장품 손실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대신 그들은 망자를 닮은 인형을 곁에 두고 고인을 추억했다고 한다. 온전한 시신을 추구했던 이들은 이집트의 미라 보존 기술이 간절했을 것이다.
불교 세계관이 반영된 티베트에선 독수리 등의 맹금류에게 시신을 바치는 조장(鳥葬)을 택했다. 산소가 희박하고 건조한 고지대에서 매장은 좀처럼 썩지 않는 시신 탓에 애초 권장할 수 없는 장례 방식이었고, 자연에서 온 신체는 자연에 보시를 하며 최후를 맞아야 한다는 불교의 정신이 조장의 정당성을 더했다. 우리의 삼국시대엔 흐르는 물에 시신을 떠나보내는 수장(水葬)이 빈번했고, 연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해방되는 영혼을 기리며 화장(火葬)을 받아들인 문화는 범 세계적이었다. 다만 처형과 단죄의 방식으로서의 화장 역시 보편적이었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현대의 장례 역시 여러 형태를 취한다. 가치관의 변화와 각 지역의 여건에 따라 매장을 비롯해 화장 후 납골, 자연장, 산골 등의 방식으로 다양화되었으며, 고인의 유언, 유족의 선호에 따라 마지막 가는 길이 선택된다. 그러나 문화권에 따라 극단적으로 상이했던 과거의 장례 방식은 몇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으로 보편화되었고, 우리는 이제 어느 곳의 장례 문화를 접하든 크게 당황해할 필요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빈 중앙묘지에 묻힌 영혼은 그들의 장례 방식에 만족했을까. 조장과 화장으로 흩어지지 않고 시나브로 대지에 스며들었으니 안온했다고 고마워할지도 모르지만, 단박에 사라지지 않아 쿨하게 가지 못했다며, 차지해 버티고 있는 자리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천 년 기독교 문화에서 이어져 온 유럽인들의 소원 중 하나는 죽어서 교회 땅에 묻히는 것이었다. 교회가 운영하는 묘지에 자리 잡기가 힘들다면 가장 가까운 곳이라도 좋았다. 사후에는 교회의 십자가가 보이는 범위 안에 놓여야 천국으로 가는 3등 칸 티켓이라도 끊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천국행도 든든한 빽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인지. 중세를 지나 각 교회의 땅은 늘어난 묫자리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여유 있는 교회들은 소유지를 늘려가며 공동묘지 형태의 추모 공간을 조성했다. 결국 포화되는 묘소를 감당하지 못한 교회와 각 도시는 교외에 대형 공동묘지를 맘먹고 설계한 뒤, 시내 중심지에 가득했던 묘를 하나의 광대한 공간으로 헤쳐 모이게 만들었다. 앞서 순례한 잘츠부르크와 할슈타트의 묘지가 교회의 울타리에 들어서 있던 것과 달리, 빈의 중앙묘지는 전형적인 도시 재설계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공동 추모 공간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겠다.
중앙묘지의 중앙엔 카를 뤼거 기념 교회(Dr. Karl Lueger kirche) 혹은 장크트 카를 보로메오 교회(St. Karl Borromeo kirche)라 명명된 예배당이 존재감 가득히 홀로 서 있다. 중앙묘지를 조성한 카를 뤼거 빈 시장과 성 카를 보로메오를 기린 교회 건물은 아르누보 양식의 백색 몸통과 청색 돔의 조합이 무척이나 세련돼 보인다. 빈 중앙묘지의 헤드쿼터와도 같은 교회는 오스트리아 역대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원형 구조물 전체를 앞마당으로 삼고 있다. 기품 있는 마차를 타고 다녀야 겉핥기식의 구경이 가능할 정도로 광활한 내부는, 이곳이 넓다는 것을 알고 나아가는 걸음마저 주눅 들게 한다.
딱히 누군가를 추모하러 오지 않더라도 훌륭한 산책의 공간이 될 중앙묘지다. 직접 운전을 해서 오지 않는다면, 빈의 중심가에서 중앙묘지로 오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71번 트램을 타는 것이다. 그래서 빈 시민들은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놀리거나 화나게 만들 때 이런 말을 쏘아붙인다고 한다.
"너 정말 71번 타고 싶냐?"
아무 죄 없는 트램이 억울해할 관용 표현이지만 그만큼 묘지로 오는 방법을 모두가 훤히 알고 있다는 소리다. 만약 빈에 사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되받아쳐주자.
"응, 너랑 같이."
이번 여정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친 과학자의 묘비다.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Ludwig Eduard Boltzmann, 1848~1906), 오스트리아 빈이 낳은 불세출의 물리학자. 그가 없었다면 인류는 원자와 분자, 그리고 그것들의 운동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에 한참 늦게 눈을 떴을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든 천재들의 업은 천재들이 알아서 수행하며 우주와 지구의 원리를 탐색해 가는 거라고 하지만, 볼츠만이 주장했던 이론은 현대물리학의 기초 중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도저히 그의 묘비 앞에 멈춰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낯선 예술의 공습이 만연했던 빈의 세기말 한쪽엔 계단식으로 발전했던 물리학과 전자기학의 융합이 있었다. 그러나 예술과 달리 변혁을 일으키려면 검증과 증명이 수반되어야 하는 과학의 무대에선, 만고불변을 깨고 나온다는 것의 불편함을 거부하는 자세가 디폴트값이었다.
추앙받아야 할 볼츠만의 업적은 잔가지를 다 떨구어낸다 쳐도 두 가지다. 먼저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와 분자의 실재를 전제했다. 밝혀낸 것이 아니고 전제했다는 것이라 더 위대하다. 직관이 먼저고 확인은 나중이기 때문이다. 다만 눈으로 확인되는 것만이 과학의 본질이고, 따라서 물질의 기본은 원자 하나하나가 손을 잡고 모여 있는 모습일 수 없는, 연속적인 동질의 표면일 뿐이라는 게 당시의 지배적인 믿음이었다. 모든 물리적 운동은 전자기의 힘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을 원자나 분자들의 움직임이란 그저 순진한 망상이라는 것이었다.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1838~1916)는 원자 부정론의 대표 주자로서, 볼츠만의 견해에 극렬히 반대했다. 총알이 만든 충격파를 연구해 음속과 비교하는 단위인 '마하' - 이름의 마하는 '마흐'로 바뀌었으나 속도의 단위인 마하는 표기법이 고정된 채 남았다 - 를 탄생시킨 그였지만, 현미경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원자의 존재는 그의 기준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래성의 모래알이었다. 그러나 오늘도 전자레인지 속 분자들은 볼츠만의 주장처럼 빠르고 거칠게 맞부딪히며 우리의 식은 피자를 덥히고 있다.
볼츠만은 또한 열역학 제2법칙으로 알려진 엔트로피 법칙의 선구자였다. 열역학 함수인 엔트로피는 한자어로 '무질서도(無秩序度)'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질서는 흐트러진다는 것. 특정한 공간 안에 입자들을 질서 있게 배열해 놓으면 그들은 곧 섞이고 충돌한다. 엄마가 깔끔하게 내 방을 정리해 놓아도 시간이 지나면 엉망진창이 되는 것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식탁 위에 놓인 뜨끈한 미역국은 저절로 데워지지 않고 식어버린다. 근거리에서 치고받던 입자들이 점점 무작위로 튕겨나가 열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이다. 깜빡 잊고 상온에 놔둔 아이스크림은, 손을 잡고 굳게 뭉쳐 있던 분자들이 느슨해지며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커피에 우유를 두어 방울 떨어뜨리면 우유 입자는 커피 속으로 침투한다. 그 결과 커피의 전체적인 색은 밝아지며 카페라테의 갈색으로 변한다. 한번 번진 우유의 입자들이 다시 뭉쳐 구석에 하얀 일부분으로 존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입자들이 그렇게 재배열될 '확률'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률이 높은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표현한다. 만약 엔트로피가 거꾸로 '감소'하게 하려면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연을 역행하기 때문이다. 어질러진 내 방은 진공청소기를 밀고 끄는 엄마의 전완 근력 에너지가 필요하고, 식어가는 미역국은 열 에너지의 투입이 필수적이다. 따로 노는 입자들을 굳게 뭉치려면 냉동실의 전기 에너지가 쓰인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자연 현상은 분자들의 자연스러운 운동의 결과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볼츠만의 견해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미세 관측을 할 수 없던 시대에 입자들의 운동이라니. 그가 홀로 앞서갔을 뿐이다.
시대를 앞서 갔던 죄는 둔중했다. 볼츠만은 이탈리아 두이노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스스로 목을 매 생을 마감했다. 정확한 자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긴 시간 절대다수의 과학자들과 벌인 논쟁으로 삶이 피폐해졌기 때문일 거라는 설이 압도적이다. 내성적인 그의 성격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보다 더한 '두이노의 비가(悲歌)'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내 말이 맞다는 쾌재가 아닌 안도의 담담함을 표현하는 듯, 묘비 속 그의 머리 위엔 S=k log W라는 엔트로피 공식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k는 개별 입자가 갖는 에너지를 온도와 연관시켜 주는 물리상수계의 슈퍼스타, '볼츠만 상수'다. 특정 거시 상태에 있는 미시 상태의 수 W에 로그를 취한 값에 볼츠만 상수 k를 곱하면 엔트로피(S)가 도출된다. 자세한 법칙의 탐구는 물리학 책이나 A.I. 와 함께 하기를.
막간의 퀴즈. 세 인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정답은 유치 찬란하다. '동명'을 가진 '이인'들이다. 셋의 이름은 '루트비히(Ludwig)'다. 독일어권에서 뮐러(Müller)는 방앗간 주인, 슈미트(Schmidt)는 대장장이, 직공은 베버(Weber), 짐머만(Zimmermann)은 선조가 목수였음을 알려주는 흔한 성(姓)이다. 그들의 성이 직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 이름은 주로 각자의 성격과 특질을,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이 담긴 흔적이다. 레오폴트(Leopold)는 용감함, 루돌프(Rudolf)나 아돌프(Adolf)는 영예로움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면 루트비히는 전사의 기질을 내포한 이름이었단다. 세 인물에서 전사의 기질이 느껴지는가? 만약 느껴진다면 그것은 내면으로 파고들어 에고(Ego)와 싸우는 그들의 투철함에서 비롯된 것이겠다.
꺼져가는 청각에 굴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았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전사임에 분명하다. 그의 내부에는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용자(勇子)가 박혀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자다. 철강왕인 아버지를 둔 부유한 환경을 단박에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가 정원사와 교사로 삶을 채웠던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빈 대학교에서 강의하던 볼츠만을 동경해 빈 대학 물리학과를 목표로 공부하다 볼츠만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크게 낙담해 베를린 공대로 진학했으며,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의 저서를 읽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과 논리학이 바탕이 된 그의 철학의 기초를 연마했다. 볼츠만이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고 비트겐슈타인을 가르쳤다면, 오늘 우리는 <논리철학논고> 대신 '비트겐슈타인 상수'와 더 익숙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론을 죽음의 순간까지 밀고 나간 볼츠만도 '집념의 전사'라고 할 수 있다면, '루트비히'는 전사의 타이틀에 걸맞은 이름이라 해도 되겠다. 인정.
거대한 빈 중앙묘지엔 그보다 더 거대한 인물들이 누워있다. 예술과 과학의 최전선에서 시대를 앞서나간 천재들을 담아내려면 묘지는 확장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청정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한갓진 추모의 공간은 위인들이 모셔진 성소라는 엄숙함을 덜어주며 추모객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세계 문화의 수도, 빈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중앙묘지로 잡은 것은 신묘한 한 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흥망성쇠를 따라 명멸한 오스트리아 정신의 정수를 매조지하기에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공간이 또 어디 있을까.
이제 다시 체코로 들어간다. 여행의 끝은 시작으로 연결된다. 고대 윤회사상과 중세 연금술사의 비밀스러운 상징이 된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은 그림으로 표현한 이번 순례와도 같다. 윤회나 불사, 무한이라는 거창한 의미란 없다. 설레어 첫 발을 내딛던 출발지로의 귀환. 단선형 여정에선 느낄 수 있는 없는 기묘한 감각이다. 여행의 말미에 발끝이 가까워지면서 여행은 일상에 기록되고, 일상은 여행에 묻어 나오는 아득한 이치를 깨닫게 된다. 묘지를 순례할수록 생의 농도가 짙어가는 느낌도 결국은 삶과 죽음의 연결을 직감하는 꼬리를 문 뱀의 교훈일까. 마지막 목적지는 블타바 강이 뱀처럼 마을을 휘감고 돌아나가는 형상의 마을이다. 강물을 따라 시선을 흘려보내며 막바지 여행의 먹먹함을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