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키 크룸로프 역사지구 ①
징검다리처럼 여러 도시를 거쳐가는 여행이라면, 종착지가 될 마지막 목적지의 선정은 신중해야 한다. 물론 그 신중함이란 각자의 개성에 맞춘 미덕이겠다. 지역색을 담뿍 담은 소도시를 여정의 마지막에 둘 수도 있고, 한 나라의 수도인 대도시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도 있다. 유럽의 한적한 소도시에는 국제공항이 없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귀국을 앞두고서는 어차피 대도시로 향해야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동일뿐이다. 옛 정취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작은 마을에서 긴 여정을 마무리하려는 여행자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다. 일분일초라도 꿈에서 일찍 깨어나기를 거부한다. 낯선 공기와 자연을 가장 깊숙한 곳에서 체화하려는 의지가 가득할뿐더러,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은 애처로운 유형이다.
대도시에서 마지막을 즐기려는 여행자는 용감하다. 그가 한 방울이라도 흡수하고자 하는 것은 이국의 현실 세계다. 한동안 마주치지 못할 그곳의 시민들과 문화유적들, 또는 미래의 징후들이다. 대도시의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세련된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귀국 후 적응에도 별 어려움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가 되어버릴 여행의 아쉬움은 다시 떠날 거라는 다짐으로 사뿐히 누를 뿐이다.
나는 전자 쪽이다. 삶과 죽음의 흔적을 탐색한 이번 여행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과거의 유산을 따라 동선이 결정되는 중부 유럽의 여정에서만큼은 과거가 짙게 드리워진 공간이라야 피날레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관광객이 빠져나간 허전한 시간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마을. 꿈같은 시간을 붙잡으려 발버둥 치는 안타까운 인간형일지라도, 그나마 남아있는 금쪽같은 시간을 채우려면 이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인 편자 모양으로 휘돌아나가는 블타바강과 밀집한 붉은 지붕이 현실 속 동화를 축조하는 마을.
체스키 크룸로프(Český Krumlov)다.
방송에서 이따금씩 소개돼 프라하에서 오가는 당일치기 관광지로 유명해진 곳이지만, 실상 국내 여행자들에게 알려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옛 것이 보존된 구역을 잠깐 들렀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걷고 먹고 보고 자는 공간 자체가 옛 것의 총화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머물게 되는 곳은 역사 지구라 불리는 경계 안이다. 도시의 다른 얼굴이 궁금해 역사 지구를 빠져나오면, 낮은 현대식 빌딩이 드문드문 서 있을 뿐 황량하기까지 한 외양을 마주칠 뿐이어서 금세 마을의 안쪽으로 되돌아가기 일쑤다.
도시의 정체성은 이름에서 고스란히 노출된다. 체스키(Český)는 '체코의', '보헤미아의'라는 뜻이고, 크룸로프(Krumlov)는 '굽이치는 강변의 풀밭'이다. 체코의 도시 중에는 유독 '체스키' 혹은 '체스케'가 수식어로 붙는 곳이 많은데, 체스케 부데요비체(České Budějovice), 체스키 테신(České Těšín), 체스키 슈테른베르크(Český Šternberk) 등이 있다. 그러니까 미국의 도시가 '아메리칸 뉴욕', '아메리칸 로스앤젤레스'로 불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가 봐도 체코의 도시란 걸 알 텐데 굳이 '체스키'를 강조한 것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열강들의 틈에서 고난의 세월을 겪어낸 보헤미안 애국심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한때 모국어가 금지되고 독일어를 강요당한 쓰린 과거가 있는 체코의 도시들은 여전히 독일어 지명도 지니고 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크루마우(Krummau)', 체스케 부데요비체는 '부트바이스(Budweise)'라고도 불린다. 크루마우는 체코어 크룸로프와 같은 뜻이고, 맥주의 산지 부트바이스에서 태어난 라거 맥주의 영어 이름은 '버드와이저'로 잘 알려져 있다.
휘돌아가는 블타바강은 체코 남부의 무역 거점이었다. 13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 지어진 건물들은 보강이 필요했겠지만 대체로 온전한 옛 모습으로 서 있다. 짐작하다시피 도시 전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 35년에 이른다. 사행천(蛇行川)이 마을을 가둔 형태는 안동 하회마을의 판박이다. 낙동강의 은혜를 받은 하회마을은 초가집들의 군집이 아취를 더하고, 블타바 강의 비호 속 체스키 크룸로프는 붉은 박공지붕의 물결로 빽빽하다. 강대국들이 군침을 흘리던 보헤미아의 땅이었음에도, 체스키 크룸로프는 큰 화를 입은 적 없이 곱게 늙어가는 중이다. 얼마나 복 받은 도시인가. 가장 큰 덕을 입은 건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이다. 수백 년을 타임슬립해 중세의 거리를 타박타박 걸을 수 있으니 도시는 곧 박물관이다.
원심력을 시전하며 마을을 돌아 나오는 블타바강은 유난히 검다. 원인은 자연의 콜라보 작용이다. 체코 남서부의 산지에서 발원한 스투데나 블타바(Studená Vltava)와 테플라 블타바(Teplá Vltava)라는 두 개울은 체스키 크룸로프 근처에서 합류해 블타바 강으로 완전체를 이루는데, 습지와 이탄 지대를 통과하면서 강물은 어두운 탄닌 성분을 함유하게 된다고 한다. 거기에 이 지대에는 어두운 색의 암석들이 강바닥에 깔려 있으니 물이 더 검게 보일 수밖에 없다. 도시를 떠난 강은 북으로 북으로 달리며 품이 넓어져, 프라하를 관통한 뒤 엘베강과 합류한다. 세월을 녹여낸 듯한 곰삭은 블타바는 체스키 크룸로프의 고고함과 맞물려 둔중하게 감겨 흘렀고, 또 흐르고 있다.
누가 여행의 목적을 생각 내려놓기라고 했나. 사금파리 같던 잡념들은 날아가버릴지라도 날카로운 집중력은 되레 높아지는 걸 느낀다.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은 섬세해지고, 한 컷의 풍경마다 나의 이야기가 덧입혀진다. 내리누르는 일상의 압박은 산산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대신에, 예민하고 명징한 그 무엇이 머리와 가슴으로 공평하게 침투한다. 이 한 몸 툭 던져 넣어 쉬어가고자 했던 체스키 크룸로프는 도무지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상념과 생각은 이동하는 발자국과 보조를 맞추어 가다 날이 선 감성으로 진화한다.
도시의 상징을 잇는 순례는 내일 할 작정이다. 해가 뉘엿 넘어가 어둠이 지배하기 시작한 지금은, 골목을 빠져나와 마주한 블타바강변이 나의 이상향이다.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고도(古都)의 야경은 굽이친 강의 정체를 확인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배경이다.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은 체스키 크룸로프의 매력인 것이다.
오늘 밤은 강과 함께 나도 흘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