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년이 빚은 도시의 전망

체스키 크룸로프 역사지구 ②

by Total Eclipse






온전한 하루를 블타바강의 흐름에 바쳤다면 오늘은 만곡천의 도시, 체스키 크룸로프의 형상들을 좇아 기웃거려야만 한다. 체코 남부의 맑은 아침은 선연하다. 여행의 말미에 다다라 흘러내릴 듯한 육신은 그 청아한 기운을 흡수해 보기 좋게 재건된다. 막 태어난 세포들이 낡은 부모들을 완벽히 대체하는 느낌이다. 이런 컨디션이라면 다시 장도의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만 같다. 궁합이 맞는 공간과의 공명에는 믿기 힘든 에너지의 폭발이 있다. 숙소의 정문을 나서는 즉시 도시의 과거다. 영주를 모시던 하인들이 살았다는 라트란(Latrán) 거리는 음식점과 소품샵 등이 연달아 이어지는 매력적인 역사 지구의 한 축이다. 프라하의 시그니처인 돌바닥은 이곳에도 예외 없이 깔려있어, 발바닥에 묘한 긴장감과 이질감을 전달한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걸쳐 지어진 각각의 건물은, 이방인을 위한 레스토랑이나 기념품 가게로 자신의 역할이 바뀌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긴 시간 훌륭히 보존된 거리는 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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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_101135.jpg 아침의 라트란 거리


외부에서 - 이 도시만큼 '외부'라는 것의 어감이 거슬리는 곳도 흔치 않을 것이다 - 방문객이 밀려오기 전의 라트란 거리는 비현실적이다. 나 혼자만을 위한 가상의 무대가 펼쳐진 듯, 오백 년에 걸친 건축물의 아카이브에 V.I.P. 티켓을 끊고 입장한 셈이다. 동쪽의 해는 길고도 뚜렷한 그림자를 건물의 서쪽으로 그려내, 주위는 온통 흑백의 대비 또는 색채들 간의 대결이다.

라트란 거리에서 역사지구의 중심 방향으로 걸어가면 오른편으로 경사를 이룬 공터가 보이고, 오르막의 공터는 체스키크룸로프성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유도한다. 성곽의 도입부를 알리는 흐라덱 성탑(Hradek Vezi)은 마을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며 체스키 크룸로프의 부감을 간직하고자 하는 방문객들을 끌어모은다. 우리는 야경이 일품인 유럽의 도시를 꼽곤 하지만 내려다보는 조망이 환상적인 도시들도 여럿 존재하는데, 흐라덱에서 감상하는 체스키 크룸로프는 누가 뭐라 해도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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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30_110734.jpg 흐라덱 성탑과 성탑 전망대에서 조망한 마을


흐라덱을 내려와 성의 안쪽을 향해 올라간다. 큼지막한 각각의 성채로 진입하기 전 부속 건물들의 벽면에서 어색함을 감지한다. 그러고 보니 체스키 크룸로프성에 가면 독특한 장식 기법을 확인해 보라고 권유하는 여행 정보가 생각났다. 여러 겹으로 칠한 회반죽을 굳힌 후 표면으로부터 도안한 대로 긁어내 벽돌처럼 보이게 만든 '스그라피토(Sgraffito)' 장식 기법이 적용된 벽이었다. 긁어낸 깊이에 따라 다른 색의 반죽이 노출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나, 긁어내서 만들었다기보다는 단순히 채색한 것만 같다. 벽을 눈앞에 두고 가까이 바라볼수록 증폭하는 촌스러움은 어쩔 수없다. 뒤돌아보니 흐라덱 성탑의 원기둥 표면에도 같은 기법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정교한 그라피티라고 해야 하나. 실물 벽돌이 아니라는 건 너무도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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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그라피토 기법으로 장식된 벽면


13세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은 약 백 년 후 보헤미아 왕국의 명문가 로쥼베르크(Rožmberk) 가문이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하며 전성기를 누리다가, 에겐베르크(Eggenberg) 가문을 거쳐 18세기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 가문으로 관할권이 넘어갔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되었지만, 2차 대전 기간 나치 독일의 지배와 관리 하에 놓이기도 했던 체스키 크룸로프 성은 소유권의 역동적인 뒤바뀜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모습으로 도시의 언덕 위에 버티고 서 있다. 아치형 입구의 상단엔 성을 소유했던 대표적인 두 가문, 로쥼베르크와 슈바르첸베르크 가문의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다. 아쉬웠을 에겐베르크 가문은 동명의 지역 맥주 상표로 후대에 이름을 떨치고 있어 실속을 꾸준히 챙기는 중이다.

20240829_104438.jpg 출입구 위에 새겨진 로쥼베르크, 슈바르첸베르크 가의 문장


도시에서 차지하는 성의 존재감은 지나칠 정도다. 체코 내에서도 프라하성에 이어 두 번째 규모라고 하는데, 도시의 면적이 지금의 세 배 이상이라 가정해도 체스키 크룸로프성은 대장급 위용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다. 성곽을 따라 걸으며 확인하는 개별의 성채는 개성이 뚜렷하다. 모두가 다른 양식이라는 소리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약 오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다 보니, 성은 고딕과 르네상스부터 바로크 양식까지 유럽의 건축사를 나열하고 있다. 성내에는 약 40개의 건물과 궁, 안뜰과 거대한 정원이 있어 방문객의 동선은 다채롭기 마련이다.

올라서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 파리의 에펠탑과는 다르다. 성 내부에서 도시의 전경은 물론이고, 완만하게 휜 성곽의 구조 덕분에 체스키 크룸로프성 자체의 매력적인 외관을 전망대에서 감상할 수 있다. 흐라덱 성탑에서 조망하는 도시도 장관이지만, 체스키 크룸로프의 대표 이미지는 바로 성의 일부인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다. 마치 연속된 기왓장처럼 겹쳐 보이는 적갈색 지붕의 집합과 검은 블타바강의 만곡이 어우러져 한 폭의 명작이 되어버린다. 이 구도가 최선인 건지, 자꾸 의심스러워하면서 연신 촬영 버튼을 눌러댈 수밖에 없는 포토 스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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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_105940.jpg 전망 스폿에서 바라본 체스키 크룸로프 성
20240829_105819.jpg 강과 건물이 풍경화를 만드는 도시의 전경


넋을 빼고 바라볼 때는 멍청해 보일수록 진심이다. 반원을 그리며 동화 속 집들의 모둠을 감고 돌아가는 블타바의 먹빛은, 축복을 쏘는 듯한 하늘의 푸른색과 공모를 하며 붉은 지붕의 선명함을 배가시킨다. 이 도시의 미덕은 황량하지 않은, 적당한 밀집도의 시가지가 아닐까. 성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체코 남부 특유의 가없는 전원 풍경이 날 선 신경을 무디게 하고, 문화의 자부심이 곳곳에 박힌 역사 지구는 미감을 풍성하게 만든다.

전원에서 살아간 시간의 총합이 대도시에서의 그것을 역전한 지 수년 째가 된 나에겐 무시 못할 부작용이 생겼다. 모자라는 참을성이다. 단서가 있다. 간혹 대도시에 머무르는 날이면 어김없이 따라오는 참을성의 부재. 특히 운전이라도 해야 하는 날에 나의 에너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마냥 줄줄 샌다. 꼬리를 물고 늘어진 차량의 행렬에 숨이 막힐뿐더러, 차라리 걷는 게 나을 성싶어 차문을 박차고 튀어나가려 안달이다. 도시 운전자들의 준법정신에 놀라울 따름이고, 동맥경화처럼 막혀버린 교통의 흐름 속에도 굳건한 그들의 평정심에 찬사를 보내곤 한다. 정말이다.

블로거들에게 별점 만점을 받은 맛집에서 웨이팅이란 차라리 디폴트값이다. 아무리 허기가 져도 한두 시간쯤은 가볍게 기다리는 메트로폴리탄의 내공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줄을 서서 먹어야 할 까닭이 없었던 촌놈의 위장은 뭐라도 들여보내라고 난리다. 그러니 참을성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선 대도시에 살아야 하고, 전원의 혜택을 누리며 시골에 살려면 전국 평균 이하의 참을성쯤은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인의 참을성을 요구하지 않는 체스키 크룸로프는 나에게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프라하에서 당일 관광을 온 한국인들의 해맑기까지 한 미소는 꽁꽁 가두어놓은 그들의 참을성이 봉인 해제되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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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_175902.jpg 성의 해자에 살고 있는 곰을 구경하는 여행자들


공중의 요새, 체스키 크룸로프성 감상을 마치고 해자 위 다리를 통해 나오는 길.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생명체인 곰들을 알현한다. 로쥼베르크 관할 시대부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사육했다는 곰은 이제 침입자 대신 관광객을 맞이하는 마스코트가 되었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철퍼덕 돌아누워 게으름을 피우는 꼴이 영락없는 주말의 내 모습이다. 일말의 경계심도 필요치 않게 된 해자 안 곰들은 야생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을지. 직접 들어가서 시험해 보면 어떨까 장난기 섞인 상상을 해보니, 말 풍선 속 만신창이가 된 내가 보인다. 죽은 척 해도 소용없더라. 곰은 어찌 됐든 야수다.


체스키 크룸로프의 보석인 블타바강과 성을 보았다. 도시의 자연과 외관을 보았다면 이젠 사람을 만날 차례다. 충만한 자기애를 품고 낭만의 고장에 왔지만 좌절을 떠안고 떠나야 했던 그다. 한때 그를 내친 이 도시는 이제 한도를 초과해 그를 추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