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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Jun 12. 2020

07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부산, 제주 하귀

모든 곳의 어떤 것들










 2층 발코니 바닥에 새가 죽어있었습니다. 연두색이 곱게 반짝거리는 작고 예쁜 새였습니다. 


 며칠 후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잘 알려진 알베르 까뮈 作 <이방인>의 첫 문장입니다. 언젠가 그렇게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날이 오리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써 내려가는 느낌은 너무도 이상합니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입니다.


  코로도 영양분을 넣지 못하고 링거로만 생명을 유지하게 되셨다는 소리를 듣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했습니다만, 얼마 전 찾아뵈었을 때 상태가 호전돼 내심 더 버티시리라 생각을 했던 터라 너무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주말 새벽, 어머니로부터 온 처음 두 통의 전화도 받지 못하고 바보같이 곯아떨어져 있다가 문자로 확인하고 나서야 전화를 드렸습니다. 곁에서 임종을 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조차 제때 받지 못했습니다. 이쯤 되면 불효자의 운명은 타고난 것 같았습니다. 급히 구한 항공권이었지만 당장 내 맘대로 날아갈 수 없는 노릇입니다. 섬에서 산다는 것이 원망스러운 순간입니다.


 지난주 부산의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웃으며 돌아왔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임종 직전 짧은 면회를 제외하고는 환자를 만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많은 걱정을 했지만, 아들 녀석과 함께 손을 잡고 제주에서 왔다고 하니 병원 관계자분께서 너그럽게 면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최근 아버지의 상태가 좋진 않았던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면회를 하기 전 아버지를 담당하시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뜨지 않으신다고. 한 번에 한 사람만 면회가 가능했습니다. 아들 녀석이 먼저 할아버지를 만나러 들어갔다 나와서는 아무것도 아닌 듯이 말을 합니다.


 "할아버지 눈 떴어. 끄덕끄덕 하며 대답도 하시던데?"


 손자의 힘이랄까요, 할아버지를 유독 좋아했던 녀석의 소리가 귓전에 들리니 작은 기적이 일어난 듯도 보였습니다. 들어가 보았습니다. 일주일 전에 봤던 얼굴과는 다르게 혈색도 좋아진 듯하고 눈도 또렷하게 뜬 모습이었습니다. 호흡기를 대고 있고 여전히 폐는 쪼그라들고 있었지만 저의 얘기를 들을 준비가 돼 있으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삶의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가까운 과거의 기억부터 사라진다고 하지요. 몇십 년 전 일들은 지금 당장 일어난 것처럼 오히려 생생한데 지금 주위의 상황들과 본인의 모습은 제대로 파악하는 게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올해의 기억이 사라지고 지난 10년의 기억이 날아가버리며, 이어서 이삼십 년 전의 기억들이 점점 희미해지는 쪽으로 진행되는 슬픈 증상임이 당연합니다. 물론 뇌의 건강도에 따라 큰 차이가 나기는 하겠지요.

 아버지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물어봅니다. 


 "아버지, 아빠 아들 영재 이제 몇 살인 줄 아세요?"


 사람의 감각 중 가장 끝까지 살아있는 것이 청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대답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렇게 물어본 뒤 잠시 후 또 크게 말씀드립니다. 


 "제가 50이에요, 아빠 아들 영재 나이가 이제 50이라고요." 


 그 순간 분명히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눈이 화들짝 놀라는 듯이 급격히 커지는 것을.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 영재가 꼬마였던 시절쯤에 머물러 계시는 걸까요? 그렇다면 놀라실만했습니다. 사실 그런 반응을 기대하며 물어봤던 거니까요.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주로 그렇게 씁니다. 그런데 오늘은 걱정이 돼 큰일입니다. 눈물이 조금씩 배어 나와 주위에서 이상하게 쳐다볼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없는 커피숍은 오래 있을 것이 눈치 보여 들어가기 부담스럽고요, 도서관은 너무 경직돼 자판을 속도감 있게 두드리며 편히 글을 쓰기엔 망설여집니다. 그냥 꾹 참고 써야겠습니다. 이상한 아저씨로 보던 말던 모르겠습니다.


 부모를 여읜 많은 분들이 공히 느끼셨을 이런 상실감을 굳이 쓰고 싶어 못 견디겠는 이유는, 제가 썩 자랑스러운 효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평소에 연락이라도 자주 드렸던 평범한 자식이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말로만 떠들어대고 따뜻한 모습 한 번도 보여드리지 않았으며 표현해 인색한 데다 냉정하기만 한,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도 못한 주제에 식사 좀 제대로 하시라고 호통이나 치는,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함부로 대하고 사랑하지 못한 크나큰 죄책감을 본능적으로 줄여보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면죄부를 끄적거리고 있는 것이랄까요. 이렇게 해서도 죄가 덜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작정 시도해 보는 겁니다. 아니, 무슨 짓을 한다 해서 뒤늦게 죄를 덜 수 있는 방법은 없어야 합니다. 적어도 부모님께 지은 죄만큼은 말이죠.

살아계실 때 잘하라고 합니다. 돌아가신 다음엔 늦는다고. 그런데 저는 이럴 줄 알았습니다, 다 그런 거지 하면서. 누구나 후회는 할 텐데 살아계실 때라 해서 어떻게 모든 걸 잘해드리나, 그리고 충실히 그렇게 실천했습니다. 대충 대했습니다. 정말 나쁜 놈이죠. 남아계신 어머니에게 또 그럴까 봐 두렵습니다. 그래도 나아지는 게 있어야 할 텐데 그리 될지 모르겠군요. 인간 개조가 필요한 지경입니다. 

 이런 낭패입니다. 악어의 눈물이 터져 나옵니다.


    아버지가 계셨던 부산의 요양병원,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린 시절 살던 아파트는 요즘과 달리 동과 동 사이에 넓은 잔디밭이 있었습니다. 여름과 가을이면 동네 친구들끼리 잠자리 잡기 경쟁이 매일같이 벌어지곤 했던 무대였지요. 형광색의 곤충채집통을 손에 들고 긴 잠자리채를 다른 한 손에 쥔 아이들은 마치 창과 방패를 든 로마 검투사의 당당함을 스스로 느끼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같이 잡으러 가자고 하시더군요. '굳이 아빠가 같이 안 나가도 되는데...', 반신반의했지만 이내 아빠의 손을 잡고 잔디밭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자랑스럽게도 그날 본 아빠는 슈퍼히어로였습니다. 현란한 잠자리채 돌리기 신공을 보여주시며 고추잠자리. 된장잠자리, 말잠자리, 밀잠자리 등을 쉼 없이 잡으셨고, 심지어 한 번의 스윙으로 두 마리를 낚아채는 '일타 이령(一打二蛉)'의 신기도 선보이셨습니다. 덕분에 채집통 안은 잠자리로 금세 가득 찼습니다.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통계, 정확히 52마리였습니다. 저는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눈, 아빠 찬스를 쓰는 비겁한 놈이라는 경멸에 찬 시선을 반반씩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한 마리씩 날개를 잡아 하늘에 풀어주었습니다. 커서 아빠가 되면 내 아들에게 꼭 잠자리를 잡아주고 말리라는 다짐을 했던 것도 이날이었습니다. 

 역시 못난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이젠 잠자리 잡기가 그리 수월치 않습니다. 요즘 잠자리들은 나뭇가지에 얌전히 매달려 있는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그저 허공을 날아다니기만 할 뿐이죠. 예전엔 한 그루의 키 작은 나무에도 마치 사람들이 아파트 각 층에 입주해 있듯 열댓 마리 이상의 잠자리가 편안하게 앉아있었는데요, 확연히 달라진 자연의 모습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게으르게 한 곳에 앉아있다가 무수히 많은 채집을 당한 아픈 기억이 잠자리의 DNA에 변화를 일으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정을 해 보게 됩니다. 그렇게 날개를 쭉 펴고 앉아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본능이 변해가는 것일지도요.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산과 들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그 자연선택의 과정을 저에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죠. 아버지가 다시 젊어지신다 해도 그때처럼 잡긴 쉽지 않으실 듯합니다. 아들과 같이 잠자리 잡던 이날의 추억을, 누워계신 아버지에게 들려드릴 걸 그랬습니다. 깜빡했을 뿐이지만 이젠 다시 들려드릴 방법이 없겠습니다.  


 이젠 어머니가 걱정입니다. 운동을 하시는 이유도 자식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고, 아버지가 웬만큼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연락을 참았던 이유도 당연히 당신들을 염려할까 봐서입니다. 지금은 서귀포로 오셨지만 40년이 돼 벽이 갈라지던 부산의 아파트에서 살며, 돈 천 원을 아껴가며 택시는 일절 타지 않았던 이유 역시 자식 때문입니다. 워낙 정신력이 강하신 분이라 한 치의 어긋남이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말이죠. 장례식장에 도착해 처음 본 어머니는 슬프게 울고 계셨습니다. 냉정한 듯했던 어머니에게도 아버지는, 설레는 사랑을 하고 평생을 약속하며 아들을 낳고 함께 살아간 세상 제일의 인연입니다. 어찌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리가요.


 

 

 부산의 요양병원으로 가시기 전 아버지가 사셨던 애월 하귀리의 집입니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경치 감상엔 좋은 위치였으나 소금기 때문에 새로 달아놓은 대문의 손잡이가 몇 개월 사이 녹이 슬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아버지의 건강만 생각한다면 짠 바람과 습기가 덜한 곳으로 자리를 잡아드려야 했었나 하는 후회도 밀려옵니다. 그래도 바로 앞 방파제에 의자를 내놓고 제주의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썩 멋진 취미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못난 자식의 죄책감을 애써 덜어냅니다.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다시 가 본 가문동은 그리움의 공간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공간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세상을 확실히 탐구해보겠다는 건방짐으로, 삶이 왜 존재하는지 알아보겠다는 무모함으로, '죽음'에 대해 현인들이 써 내려간 글들을 분석합니다. 철학자들의 끝을 알 수 없는 심오한 깊이와 과학자들의 경이로운 통찰에 감탄하며 어떻게든 세상과 나의 존재 이유를 끄집어 내려 나름 애를 써 봅니다. 그리고 진지한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라며 내 생각에 삶과 죽음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떠들어봅니다. 그러나 정말 확실한 것은, 죽음에 관한 어떤 담담한 철학과 신념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순간엔 절대 적용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섭리가 그런 것이니 죽음을 크게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말, 과연 한없이 익숙한 존재가 부재(不在)가 되어버리는 과정을 직접 겪고 있는 사람에게 들릴 턱이 있을까요. 지극한 비통의 순간까지 차분히 받아들이며 죽음의 개념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위인이라 불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를 모신 곳은 6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의 3층을 연신 누르게 됩니다. 3층에서 내려야 하는 직장인의 습관이 너무도 지독히 밴 탓입니다. 이런 순간에도 몸은 일상의 모드 그대로였습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얼굴빛일까요? 몇몇 조문객들이 절 보며 얼굴이 검게 변했다고 하십니다. 얼마 전 후배의 모친상에 조문을 가서 제가 상주(喪主)를 보고 한 말 그대로였습니다. 딱히 땡볕에서 노동을 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 때문에 고생한 것도 없는데, 실제 거울을 바라보니 어둡게 변하긴 했습니다. 그렇다면 몸의 이상보다는 심장의 충격에서 비롯된 색소의 변화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로 신기한 일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입관은 영원히 기억해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걱정이 되었던 시간이었죠. 혼이 빠져나간 아버지의 몸을 쳐다볼 수는 있을까. 두려운 나머지 고개를 돌리진 않을까. 자식답지 못한 심약한 걱정에 망치를 내리치듯 각성을 시켜준 것은 바로 아들 녀석이었습니다. 입관식도 하기 전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안치실에 불쑥 들어갔다 오더니, 입관식에서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할아버지의 온몸을 안마하듯 한참 주무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에서 붕 떠있는 느낌 한편으로, 잡생각 없는 사랑의 실천을 자식에게서 배우고 있는 못난 아빠가 되어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먼 기억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염려와 섬김은 부모님들만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손자인 저는 그런 건 걱정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손자란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선물이지요. 그토록 보고 싶어 하시니 간혹 얼굴만 비추면 제 역할 끝난 것이고, 용돈 받고 맛있는 냉면 얻어먹으면 그만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철이 덜 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자이자 엄마 아빠의 아들은 일방적으로 사랑받고 도움받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한없는 사랑의 빚은 어른이 되어서 갚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어른이 된 지 한참 더 지난 지금도 도움을 주기보다는 받는게 익숙합니다. 어머니에게 한없는 보살핌을 여전히 받고 있고, 심지어 아빠보다 거침없는 자식들의 사랑 표현에 묻어가면서 괜히 근엄한 척 만용을 부리곤 합니다. 한없는 부족함과 못남을 부모가, 가족이, 벗들이 채워주며 저를 살아가게 합니다.


 상을 치르고 나서 길을 걸을 때도, 커피숍에 앉아 있을 때도 티를 내고 있습니다.

 '절 보세요, 전 아버지를 막 잃은 사람입니다. 불쌍한 녀석이니 위로의 눈길을 보내주시되 대신 귀찮게는 하지 말아 주세요' 

 당분간 이기적인 무언의 부탁을 곳곳에 해야 할 듯합니다.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속에 있는 못난 것들을 하나하나 고쳐가는 수밖에요.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돼서야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아버지의 반응이 없을 테니 덜 민망하겠다 싶어서 할 수 있었겠지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그 어렵지 않은 한마디 내뱉은 자식을 이해해주시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세상에 계시건 그렇지 않건 내 아버지는 영원히 내 아버지입니다. 어떤 후회도 소용없다는 걸 깨닫게 되니 정작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뿐이더군요. 글로서 그런 기억들을 조금이나마 새길 수 있다는 것이 그리움의 배출구가 되어 줄 것 같아 소박한 위안으로 간직하려 합니다.


 이젠 나가야겠습니다. 그새 하늘이 어둑해졌습니다. 불효자라도 눈꺼풀은 무거워지는군요. 한동안은 전날 과음했느냐는 오해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아버지.

착하디 착했던 아버지.

어차피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추억이라도 많이 하겠습니다.

상을 치르고 제를 지낼 때보다 집으로 돌아온 뒤가 천 배, 만 배 더 그립습니다. 

울음이 없어도 너무 없는 제가 자꾸만 훌쩍거립니다.

불효한 것 분명 후회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후회 중입니다.


그러나

아들 지켜보면서 잘 지내고 계세요. 그것만으로도 큰 실망 안 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머니도 잘 지켜주시고요.

자주 찾아가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멀쩡히 살아가겠지요. 그래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멀쩡히 살아가는 아들 모습 보면 그것도 흐뭇해하실 것 같거든요.

사랑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글 쓰고 돌아가는 길에 가문동에 들러야겠습니다.

이제 쉬세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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