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출근하는 일이 5,6년이 되어 가니 생체시계라도 정착을 한 듯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5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고역이긴 합니다. 그 생체시계란 것도 잠에서 일단 깨고 난 뒤에나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 마냥 밤 9시 뉴스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눈이 감기니 새나라의 어린이가 따로 없습니다. 새벽 근무조의 가장 큰 혜택은 역시 퇴근 이후 알차게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건데요, 운동을 조금씩 한다고 하지만 천성적으로 게으른 성격 때문에 뚜렷하게 해 놓은 무언가가 없는 건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퇴근 후 바로 차를 몰고 섬 곳곳을 누빌 수 있다는 것이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부담감에 따른 크나큰 보상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오랜만에 번영로를 타고 남동쪽으로 향해 봅니다. 처음 제주에 올 때는 그리 가깝게 여겨지던 곳들이 사는 게 익숙해진 뒤로는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요. 특히 제주시의 서부권에서 출발한다면 성산과 표선, 남원 쪽은 마음 단단히 먹고 가야 할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주 삶에 적응한다는 게 이런 후유증을 낳기도 합니다. 이같은 제주도민만의 거리 감각을 눈치채지 못해 생기는 에피소드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한 번은 강원도에 사는 선배가 서귀포 시내 노래방에 와 있다며 전화를 하셨습니다. 저는 신제주 한복판에 살았었고요. 갑자기 제주에 오게 되어 연락이 늦었는데 그래도 얼굴 한번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당장 오라는 겁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만 밤 9시에, 그것도 10분 안에 달려오라는 엄명을 받고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역시 제주를 모르시는군..."
미소를 지으며 군소리 않고 달려갔습니다. 감격적인 상봉 뒤 꾸중을 들었죠, 어떻게 50분이 지나서 올 수 있냐고. 그 뒤는 예상하시는 대로입니다.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제주와 서귀포는 멉니다,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뭐 어떻습니까, 멀게라도 느껴져야 섬이 마음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커지지 않을까요.
삼달분교를 개조해 지은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입구와 전시관 건물
한참만에 왔지만 제주에 있는 전시관 중에는 가장 많이 찾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늘 그려지는 곳입니다. 성산읍 삼달리에 위치한 김영갑갤러리인데요, 이제는 너무도 많은 분들이 찾는 제주의 대표 전시 공간으로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름을 주인공으로 한 제주의 자연이 파노라마 작품들 속에 꿈처럼 담겨 있습니다. 제대로 된 명칭은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이죠. 한라산의 옛 이름이 '두모악'인데, 갤러리 <한라산> 보다는 갤러리 <두모악>이 몇 배 감성을 더하는 듯합니다.
매일 바라보는 한라산의 옛 이름이라 제주의 명칭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두모악' 혹은 '두모'는, 사실 너무도 인기 있는 우리나라의 지명이라고 합니다. '두모', '두무','두만', '두문','동막' 같이 ㄷ과 ㅁ 이 연이어진 비숫한 지명의 마을만 220여 개가 된다고 하는데요, 하긴 잠시 돌아보면 두문동 계곡, 동막골, 두만강처럼 친근한 지명들이 입속에 맴돌곤 합니다. 이렇게 ㄷ과 ㅁ 이 이어진 이름의 땅은 물이 흐르고 따뜻하며 둥그스름한 산이나 언덕으로 둘러싸인 곳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리, 지명 학자들의 연구가 있습니다.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얘기지요. 때로는 자기 마을을 자랑할 심산으로 지형과는 어울리지 않게 '두모', '두무'라고 이름을 바꿔버린 곳도 있다고 합니다만 전국 대부분의 '동막골'과 '두문동'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포근한 마을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두문동에서는 '두문불출'하고 싶어지는 걸까요? 다만 '두메'산골의 경우는 어원은 같을지 모르나 '산(山)'을 뜻하는 '메(뫼)'가 더 강조되어 '외딴'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고요, '두만강'의 사례는 비록 그런 지형을 가진 '마을'이 아닌 '강'의 이름이지만 '부드럽게 솟아있는 산들을' 굽이쳐 흐르는 물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이상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이런 지명의 유래를 바탕으로, 그 자체로 부드러움의 상징인 제주섬의 능선을 멀리서 바라보면 '두모악'이란 명칭이 한라산만큼 어울리는 곳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주 서쪽의 한적한 마을인 한경면 '두모리'가 있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사진에 끝 모를 깊이의 감정을 다룬 사진작가가 간절하게 제주의 속살을 담아냅니다. 사진에 대한 안목은 가지지 못했지만 밤새 제주 바람의 혹독함을 몸으로 견뎌 내면서 미칠 듯 뛰는 심장으로, 혹은 비장미 어린 슬픔으로 찰나를 포착했다는 그 감정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천형(天刑)으로 스러져 가는 육체를 다잡아 제주의 땅과 하나가 된 그분의 사무친 기운이 서늘하게 다가옵니다. 도대체 두모악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저 멋진 풍경이 아닌,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오름의 존재는 어찌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제주 오름의 경치는 왜 경치에서 그치지 않고 폐부까지 찌르는 건지 알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문학평론가와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20세기 초반이었던 그의 시대에 새로운 예술의 장르로 등장한 사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면서도 수없이 복제가 가능한 사진의 특성상 원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사진들은 그 맥락 자체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사진의 '표제'가 갖는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표제 혹은 제목의 설명이 없으면 모든 사진의 의미는 모호해진다는 주장이었죠.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상상해 봅니다. 김영갑 갤러리의 오름 사진을 바라보는 발터 벤야민을요. 충분한 감상 시간을 주고 난 뒤 그에게 제목의 필요성을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요?
가타부타 확실한 답변보다는 지긋이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난 사진에 제목 붙이는 것을 거부한다. 사진마다 제목을 붙임으로써 감상자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찬성하겠습니다, 적어도 그의 사진작품이라면.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을 넘어서 저마다 다른 감상자의 감정을 글이라는 도구로는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야죠, 김영갑 선생님. 그게 맞습니다.
2001년 폐교된 삼달분교를 갤러리로 단장하기 위한 공사를 하던 시기에 몸에 이상을 느꼈다는 김영갑 작가, 그로부터 이삼 년 후 그분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미 몸의 일부가 눈에 띄게 불편해졌을 때였지만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그간의 작품들에 대한 차분한 설명을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들어가 함께 얘기를 나누던 작업실 겸 서재가 지금은 유리로 가로막혀, 안을 들여다볼 수는 있어도 작업의 흔적을 가까이서 느낄 수는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제주가 좋아 제주로 온 게 아니라 제주에 없으면 살지 못할 것 같아 제주로 왔다는 작가의 모습을 회상하며 서재 안을 한참 들여다봅니다.
김영갑 작가의 서재 겸 작업실
운동신경들이 차례로 죽어가며 결국엔 호흡을 담당하는 근육까지 그 기능을 잃어버려 사망에 이른다는 루게릭병, 셔터를 다루는 세밀한 손의 근육과 최적의 스폿을 향하는 다리의 근육 등 전신의 미세한 근육을 써야만 하는 처지였기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작가의 절망감은 얼마나 깊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대부분의 환자가 발병 뒤 2에서 5년 내에 숨을 거둔다고 하는 이 무서운 병마를 선고받고 맞은 낯선 시간은 얼마나 황망했을지요, 짐작이 쉽지 않은 절망이었을 겁니다. 필연적인 방황 후 제주를 포착해 낼 황금과도 같은 시간의 아까움을 실감하며 한 컷이라도 더 담아내려 일어섰다는 그분의 의지 덕에 우리는 하나의 환상이라도 더 감상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리게 된 것이 아닐까요.
의지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그야말로 한창이던 21살에 루게릭병을 판정받았다고 합니다. 남은 생이 2년에 불과하다는 사형선고를 받고 절망에 빠졌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76살까지 살았으니 극히 드문 사례라 할 수 있겠지요. 이 삶의 연장은 그 자신뿐 아니라 우주의 이치를 알고 싶어 하는 세상 사람 모두에게도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근육이 힘을 잃어도 번쩍이는 이성이 그 신체 안에 있는 한 이루지 못할 것은 없었고, 음성합성기를 거쳐 나온 그의 소리는 성악가의 그것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다만 다른 방향에서 자연의 근본을 더 알려줄 수 있었던 김영갑 작가에게는 왜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뒤늦은 투정을 부리고 싶은 이유입니다.
김영갑 작가가 사랑한 오름은 과연 무슨 힘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독립된 산 또는 봉우리를 이르는 제주방언이며 한라산 자락에 자리하는 기생화산', '분화구를 갖고 있는 화산쇄설물'이라는 정의로만은 내면을 알 길이 없습니다. 제주 설화의 걸 크러쉬 슈퍼스타인 설문대할망이 흙을 퍼 날라 한라산을 만들었는데, 흙을 나르는 과정에서 신발에 묻은 흙이 군데군데 떨어져 쌓여 오름이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한라산부터 시작해 낮은 오름들까지, 설문대 할망이 없었다면 만들어졌을 제주의 지형도 없을 듯합니다.
360여 개에 달하는 제주의 오름은 글자 그대로 '~~ 오름'으로만 불리지는 않습니다. 제주여행을 하면서 들어보셨을 여러 명칭의 산이나 봉우리도 모두 오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러니 한라산만 빼놓고 볼록 솟아있는 제주섬의 모든 것들은 오름인 것입니다. 먼저 산방산과 같이 '산(山)'이라고 이름 붙여진 오름에는 고근산, 단산 등이 있습니다. 주로 과거 현청(縣廳)이 있었던 고을 내에 속해, 한자 작명을 선호한 현의 관리들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악(岳)'도 있습니다. 설악산처럼 산세가 험해 고도에 상관없이 오르기 힘든 오름들에 붙여졌다고 하고요, 어승생악, 성판악 등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무래도 한라산의 중심과 가까운 곳의 오름들이다 보니 해안가의 야트막한 오름보다는 험할 수밖에 없겠지요. 세 번째는 '뫼(메)'가 있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산을 뜻하는 고유어입니다. 노꼬메, 왕이메 바리메 등이 익숙한 이름이고요, 여기에 '오름'이 중첩돼 '노꼬메 오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통신 역할을 했던 봉수대가 있었던 오름에는 '봉(峰)'의 직책이 수여됐습니다. 원당봉과 지미봉 등의 예가 있겠습니다.
제주의 오름은 제주인들이 이상향으로 그려왔던 꿈의 공간만은 아니었습니다. 오름을 기둥 삼아 많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존재했고, 마을 사람이 생을 마치면 해당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오름의 능선 위에 묻은 뒤 봉분을 쌓고 산담을 쌓았습니다. 오름은 삶이자 죽음이었고 현실이자 이상 세계였습니다. 결코 잊을 수도, 잊혀서도 안 되는 제주 4.3의 숱한 비극의 무대가 된 곳 역시 오름이었습니다. 중산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살해 위협을 받은 제주인들이 마지막으로 몸을 숨길 곳도 오름이었고, 운 없이 발각돼 무참히 살해된 곳도 오름이었던 것입니다. 오름은 곧 제주의 역사이자 제주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김영갑 작가가 바라본 진정한 오름도 환상적인 외양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우뚝 서서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약하디 약한 인간의 내면을 미친 듯이 흔들어 놓는, 거부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새벽녘이나 별이 뜰 무렵 작가가 포착한 순간적인 오름의 인상은 현실이자 비현실입니다. 피사체로서의 자연물임을 스스로 거부하고, 보는 이의 심장에 깊게 꽂혀버리는 추상화가 되어 버립니다.
희한하지요, 오름은 가을에 더 그리워집니다. 좋은 사람들과 오름에 올랐을 때가 주로 가을이었던 우연도 작용했겠지만 제주의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사이로 보이는 오름의 능선이 다른 계절의 인상과는 분명히 달라서도 그렇습니다. 각각의 경치를 하나의 감정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도, 제주의 오름은 지나치게 차분할 정도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경탄과 환호보다는 애잔함과 묵직한 슬픔에 더 가깝습니다. 오롯이 그 감정들을 끌어안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오름을 직접 올라보시거나 김영갑 작가의 사진을 넋 놓고 바라보면 될 일이겠습니다.
봄이 깊어갑니다. 제주시보다 남쪽인 이곳의 벚나무들은 꽃을 훨씬 많이 떨군 모습입니다. 또 1년을 기다려야겠군요. 뜨겁고 찬란할 제주의 여름을 지나고 올 가을에는 좀 더 부지런해져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