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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04. 2020
05 그듸 있어줍서-제주시 민속오일시장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오랜만에 오일시장에 왔습니다. 시골에 집을 짓고 살아보자니 농기구와 채소 모종, 꽃에서 강아지 목줄에 이르기까지 마련할 것들이 워낙 많아서 한때는 동네 편의점에 가는 것 마냥 장을 찾을 때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공휴일에 장날이 겹치면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시장 내 소문난 맛집에서 막걸리를 한 잔 걸치러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으니 제주시 민속오일장의 섹션별 가이드 정도는 이제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많은 제주의 장터 중 대표 격인 제주시 오일장인지라 관광객들이 태반입니다. 요즘은 오일장이나 야시장 등이 국내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필수코스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지방의 시장에서는 보기 힘든 제주의 특산물이 시장 내에 널려 있으니 외지인들은 한번 들어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둘러보게 되기 마련입니다. 장날을 기다리는 지역주민과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주차공간을 찾는 것이 여간 수고스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얼마 전 큰 덩치의 공영주차장 건물이 새로 들어선 후엔 악명 높던 주차난이 어느 정도는 해소가 된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해도 2와 7로 끝나는 날 오일시장 입구 부근의 일주도로는 그야말로 퇴근시간의 서울 한복판과 마찬가지입니다. 장날 붐비지 않는 것이 이상한 도로이기는 하지만, 과거 10여 년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차량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양 손 가득히 들고 있는 짐들을 생각하니 버스를 타기엔 정류장까지의 걸음이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차를 가지고 가자니 꽉 막힐 도로도 걱정이지만 장터 부근 주차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총성 없는 순발력 경쟁이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제주시 오일장을 가신다면 아예 아침 일찍 가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느지막한 오후도 진입과 주차는 쉬울 수 있습니다만 파장의 분위기는 피할 수 없으니까요.
하긴 장날에 원래부터 붐볐던 오일장 부근 도로는 이해라도 됩니다. 심지어 출, 퇴근시간 정체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제주도의 교통 상황은 제주 이주의 붐, 그리고 부동산 열풍과 더불어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67만의 인구에 60만 대가 넘는 차량이 등록돼 있으니... 계산해 보십시오. 1인당 차량 보유 대수가 0.9대에 육박합니다. 전국 평균이 0.4대에 정도에 그친다는 통계를 보면 상대적으로 얼마나 많은 차들이 제주의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인당 거의 한 대의 차를 보유할 만큼 제주도민의 삶이 넉넉해서일까요? 유일한 대중교통이 버스밖에 없는 환경에서 낡은 중고차라도 갖고 있지 않으면 이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제주로 이주했던 2002년에 도내 차량이 채 20만 대도 안되었으니 인구의 증가 폭보다 월등한, 그야말로 미친 차량 증가 추세였던 것입니다. 이러다 상식과도 같았던 삼다도의 요소인 돌, 바람, 여자 중 '여자'를 '자동차'로 대체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의 인구조사에서 남자의 인구가 여자보다 1% 많은 것으로 나왔으니 당위성도 있습니다. 돌과 바람은 그대로인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요.
전국의 오일장이 서민들의 쇼핑몰로 자리 잡은 건 17세기 말이라고 합니다. 그 전에도 장은 열렸으나 간격이 더 멀었다고 하고요, 보부상들의 증가와 물물교환 필요성의 증가로 점차 닷새 간격의 장이 보편화되었다고 합니다. 거래되는 품목들이 주로 농작물이다 보니 기상(氣象)과 관련된 이유도 있습니다. 1년을 24절기로 구분한 것도 농업의 편의를 위해서일 텐데, 절기를 보름씩으로 나누어진 기(氣)로 재배치하고, 기를 다시 3 등분한 닷새를 1후(候)로 하는 세분화된 시간의 길이가 만들어집니다. 조상들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날씨가 평균 1후 동안 비슷한 기후를 보이고, 하나의 후가 끝나고 다음 후로 넘어가면 다른 패턴의 날씨로 바뀐다고 하는데요, 그에 따라 농작물의 재배와 추수에도 영향을 받았을 테니 그래서 닷새 리듬에 맞춰 장이 서게 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한편 나흘 일하고 닷새째 쉬던 우리 농민들의 평소 생활패턴에 맞춰 오일장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보다 단순하고 직접적인 의견이 있기도 합니다. 과거 제주인들의 생활양식이 육지부 전통 농경사회의 그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겠지만 미깡밭(감귤밭)과 바당밭(바다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수확한 것들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으니, 제주의 장터 운영도 나라 표준인 닷새 간격으로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겠습니다.
제주시 오일시장 내 할망장터
입구를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제주의 할망들이 우영팟(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들을 직접 판매하는 코너인 '할망장터'가 나옵니다. 짙은 초록색의 싱싱한 채소를 사며 할망들 연세를 여쭤보시지요. 어느 분에게 물어보셔도 짐작보다 고령이신 나이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
파전이나 부쳐먹을까 할 요량으로 사진 속 할머니께 쪽파를 샀습니다. 상추와 깻잎, 부추는 매년 모종을 사서 심어놓고 실컷 따서 먹는데 쪽파가 없었군요. 다음에 다시 올 때는 모종 파는 곳을 집중적으로 돌아봐야겠습니다.
오일장이 그 매력을 최고로 뽐낼 때는 역시 봄입니다. 심자마자 자라는 듯한 생명력의 채소 모종과 긴 겨울 - 제주의 겨울은 그 온도에 비해 너무도 스산하고 춥습니다 - 을 뚫고 자란 형형색색의 꽃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봄 오일장 덕후들을 꿀벌에게 그러하듯 유혹합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순간은 어찌 보면 온도의 변화보다는 하늘색의 변신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암울한 회색은 사라지고 티 없이 푸른 하늘에서 투명한 햇빛이 내리쬐면 그때부터가 봄인 것이죠. 오일장에서 마주치는 봄꽃들은 아무리 무질서하게 모여있어도 새로운 빛을 받아 조화롭게 아름다울 뿐입니다.
총천연색으로 장터를 수놓는 꽃들은 왜 이리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까요. 황홀하게도 아니며 슬프게도 아닌 '싱숭생숭'해서 오묘한 것입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갈팡질팡한 상태라는 거죠.
사람이 볼 수 있는 빨주노초파남보의 가시광선 스펙트럼 중 파장이 가장 긴 빨강부터 주황과 노랑까지는 교감신경을 자극해 사람을 흥분시킨다고 합니다. 긴 파장이 심장과 신경계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굳이 원리를 파고들지 않아도 왠지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대로 파랑, 남색, 보라로 점점 짧아지는 파장의 색들은 심장박동 수와 맥박을 낮추는 효과가 있어 가라앉고 안정된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데요. 색 마케팅의 원리 중 하나지만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래서인 듯합니다. 그저 진하고 강렬한 아름다움만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우아하고 고상한 매력만 느껴지는 것도 아닌, 복합적이고 싱숭생숭한 봄의 마력이 오일장 꽃들의 마구잡이 컬레버레이션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군요.
봄이 되면 더욱 바빠지는 농기구점 안의 대장간
오일장의 생동감은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량으로 생산한 공산품과 함께 가내수공업으로 직접 만든 것들, 손수 키우거나 재배한 것들이 당당하게 각각의 코너를 채우는 동시에, 대형마트에선 경험하기 어려운 상인들의 자부심 섞인 호객이 있습니다. 과일이나 묘목, 심지어 호떡 하나라도 오일장의 베테랑 상인들은 자신이 팔고 있는 것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껍질 까기 수월한 한라봉이 어떤 놈인지, 꽃은 언제쯤 피고 열매는 언제 처음 달릴 나무인지, 이 호떡이 길거리에서 파는 호떡과 뭐가 다른지, 답 못할 질문이란 없습니다. 자신이 만들고 가꿔온 자부심으로 떵떵거리며 호객할 수 있는 건강함이 모여 오일장 전체의 활력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요.
인류가 수렵, 채집 생활을 끝내고 정착을 하게 되면서 자기의 부족 내에 풍족한 것과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농산물에 대해선 안목도 생기게 되었겠지요. 자연히 상품과 하품의 등급이 매겨지고, 다른 부족의 생선과 교환할 때의 기준도 이에 따라 정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부족을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는 초기 사회에서의 첫 번째 직업은 오늘날의 오일장 상인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물론 화폐 대신 현물이 오고 갔다는 것이 차이였겠지요.
인류문화의 초기 모든 직업은, 이처럼 상인인 동시에 그보다 앞서 호모 사피엔스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을 직접 생산하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음식부터 각종 도구와 연장, 무기는 어느 부족에서나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을 테니까요. 인류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회의 인프라는 넘치게 되었고, 따라서 생계와 직접 관계없는 직업들이 생겨나 우후죽순 늘어나게 됩니다. 다른 부족과의 경쟁에서나 자연재해로부터 이겨내기 위한 소망으로 제사장과 점성술사가 등장했습니다. 신을 갈구하게 된 인간은 성직자란 직업을 창조하면서 먹을거리를 생산해 내는 직업군과는 비교하지 못할 고차원의 위치에 가져다 놓으며 신의 대리자를 넘어 신 자체처럼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주위에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부모님, 어촌에서 고기잡이를 하시는 큰아버지, 읍내 대장간에서 농기구를 벼려내는 친구의 먼 친척 정도가 있을 듯합니다. 아,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땀 흘리고 있는 노동자들, 사람의 손에서 기계로 공정이 바뀌긴 했지만 의류회사의 제조 부문 직원들 역시 우리의 의식주에 없어서는 안 될, 지극히 고마운 분들이겠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한 모금의 물이 부족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아이들이 널려 있어도 또 다른 세계에선 먹고살기 위한 직업이란 개념이 희미합니다.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는 그 누군가가 알아서 입맛과 취향에 맞게 만들어 놓는 것이고, 나는 그저 골라서 먹고 입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나는 사람들의 직접적 생존에 필요한 직업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큰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비상한 아이디어로 이 복잡한 세상의 트렌드를 이끌어 갑니다. 소득은 알아서 눈덩이처럼 커져왔을 뿐이고, 축적한 부로 얼마든지 호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첨단 직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 시대라서 그런지요. 실로 다양한 직업들이 새로 생기고 '~~ 코디네이터'라는, 영어가 접미사로 붙어 있는 형태의 신 직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벌써 지겨워진 용어인 '4차 산업혁명'은 어떻습니까. 1차, 2차, 3차 때도 그랬듯 전문가들은 이번에도 '유망 직종'은 이것이다 하고 전망을 하며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언제 바뀔지 모르는 분석이고 예측일 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시대가 되면서 '실물경제'의 '실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과연 물적 생산이라는 기초가 없이도 21세기 국가의 경쟁력은 담보가 되는 것일까요. 찬, 반을 떠나 유전공학으로 새로운 인류의 먹을거리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고 해도, 주요 '생산국가'가 되어야 여전히 칼자루를 쥐는 법일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일침이 떠오릅니다. 신대륙 개척으로 황금시대를 만끽했던 무적함대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약탈한 금과 은으로 자국의 곳간을 채워 넣습니다. 계좌에 현금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들어있는데 무엇을 땀 흘려 만들거나 기를 필요가 있을 리 없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금을 주고 다른 나라에서 사 오면 될 뿐이죠. 풍족함으로 배가 불러오면서 스페인의 '산업'자본주의는 '금융'자본주의로 철저하게 넘어갑니다. 1차, 2차 산업의 경쟁력은 힘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 돈으로, 금리로 모든 것을 해결했던 경제원칙은 이자율이 급강하하며 회복 불가의 상태로 추락합니다. 그동안 생산하는 법을 잊었기에 산업의 부흥으로 경제를 이끌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여겨졌던 이런 사이클은 현재의 미국과 일본 등의 국가에서도 그 조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살 길이라는 거창한 이슈가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에 애착이 더해가는 요즘입니다. 스마트폰 화면 위 능숙한 터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 당연해질수록, 마음은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곤 합니다. 그곳은 모를 심는 농부와 새벽 바다를 누비는 선단의 배열, 인간들이 뱉어낸 오물을 대속(代贖)하듯 정화하는 환경미화원들의 뒷모습, 누군가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위태롭게 비계에 서 있는 노동자들의 무리, 그리고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캐내 누구보다도 인심을 더해 손님의 손에 쥐어주시는 오일장 할머니들의 공간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