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의 어떤 것들
몇 년 전이었습니다. 거실에서 손톱을 깎고 있었습니다. 환한 낮이었죠,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손톱의 불그스름한 부분과 깎아내야 할 흰 부분의 경계가 흐릿해 구분이 쉽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손톱을 바꿔가며 쳐다보아도 또렷하게 보이질 않자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쨍하고 뜬 해가 거실의 안쪽까지 눈부시게 빛을 쏘는 바람에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몸이 허할 때 손톱의 색이 불투명해진다고 하니 혹시 컨디션이 나빠져 손톱의 색이 바랬던 것인지 하고 말이죠. 며칠 동안 일상생활을 하다 보니 흐려 보이는 것은 손톱만이 아니었습니다.
예, 노안이 온 것이었습니다.
태어나 처음 겪어본 터라 당황은 했지만 그렇게 억울한 건 아니었습니다. 노안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오는 대략적인 나이를 알아보니 늦게 온 건 분명 아니었습니다만 지나치게 빨리 찾아온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이젠 친구들과 술 한잔 하러 가서 메뉴를 고를 때면 글자를 또렷이 읽는 녀석에게 샘이 나고요, 눈 찡그리고 살피기 싫어 메뉴 선택권을 쿨하게 넘겨주기도 합니다. 육신에 치닫는 달갑잖은 변화들이 잦아지면서 음식을 주문할 때조차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더군요. 오랜 시간 혹사한 눈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술집은 그렇다 치더라도 글을 쓰거나 책을 볼 때 따로 맞춘 안경을 써야만 하는 것이 서글프기는 합니다. 더구나 치료가 잘 끝나 곧 깨끗하게 보일 거라고 해도 1년 전에 상처가 난 망막의 표면 때문에 왼쪽 눈의 시야가 아직은 뿌연 채 살아가고 있으니 저의 50대는 시력의 변화와 함께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눈에는 초록이라고 합니다. 이제 와 몽골인처럼 될 수는 없을지라도 숲과 나무를 더 많이 바라보면 적어도 눈의 피로는 덜어지겠지요. 제주의 집도 좋은 환경이지만 남도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더없는 기회니 만큼 나무의 도시 담양에서 짙푸른 초록을 마음껏 느끼고 가야겠습니다.
먼저 담양의 자랑 죽녹원으로 달려갑니다. 주차를 하고 나니 허기가 지더군요, '죽녹원도 식후경'입니다. 관방천 건너편에 물길을 따라 일렬로 조성된 국수거리로 가서 그 유명하다는 멸치국수를 주문합니다. 다행히 간판에 크게 메뉴가 쓰여 있어 눈은 찡그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관방천변 담양 국수거리와 멸치국수
정오가 되기 40분쯤은 남아서 그랬는지 국수거리에 손님은 많지 않았습니다.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분위기 있는 혼밥을 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입니다. 가게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솔직한 평을 하자면 그냥 그랬습니다. 대신 양은 푸짐하더군요, 제주에서 보기 힘든 흐르는 샛강을 보며 여유 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죽녹원의 명성이 자자한 것이 달가운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대숲의 위용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일 뿐이죠. 지금 죽녹원이 있는 성인산은 예전 죽세공품 재료의 공급처일 뿐이었습니다. 대나무는 많았으나 관리가 되지 않은 평범한 야산이었다는데요, 2003년 담양군에서 작정하고 국내 최고의 대나무 정원으로 조성했다고 합니다. 전체 면적이 31만 제곱미터라고 하니 아직은 더 익숙한 평수로 환산하면 9만 평에 가까운 광대한 넓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나무라는 식물이 위로 자라는 속도도 그렇지만 주변으로 증식하는 능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숲 면적을 넓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깔끔하게 구획을 나눠 공원으로 꾸미는 일은 보통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었을 거라 상상을 해 봅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완만한 오르막길이 보입니다. 평지에 조성한 곳이 아닌 산을 정리해 만든 공원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제대로 힐링해 보자는 다짐을 하고 천천히 오른쪽의 순로를 따라 죽녹원의 내부로 한걸음 한걸음 들어갑니다. 공원의 초입은 깔끔히 단장된 모습입니다. 좁지 않은 보행로와 양쪽의 높다란 대나무들이 확실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대나무 숲을 산책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광합성이 활발한 초여름에서 가을 사이라고 하고요, 대나무의 이로운 성분이 습기와 함께 배출되는 비율이 높은 오전 10시에서 12시에 죽림욕을 하는 것이 효과가 크다고 합니다. 국수를 먹고 12시 10분 전쯤 입장을 했으니 이 정도면 계절과 시간을 꽤 잘 맞춰 대숲을 찾은 셈이겠습니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만나니 재치 있는 시설물이 등장합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이 앞에서 상당히 진지한 자세로 눈 앞의 문구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다소 통통한 체형의 소년이었지만 벌써부터 미래의 건강을 걱정하는 참이었을까요.
아직은 그리 걱정할 필요까진 없단다
정작 엄마는 어서 오라고 길을 재촉하는데 아이는 꽤 심각합니다. 옆으로 서서 대나무 기둥을 통과하면 20대 이상 각 연령대의 표준 뱃살 이하라는 뜻이니, 성인들은 그야말로 자존심이 걸린 '통과'의례가 될 수 있겠지만
이 소년은 해당되는 입구가 없음에도 몇 군데를 들락날락해 봅니다. 혹시나 시선이 의식돼 부끄러워할까 봐 잠깐 쳐다보다가 길을 앞질러 버렸습니다.
"지금 있는 살은 나중에 키로 갈 테니 너무 걱정은 말고, 심하게 살찐 것 같지도 않아. 그래도 걱정되면 인스턴트식품은 되도록 안 먹는 게 좋겠다 꼬마야."
정작 제 자신부터 인스턴트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면서 공감 못할 말을 마음속으로 건넨 이유는 나중에 이 친구가 어른이 된 후 이곳을 잊지 않고 다시 찾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둥 사이를 날쌔게 통과하며 '그때 뒤에 서있던 어떤 아저씨 때문에 짜증 났다고, 그래서 많은 걸 느껴 살을 빼게 됐다고' 여자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옛 기억을 털어놓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아이들은 역시 통통해야 귀여운 걸 어찌할까요. 일단 먹는 걸로 까탈스럽게 굴진 않아 보이니 얼마나 바람직한 체형인지 모릅니다.
대나무 숲은 여느 산을 덮고 있는 다른 숲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곧게 뻗은 선들의 연속으로 인해 희미해지는 원근감과 단단해 보이지만 바람에 쉽게 흔들리며 내는 서정적인 소리는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떨어지는 댓잎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이며 중력을 희롱하는 듯 나풀거리고,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 같은 신비함이 숲 속을 채우고 있습니다.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감성의 게이지가 높아져 그것이 걱정일 때가 있습니다. 감정의 예민함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면 삶의 단계에 따라 오르내리는 규칙성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불규칙한 감성의 수치는 평범한 직장인과 가장으로서 안정적으로만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분명 방해가 될 때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가끔은 모든 자극에 지금보다 둔감해졌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고 에둘러 감정에 무심해져라 스스로 훈련을 하고도 있는 느낌이지만, 단지 개인적인 기질의 차이라 방법이 없다고 이해해 버리면 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켜켜이 쌓인 자신만의 깊디깊은 감성이 왜 없을까요. 쌓인 낙엽이 발효되듯이 결국엔 스며 나올 수밖에 없는 내 안의 모든 것들, 너무 틀어막아 버리기만 한다면 마음속 가스가 응집되어 폭발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뿐입니다.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누군가 사람들과 사건들과 환경들에 둔감해지도록 뾰족한 감성을 잘라 줄 테니 상처 받지 말고 그렇게 살 것인지 묻는다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아무리 힘든 순간이어도 고민해 내린 답은 늘 하나였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예민해서 아프더라도 뼛속 깊이 삼키며 살겠다고.
찔리듯 아파도 날이 서 있는 감각을 포기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통(無痛)보다는 '통증이 있는 각성'을 택하는 편이 낫겠다고요. 그게 살아있는 존재의 증거가 아닐까요.
어차피 한번 예민해진 감각을 무뎌지게 하긴 힘든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날카로운 감성들이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는 이 대나무 숲에서는, 칼날 같은 감성을 품고 있는 것이 오히려 필요한 덕목이 되리라 믿어봅니다.
종류가 다르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대나무는 대개 뿌리가 옆으로 뻗어가며 개체 수가 빠르게 늘어나는 성질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단일 숲을 조성하기엔 이만한 수종이 없겠으나 개인의 정원이나 마당에서는 수시로 잘라내야만 하는 대표적인 빌런이기도 합니다. 잔디에 심어놓은 관목들을 순식간에 가려버릴 정도로 공간을 잠식하지만 뿌리가 워낙 깊고 단단하게 박힌 상태로 연결돼 있어 제거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모든 대나무가 죽녹원을 가득 메우고 있는 왕대나 맹종죽, 혹은 보기만 해도 절개가 느껴지는 오죽(烏竹)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생태계의 말썽꾸러기 대접을 받는 대나무의 종들은 유독 제주에 흔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조릿대는 말의 먹이가 되기도 하며 인체에도 이로운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체수의 급격한 확대로 식생 단순화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합니다. 지구온난의 가속화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조릿대의 확산을 부채질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한라산에서 조릿대가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다면 주택 마당에는 산죽이나 이대가 골칫거리입니다. 조릿대 못지않은 왕성한 번식력으로 잔디로 뒤덮인 정원을 빠르게 파고 들어옵니다. 뿌리가 땅 속을 가로지르며 이어져 있기 때문에 '뿌리째' 뽑는 건 불가능합니다. 잠식해 들어오는 녀석들이 보이는 대로 잘라내 주는 수밖에요. 대나무를 주인공으로 삼아 조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부지런한 제거작업은 필수라 하겠습니다. 품종과 관계없이 번식의 원칙은 유사할 것임에도 죽녹원에서 자태를 뽐내며 찬사를 받는 대나무가 있다면, 오직 귀찮음의 대상으로 취급받는 일상 공간의 대나무도 있었던 것입니다. 대나무나 사람이나 환경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집 앞마당의 경계에서 폭발적으로 자라는 대나무 수풀입니다. 갈색, 검은색 고양이들이 숨어 있네요.
담양을 다녀온 뒤 회사에서였습니다. 출근을 하면 꼭 오전 6시 정각 무렵인데요, 평일 아침 재방송으로 나가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틀어놓고 일할 준비를 하곤 합니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는지라 몇 번씩 본 회차여도 처음 본 것 마냥 지켜보게 되는데요, 이날은 중국 구이저우(貴州)가 무대였습니다. 구이저우의 명물이 대나무였는지 미처 몰랐습니다만, 빽빽한 대나무 숲에서 현지인 한 분이 귀를 대나무에 바짝 대고 주먹으로 두드리면서 그 울림소리를 듣고 있는 범상치 않은 장면이 나오더군요. PD가 뭘 하고 계시는 거냐 물어보니 대나무 속이 비었는지 아니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확인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속이 비어서 쓰임새가 많은 것이 대나무 아니었던가, 뭘로 채워지다니? 집중해서 봤습니다.
아하! 채워져 있다는 그것은 바로...
네, 술이었습니다. 대나무 속에 한참 전에 술을 주입해 놓고, 시간이 흐른 뒤 술이 들어있는 대나무의 마디를 찾으려 통통 두드렸던 것이지요. 역시 비어있는 마디 부분과 술로 차 있는 부분은 확연히 다른 소리가 났습니다. 구체적으로 술을 넣는 방법은 소개되지 않았습니다만 별 특징 없이 나무속으로 들어갔을 에탄올이, 죽향이 밸 대로 배어 있을 명주(名酒)가 되어 밖으로 나오겠구나 하며 이른 아침부터 군침을 삼켰던 것입니다.
20년도 더 된 어느 날 경주의 중식당에서 죽엽청주를 처음 마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중국 술 하면 탕수육을 시킬 때 곁들였던 이과두주 정도만 떠올렸던 저에게, 술도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술이 바로 죽엽청주였던 것입니다. 알싸하면서 끈적거리는 달콤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쎄~한 향기와 식물성 당분이 눅눅하게 어우러진 듯한 환상의 맛이었습니다. 맛이라고 했습니다만 사실은 냄새로 기억한다고 해야 맞겠습니다. 후각이 추억과 관계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으니까요. 지극히 향기 가득한 죽엽청주는 TV에서처럼 술을 대나무 속에 집어넣는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복잡한 과정이지요. 찹쌀을 불려 고두밥을 찌고 누룩을 첨가한 뒤 대나무 잎을 끓인 물과 함께 솔잎을 넣어 발효시킵니다. 발효가 끝나면 맑은 술만 걸러내는데, 바로 그 결과물이 죽엽청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대나무 통술이건 죽엽청주건 운치 있기는 매한가지겠지요. 좋은 사람들과 멋들어지게 한 잔 하고 싶어 지는 날입니다.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담양은 정자와 원림의 고장이기도 하지요, 소쇄원, 취가정, 식영정, 환벽당과 면앙정, 송강정 등 역사의 숨결이 담긴 풍취로 넘실대는 곳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역사 특집으로 따로 찾지 않는 한 이 모든 곳을 다 둘러볼 수는 없는 일이라 다음 기회로 슬쩍 미루고 핫스폿인 메타세쿼이아 길을 찾습니다. 이번 담양 방문의 목적은 단호하게도 시력 회복이니까요.
담양 프로방스 등 주위에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은 타운이 형성되어 있어, 도로 건너편 작은 굴다리를 통과해야 이 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주차장에서 바로 알아채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최고의 방법은 역시 사람들 따라 묻어가기죠. 서너 명이 무리를 지어서 주차장에서 큰 길가 쪽으로 향하고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들을 따라갈 일입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메타세쿼이아 길에 들어섰습니다. 한참을 걸어가도 위와 같은 전경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넓은 길의 곳곳에는 갖가지 포즈로 사진을 찍는 탐방객들이 전체 배경 속의 기분 좋은 악센트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썩 운치 있는 길이나 너무도 길게 뻗어있으니 약간은 단조로운 느낌이랄까요. 근처 초등학교 연합 사생대회가 이 길에서 열린다면 적어도 학생들에게 원근법만큼은 확실히 이해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똑같습니다 구도로만 본다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의 유래가 적힌 안내판을 읽어봤습니다. 1972년 담양군에서 조성한 길입니다. 메타세쿼이아는 어떤 수종보다도 빠르고 높이 자라는 특성이 있어 관제(官製) 수종으로 선택된 것이었고요. 지난 2000년 도로 확장공사 과정에서 벌목될 위기에 놓인 것을 군민이 단합해 지켜냈다고 나와 있습니다.
요즘 힘들게 지켜냈거나 지켜나가고 있는 것들을 보면 항상 그 주체는 시민들입니다. 각종 토목건설공사를 계획하며 여기만큼은 건드려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분석을 건설계획의 주체는 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시민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막아내지 않는다면 잃게 될 곳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제주의 비자림로가 이슈가 된 지 오래입니다만 아직도 국토부와 제주도는 덜 베어낸 삼나무를 보며 무언가 숙제를 다 못한 느낌인지, 기회만 되면 벌목을 재개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현장에서 이슬을 맞아가며 숲을 지키는 주체는 시민들입니다. 언제쯤 '행정의 공사 강행, 시민의 반대 집회'라는 쌍방의 이벤트가 멈춰질지 모를 노릇입니다.
그래도 담양군은 현명한 결단과 추진력으로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 길이라는 두 보물을 군민과 국민들에게 선사했습니다. 어지러운 곳을 정리하고 숲을 조성하는 것도 도시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면, 행정이 찾아낼 수 있는 건강한 개발이 필요한 공간도 한두 곳이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시민과 머리를 맞대고 고장의 앞날을 위해 어떤 개발이 필요한지 심사숙고한다면 환경과 지역경제를 동시에 살릴 수 있는 방안도 충분히 도출될 수 있지 않을까요. 누가 봐도 굳이 필요하지 않은 곳에 아스팔트를 까는 일은 정말 유치하고 저급한 개발일 것입니다.
전남의 명소들을 제대로 소화해 가면서 보려 하니 많은 걸음을 걸었습니다. 운동은 되었겠지만 발바닥은 오랜만에 겪은 고행으로 물집까지 생기더군요. 그렇지만 이번 여정의 수혜기관은 어디까지나 '두 눈'이었습니다. 순천만 습지에서 보성의 녹차밭으로 그리고 담양의 대숲과 메타세쿼이아까지. 연이어 시야에 들어온 결이 다른 모든 초록은, 분명 노안의 속도를 늦추는 보약이 되었을 겁니다. 여러분의 주위에도 루테인에 버금갈 최고의 보약들이 자주 목격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날이 어두워집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한라산 쪽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오늘의 보약 한 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