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의 어떤 것들
일상적인 공간을 이동하면서 오감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기란 힘든 일입니다. 거의 모든 것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 동일한 질감으로 존재하며 소음마저도 큰 질적인 차이가 없어서일 것이고, 무엇보다 지각의 날카로움이 필요치 않은 정신상태가 그 이유겠지요. 그런데 분명 같은 길을 지나도 바람은 그다지 불지 않으면서 비가 적당히 내리는 날에는 무언가가 확실히 달라집니다. 하늘의 빛 자체가 주는 효과도 효과겠지만 평소와 다른 공기의 냄새가 후각을 날카롭게 자극합니다. 날카롭다고는 하지만 기분 좋은 쪽으로의 날카로움인 것입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순간, 혹은 비가 막 그친 뒤의 냄새들은 향수의 목록처럼 나름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특히 비에 젖은 흙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묘하게 설레는 감정과 그곳이 비록 도심일지라도 목가적인 비린내를 동반합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요. 자연의 섭리인 기상의 변화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한낱 인간의 변덕스러운 심리입니다.
잠깐만 진지해져 볼까요? 학자들에 따르면 흙이나 아스팔트, 나뭇잎 등에 떨어진 빗방울은 표면에 묻어있는 성분들을 감싸 녹이게 되고, 그 습기가 증발하면서 해당 성분의 분자도 공기 중으로 날아간다고 하는데요. 비 오는 날, 공기 중을 힘차게 돌아다니는 이런 분자들이 콧속으로 들어와 흙이나 나뭇잎이 담고 있었던 향기들을 속속들이 맡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온도나 내린 비의 양에 따라 그 정도는 달라지기도 하겠지요. 물질 속에 갇혀 있던 냄새 분자들이 해방되어 주위를 채우고 있으니 적나라한 자연의 페로몬을 왜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비가 부슬부슬 내리거나 막 그친 순간, 그리고 안개가 짙게 낀 습한 날의 몽환적인 느낌은 후각의 예민함과 함께 고양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천만 습지에 왔습니다. 많이 궁금했던 곳입니다. 지금까지의 장소가 과거의 기억과 연결된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하얀 도화지처럼 모든 기억을 처음 그려 넣을 장소였는데요, 끌리되 가보지 못하는 공간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요. 한 곳 한 곳 이야기를 채워갈 생각을 하니 설레기도 하지만 추억을 무기로 글을 풀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막막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낯선 곳을 묘사하는 것의 장점도 있지 않을까요. 개인적인 인상으로 가득한 곳들이 아닐 것이기에 오히려 객관적으로 공간을 바라볼 수 있겠다는 기대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람사르 습지에 등록이 되었고 세계 5대 연안습지로 알려진 곳이며 여러 동식물과 철새들의 낙원이라는 순천만 습지의 가치는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간단한 검색 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는 곳이기에 구구절절 안내해 드릴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생태적 가치 못지않은 꿈같은 풍경, 그 자체를 마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흙냄새가 진하게 날 정도로 비를 머금은 것은 아니지만 촉촉한 습지 특유의 습기가 올라왔고 낮은 구름과 옅은 안개가 낀 날이었습니다. 하이라이트인 용산전망대에서의 맑은 장관을 보기 어렵겠다는 아쉬움은, 맑은 날이었으면 이 광활한 공간에서 도무지 피할 수 없었을 직사광선 걱정만큼은 떨칠 수 있겠다는 안도감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분 좋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데크로 이어진 길을 걸었습니다. 데크의 폭이 넓어지는 앞쪽에서 예닐곱 분이 모여 허리를 굽히고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더군요. 동참의 가장 좋은 방법은 똑같은 포즈를 취하는 것입니다. 허리를 숙이고 눈을 아래로 향하니 이 넓은 갯벌의 진정한 주인공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 두터운 팬덤을 자랑하던 만화 주인공 주먹대장을 보는 듯, 유독 한쪽 집게발의 크기가 기괴할 정도로 큰 칠게, 그리고 사진 찍기가 쉽지 않을 만큼 순간이동에 능한 짱뚱어가 한없이 고요한 순천만에 스타카토의 활력을 넣어주고 있습니다. 칠게의 학명은 Macrophthalmus japonicus인 걸로 봐서 일본이 원산지거나 일본 학자가 처음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을 듯합니다. '칡소'가 칡을 먹고 자란 소가 아니라 칡처럼 검은 소라는 의미인 것처럼 검은 게를 지칭해 칠게라는 설도 있고요, 진흙을 몸에 '칠하고'다녀서 칠게라 불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데크 아래로 내려가 생태적 가치가 높은 이 녀석들을 잡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황스러운 것은, 분명히 습지로 오는 길 주변에 온통 칠게 튀김을 파는 음식점들이 줄을 섰다는 사실입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포털 사이트에 칠게를 입력해 보니, 온통 '냉동 칠게', '간장 칠게장' 등 별미의 주인공으로 검색이 됩니다.
그렇다면 칠게와 짱뚱어는 멸종이 걱정될 정도로 귀하지는 않지만 갯벌이 훼손될 수 있으니 잡으러 내려가지 말라는 것일 수가 있겠고요, 지금 수가 많다고 너도나도 잡아가면 씨가 마르게 돼 결국 갯벌의 생태계도 파괴될 우려가 있으니 잡지 말라는 이유로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그래야 이 귀여운 녀석들을 오래도록 볼 수 있겠지요.
언젠가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에게서 들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제주의 자랑, 흑돼지를 먹고 있을 때였습니다.
" 흑돼지가 천연기념물이라며? "
" 응, 그럴 거야. 얼마 전에 지정됐더라고."
"근데 이렇게 먹어도 돼?"
"... 응?"
말문이 막혔습니다. '이건 뭐지?...', 생각지도 않은 질문이었지만 잠시 후 저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나라 동물 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들을 살펴봅니다. 따오기, 두루미, 장수하늘소, 반달가슴곰... 잡아먹다가는 쇠고랑을 찰 게 분명한 동물들 일색입니다. 그렇담 천연기념물 지정 이후 먹은 것은 진정한 흑돼지가 아니었던 것인가, 진짜 흑돼지와는 전혀 다른 품종이었나, 방어와 부시리 중 부시리를 먹어 온 것과 마찬가지였나...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천연기념물 목록의 아래로 시선을 옮기니 제546호에 '제주 흑우', 550호에 '제주 흑돼지'가 등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급해진 손놀림으로 검색을 이어가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흑돼지는 제주축산진흥원에서 혈통을 보전하며 사육하고 있는 260여 마리일 뿐이라는 명쾌한 답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축산진흥원 내에 있는 흑돼지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어떤 흑돼지를 먹어도 쇠고랑을 찰 일은 없는 것이고, 짝퉁이 아닌 진짜 흑돼지를 드시고 있는 것이 맞다는 것이죠. 그러니 대규모 생산과 사육이 가능한 종은 식용으로도 유통이 가능하지만 수달이나 열목어와 같이 사육이 불가능한 종은 철저히 보호해야 하며, 위반 시 강력한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비양심적인 고깃집 주인이 일반 돼지를 흑돼지라고 내놓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지인이 제주에 있다면 추천받아 가시는 편이 낫겠지요.
아...
용산전망대에서의 일몰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해 질 녘 이곳을 찾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오픈 후 얼마 안 된 이른 시각인 데다 갈대의 황금물결이 넘실대는 계절도 아니라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일몰의 장관은 볼 수 없지만 아침의 신선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으니 오전에 순천만을 찾으시는 것도 괜찮은 여정일 것 같습니다.
순천만 습지는 용산전망대를 올라야 봤다고 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들은 터라 중간의 여러 갈림길에 미혹되지 않고 전망대 이정표를 따라 쉼 없이 걸어갑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습니다.
용산전망대로 가는 데크
분명 잘 닦아놓은 길입니다. 다리가 불편한 분들도 오를 수 있도록 단장까지 마쳤습니다. 중간중간 목재데크도 길게 깔려있어 굳이 등산화나 등산복을 챙기지 못했더라도 별 문제없는 경로입니다. 그런데도 왜 만만치 않았을까요?
평지에서 본 용산은 그저 야트막한 동산 정도였고 실제 해발고도도 77미터에 불과해 큰 부담 없이 10분이면 보고 오겠다 싶었던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용산의 초입에 쓰여 있는 '여기서부터 왕복 40분 소요'라는 문구가 당황스러웠고, 예상보다 경사진 곳들이 많아 숨을 수차례 고른 후에야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처음에 비슷한 간격으로 오르던 한 외국인 여성이 저를 우습다는 듯이 쭉쭉 앞질러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는 자괴감마저 들더군요. '아 한때는 날다람쥐였는데...' 하는 느낌, 아시지 않습니까 동년배 남성 여러분.
높이 77미터에 불과한 용(龍)산이지만, 이 용은 심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똬리를 등산로 삼아 올라가려니 기다란 몸을 다 거쳐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땀이 나도록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었을까요. 역시 산 앞에서는 겸손해야겠습니다. 겉모습이 만만해 보인다고 속단해서는 안 되는 대상은 사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배낭도 없는 등산객입니다. 그래도 뚜벅뚜벅 오른 덕에 핫플레이스인 용산전망대에 도착했습니다. 뿌연 날씨라 깨끗한 경치는 기대하지 말자 마음을 먹었고요, 예상대로 탁한 시야였습니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통 큰 평화로움은 아무 장애 없이 가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진에선 잘 느껴지지 않는군요. 대신 순천만 습지에서 제공하는 일몰 때의 모습을 밑에 첨부했습니다.
뿌옇고 흐린 날씨가 습지 고유의 촉촉한 느낌을 더해주는 듯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아련해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생각보다 만만치 않으니 쉬엄쉬엄 올라가자는 여유만 갖는다면 오늘 같은 날이 이 습지에는 더 어울릴 수도 있겠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1854 ~ 1900)는 어느 시대에 태어났어도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 아닐까 합니다. 화려했던 삶이 동성애에 대한 유죄판결로 비극적 마감을 하게 되지만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넘어 세속적인 인기도 하늘을 찌를 듯했지요. 요즘으로 치면 순회공연이라고 불렀을 미국에서의 강연으로 세계적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대스타였습니다. 어떻게 강연을 해야 특급 연예인 이상의 스타가 될 수 있는 건지, 그의 매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호기심만 가득해집니다. 아마도 '세상에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보다 더 나쁜 것은 누구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는 것'이라는 신념이 그의 작품과 인생에 오롯이 담겨, 수려한 외모와 더불어 거부하기 힘든 유산으로 영원히 남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유일한 장편소설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입니다. 꽃미남 외모를 가진 도리언 자신은 늙지 않는 대신 그를 그린 초상화가 흉측하게 늙어간다는, 기발하도록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소설 속에는 "남자는 여자의 첫사랑 이길 바라고, 여자는 남자의 마지막 로맨스이길 바란다." 같은 인상적인 문구들이 곳곳에 보이는데요, 요즘 시대에 쿨한 척 내뱉아도 감탄을 자아낼 만한 대사들이 수두룩하게 담겨있는 소설입니다.
가장 흔한 것도 비밀을 가지고 있으면 기쁨을 주는 법
안다는 건 치명적이야. 안개가 사물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거든
오스카 와일드의 미학과 유미주의(唯美主義) - 오직 예술, 이런저런 해석이나 잣대는 사절! - 의 기준이 될 만한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아닐까요. 무엇이든 신비스럽고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절정의 매력을 뿜어내는 것이지, 실체가 확실해지고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 궁극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을 만한, 그러나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숙이 고여있는 감정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오스카 와일드 자신은 세상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활짝 핀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고,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과의 동성애로 고소를 당한 이후 비참한 생활 끝에 삶을 마감할 정도로 바닥에 나동그라지기도 했습니다. 비밀스럽고 은근한 것의 미를 추종한 그는 결국 그의 미학적 기준과는 너무도 다르게, 세상에 완전히 벌거벗겨진 채로 롤러코스터 같은 생애를 지나온 것입니다. 어쩌면 절정을 맛본 후의 추락이라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을 삶의 내리막이 아니었을까요.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그의 담론을 시각화한 듯한 오늘 순천만 습지의 모습입니다. 도리언 그레이와 오스카 와일드가 용산전망대에 올라 전경을 바라본다면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구름이 낮게 깔리고 안개가 드리워 아름다움을 은밀히 감추고 있는 비밀스러운 풍경을 그들이 아니면 누가 좋아할 거란 말입니까.
오스카 와일드와 그의 연인이었던 알프레드 더글라스, 주드 로가 영화 <와일드(Wilde)>에서 알프레드 역을 맡았다고 하는데 싱크로율이 상당할 것 같습니다.
습지의 북쪽으로는 순천의 자랑인 소설가 김승옥 님과 동화작가 정채봉 님의 문학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문학관이 세워진다면 얼마나 영예로울까요. 김승옥 작가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1945년부터 순천에서 성장했으니 그의 진정한 보금자리는 아스라한 감성의 도시 순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으로 등단한 김승옥 작가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사실적인 묘사와 결이 다른 남녀의 사랑을 대담한 대사로 표현하면서 감수성의 혁명을 이루어낸, 우리 문학계의 보물이라 칭해지고 있는 분입니다. 대표작 <무진기행>등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한 상태로 세상과 맞서고 있습니다. 작품 속 씁쓸한 파편들은 1960년대 인간성 상실의 단면을 드러낸 거라고 하지만 지금의 세태에 적용하더라도 무리가 없어 보이는 감성들의 발견입니다.
김승옥 문학관
명작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소설은 첫 문장이 가슴을 때리며 끊이지 않고 회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 아침, 잠을 자던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났을 때,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이 거대한 벌레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니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럴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작품들이 아닐까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그리고 이상의 <날개>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속 불후의 첫 문장들입니다. 특히 <이방인>의 첫 문장은 '엄마가 죽었다'는 번역과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번역에 대해 갑론을박이 지금까지 이어질 정도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가장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방인>을 번역한 이정서 번역가는 원문에서 프랑스어의 'maman', 즉 '엄마'라는 평어를 지나치게 염두에 둔 탓에 호응관계만 고려해 '죽었다'라는 서술어를 써넣은 번역본을 부자연스럽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수긍이 갑니다. 어른이 되어도 '엄마'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모친상을 당했을 때 엄마가 '죽었다'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죠. 많은 번역가들이 카뮈의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수고를 감내했습니다만 적어도 소설의 시작인 이 문장만큼은 '엄마가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편이 자연스럽다는, 이정서 번역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싶습니다. <설국> 역시 '국경'의 직역과 의역을 두고 어느 것이 적절한지 논란이 없지 않습니다. 나라 국(國) 자가 원문에 있으니 그대로 번역하는 게 맞다는 의견과, 여기서의 국경은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현(県)과 현 사이의 경계를 뜻하는 것이니 '현의 접경을 빠져나오자, '로 의역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를 없앨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죠. '설국'이란 단어 역시 의역을 하지 않더라도 '눈으로 뒤덮인 고장'으로 알아서 해석할 수 있지만 이마저도 '눈의 고장'이라고 번역된 책을 볼 수 있습니다. 글의 첫 문장부터 해석의 대립을 유발할 수 있으니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번역가와 독자 모두 개인적인 잣대가 있을 테니까요. 원작자의 의도를 오롯이 대중에게 전달하기란 얼마나 고되고 험난한 작업일까요. 세상 모든 역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또 다른 우리나라 소설 중 첫머리가 인상적인 작품은 무엇이 있을까요. 결코 특별하지 않지만 잔잔한 묘사가 여운으로 남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꼽고 싶습니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이번 글은 문학특집이라고 해야 될 것도 같습니다만 번역에 따른 논란 조차 있을 수 없는 우리 문학의 명작을 빼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약회사 전무로의 승진을 앞두고 있던 주인공 윤희중이 고향인 무진을 찾아와 겪게 되는 감성들을 세밀히 그려낸 작품이지요. 시선을 따라 정경을 묘사하는 것에 그칠 뿐이지만 과거와 현대를 쿨하게 오버랩시키면서도 주인공 앞에 놓일 부정적인 감정의 반복을 암시하는, 담담해서 널리 알려진 소설의 시작입니다. 무심한 듯 과감한 묘사로 가득한 김승옥 작가의 작품은 오스카 와일드의 표현력에 절대 꿀리지 않을 내공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안개로 가려져야 마땅할 불투명한 상실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은 두 작가의 공통점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소설을 처음 접할 때 무진이 어디일까 궁금했습니다, 지도를 샅샅이 뒤져 보기도 했으니까요. 작가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순천이 곧 무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소설 속 무진의 특산물이 '안개'라는 대목이 미간을 쿡 찔렀습니다. 그랬군요, 오늘의 이 뿌연 날씨는 무진의 특산물인 안개가 빚어낸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무진기행>의 공간을 찾기에 이보다 어울리는 날씨는 없을 듯했습니다.
용산전망대에서 순천만을 감상하면서도 내내 그놈의 '왕복 40분' 문구가 맴돌며 떠나질 않습니다. 젊은 외국인과의 산행 경쟁에서 완패를 한 후유증 때문인지 세세한 분석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40분이란 혈기왕성한 20대의 잰걸음을 기준으로 했거나 반대로 70대 노인의 힘겨운 걸음을 반영한 시간은 아닐 것이며 국민 평균 등산 속도를 나름 바탕으로 한 것일 테니, 그렇다면 4,50대 정도의 여유 있는 보행을 기준으로 한 시간임에 틀림없을 테고, 그 말은 내가 40분 안으로 왕복을 할 수 있다면 국민 평균 체력 이상이라는 뜻이겠군'
참 딱하지 않습니까? 이런 강박을 느끼는 것도, 떨어진 체력이 그만큼 걱정된다는 반증일 겁니다. 더 이상 여유 있는 산책이 될 수 없었습니다. 신념과 각오를 장착하고 오던 길을 내려가니 기록 단축을 바라며 막판 스퍼트를 하는 마라토너가 된 것 같더군요. 간판이 있던 출발지점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경과한 시간이 32분. 억지로 국민 평균보다 8분을 당겼습니다. 이걸 자랑이라고 해도 될까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사색에 잠겨 천천히 걸어도 좋을 내리막에, 40분이라는 시간이 뭐라고 그저 두 다리에만 집중했다니 참으로 한심했습니다. 해가 났더라면 땀으로 얼마나 흠뻑 젖었을까요. 평지를 확인하고 한숨을 돌린 후 순천의 공기를 폐로 깊숙이 들이마시며 데크를 걷습니다. 갯벌과 높게 자란 갈대가 다시 보이고, 멀리 남쪽 바다의 부드러움도 옅은 빛으로 반사되어 눈 속으로 들어옵니다. 살짝 맺혔던 땀은 날아가고 한가닥 마음의 결까지 부드러워집니다.
명백한 진함보다 순수한 옅음, 강렬한 첫인상보다 감춰진 매력이 빛을 발하는
이곳은 순천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