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tal Eclipse Jul 16. 2020

20 도시낭만-Downtown Seattle ①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주말에 가끔 시애틀 다운타운으로 가는 길은 제주에 살면서 어쩌다 서울을 찾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빈도상 제주에서 서울을 가는 것보다 훨씬 잦은 일이었고 거리도 차로 삼사십 분 정도로 멀지 않았지만, 타국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며 도심의 낭만을 즐긴다는 것이 그리 빈번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찾게 되는 시애틀 다운타운의 모습은 자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더 낭만적이고 이국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남쪽 페더럴웨이에서 불과 3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다운타운이지만 막 한국에서 날아온 듯 기분 좋은 생경함은 덤이었습니다.

 

 먼저 시애틀 사진의 아키타입이라 할 수 있는 풍경을 눈에 담으려 케리 파크(Kerry Park)로 '올라'갑니다. 이젠 10년도 더 된 추억이라 허술한 기억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올 수 있지만 이 곳은 '올라가야만' 했던 공원이라고 정확히 기억이 납니다. 당시 궁색했던 내비게이션이 자꾸 오류가 났을 정도로 고지대의 주택가를 돌고 돌아 힘들게 찾았던 곳인데요, 시애틀 가이드라면 응당 손님을 모시고 와야 하는 킬링 포인트입니다. 케리 파크에서 도시의 전경을 감상한 후 시내로 내려가 각 스폿을 공략하는 것도 괜찮은 여정이겠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 훑고 가도 훌륭한 탐방이겠군요. Vice Versa!


    케리 파크에서 바라본 시애틀 다운타운


  저 멀리 뒤로 눈에 덮인 산이 보이시는지요? 워싱턴주 등록 차량의 번호판에 그려져 있을 정도로 상징적 존재인 레이니어 산(Mt. Rainier)입니다. 제주의 집과 일터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군요, 케리파크에서 120킬로미터나 떨어진 거리에 서 있습니다만 코 앞에 있는 것처럼 솟아 있습니다. 높이가 무려 4392미터에 이르니 이렇듯 가깝게 보이는 것이겠지요. 2시간 30분은 차로 달려야 저 지척으로 보이는 마운트 레이니어 국립공원에 닿을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어있을 지금의 시애틀을 생각하면 자세한 소개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겠습니다. 길도 풍경도, 건물도 그때 그 모습이 아닐 곳들이 많을 테니까요. 적어도 아직까지 시애틀의 대표 방문지로 끄떡없을 공간만을 추려 단순하게 회상해 볼까 합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시애틀의 랜드마크, 스페이스 니들 근처에 도착하면 퍼시픽 사이언스 센터와 놀이공원, 그리고 EMP(Experience Music Project) 뮤지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애틀 센터(Seattle Center)가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962년 세계 박람회 당시 사용했던 시설들을 개조해서 조성한 공간인데요, 생각 외로 볼 것이 많아 박물관 한 곳에 들어가면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스패이스 니들은 2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올라가 보지 않았습니다. 이유요? 입장료가 너무 비쌌습니다. 전망대만 보고 오는데 3만 원 가까운 가격이었으니까요. 일주일 정도의 일정으로 온 휴가였다면 아깝지 않게 표를 끊어 올라갔을 일인데, 살고 있는 입장에선 뭐 올라갈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습니다. 마치 서울시민이 63 빌딩을 좀체 가지 않는, 그런 이치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대신 전망대를 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 구경을 하면서 EMP로 향합니다. 500여 개의 기타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갔을 뿐입니다만, 록의 전설 '너바나(Nirvana)'의 초기 활동무대와 일렉트릭 기타의 신화 지미 헨드릭스의 고향이 시애틀이었다는 것을 알게 돼 수확이 있었던 방문이었습니다. 록이나 펑크에 그다지 아는 바가 없는 저 같은 사람조차 그 명성을 알고 있는데 시애틀 주민들의 자부심은 오죽할까요. 너바나의 보컬 커트 코베인과 지미 핸드릭스의 기타와 의상, 악보 등이 자랑스럽게 관람객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스페이스 니들의 야경과 EMP 박물관 내부의 기타로 장식되어 있는 구조물


 시애틀 다운타운을 떠올리니 '이모네'라는 펍이 생각나는군요. 유학시절 알게 된 동생과 술을 한잔 했던 장소입니다. 펍의 이름처럼 소주는 물론이고 한국식 안주가 많았으나 내부 분위기나 음악, 직원들 모두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 펍이었습니다. 고국에 비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던 소주를 아껴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 얼큰하게 취하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운전은 금물이고 버스 탈 시간도 지난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는데 직원이 전단 한 장을 건네더군요, 전단엔 큼지막하게 '파랑새 대리운전'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10년도 더 지난 그때도 한국의 대리운전은 전 세계로 이미 수출된 후였습니다. 소주에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기사님과 한국어로 말을 주고받으니, 신제주에서 대리운전을 불러 집으로 가는 느낌과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단 한 가지, 요금만 빼고 말이죠. 비쌉니다. 미국에서의 대리운전 부르기는 꽤 사치스러운 소비행태 중 하나였습니다. 한번 경험해 본 걸로 만족해야죠. 그날 함께 기분 좋게 한잔 한 그 동생과는 지금도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입구에 거대한 해머링 맨(Hammering Man)이 있어 주변에서 못 찾을 수가 없는 SAM(Seattle Art Museum)으로 이동했습니다. 해머링 맨을 모른다 해도, 친구 이름처럼 익숙한 '쌤'이 어디 있냐고 길거리에서 물으면 어렵지 않게 답을 들을 수 있는 시애틀의 자랑거리죠. 특히 앤디 워홀 류(類)의 현대미술작품들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끕니다. 

 조너선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작품인 해머링 맨은 이곳 시애틀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주요 도시에 산재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서대문에서 광화문 가는 길에 이 해머링 맨을 만날 수 있는데요, 서울의 해머링 맨은 2002년에 설치되었고 시애틀에는 1992년에 세워졌으니 이곳의 해머링 맨이 10년 선배인 셈입니다. 산업사회의 주역임에도 점점 소외되어가는 노동자들을 기리며 1분 17초마다 팔로 망치를 내리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해머링 맨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1분 17초라는 간격에 무슨 의미가 담겼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나, 서울의 해머링맨은 1분 17초에서 1분으로 망치질의 간격을 줄였다고 하는군요. 시간 셈하기에 훨씬 단순하고 적당한 것 같습니다. 산업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고발하며 끊임없이 망치질을 해 대는 해머링 맨의 뒤로 고차원적인 예술의 집약체가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오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SAM 앞을 지키고 있는 해머링 맨

   SAM 내부 천장 아래의 설치미술, 지금은 매달린 차들이 신형 모델로 바뀌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운타운에서 퓨젯 사운드(Puget Sound), 즉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면 1907년에 세워진 미국식 재래시장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이 나옵니다. 안 가면 섭섭한 곳이죠. 생선류와 과일, 화훼류를 판매하는 도로 옆 회랑을 본 뒤 실내로 들어가면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오는데요. 시애틀을 대표하는 기념품숍, 음반가게 등 눈길을 사로잡는 가게들로 가득한 데다가 소문난 맛집도 바다 쪽으로 창을 내고 성업 중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시장의 명물은 이거죠, 시장 초입에 위치한 생선가게에서 직원들이 연어를 던져 주고받는 퍼포먼스! 트럭에서 내린 연어를 신속히 운반하려 했던 것이겠지만,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을 위해 지금도 시연되고 있습니다. 연어가 살아서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좀체 보기 힘든 광경은 관광객들의 휴대전화 속에 생생히 담깁니다. 눈 앞에서 직접 보시면 생각보다 놀랍다고 느껴질 법한 기예입니다. 그렇게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의 상인들은 연어보다 더 활력 있는 몸짓과 노동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입구와 연어던지기로 소문난 바로 그 생선코너


 2011년에 개봉한 <만추>, 현빈과 탕웨이 주연의 로맨스 영화입니다. 교도소에 수감 중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 행이 허락된 애나가 시애틀행 버스에서 훈이라는 남자를 만나며 보내는 사흘간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마음이 굳게 잠겨버린 애나에게 스쳐 지나갈 거라 생각했던 인연이 커다란 위로가 되어 다가오는 과정에서 잔잔하면서도 애틋한 남녀의 긴장감이 느껴지는데요,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뻔한 것 같고 짧은 호감이라 말하기엔 깊이감이 있습니다. 앞을 알 수 없는 주인공의 처지가 시애틀의 애수 넘치는 영상 속에 녹아들어 간 듯합니다.    

 영화에서처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낯선 이에게서 호감을 발견하고 얼굴을 익혀가는 단계는 얼마나 설레면서도 불안정한 과정일까요. 어둠을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두 남녀도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만큼은 빼놓고 싶지 않았던가 봅니다. 떠들썩한 흥정의 기운찬 울림, 교차하는 여행자들의 설렘의 한가운데에서 그들은 서로의 마음속으로 한 걸음씩 더 들어가고 있습니다.


  영화 <만추> 속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을 거니는 그들


 전체적인 영화 속 톤은 회색과 갈색입니다. 흑백영화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비가 많이 내려 우울한 시애틀의 분위기와 주인공의 감정선을 담아낼 빛깔이었겠지요. 영화에서처럼 시애틀이란 도시는 스산하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만 하는 우중충한 도시로 표현되는 것을 자주 보아왔습니다. 커피를 입에 달고 있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장소라고 말이죠. 글쎄요, 온화한 해양성 기후의 덕을 적지 않게 보고 있는 이곳 시민들 입장에서는 버럭 화를 낼 이미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늦가을과 겨울에는 부슬비가 하염없이 내리기도 하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지는 환상적인 부드러움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위도 47도에서 48도 사이에 있는 도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쾌적하고 눈부신 봄 여름 가을과, 웬만해선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겨울입니다. 생각해 보니 시애틀에 내리는 '눈'을 이야기하는 글이나 영화는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블라디보스토크나 울란바토르가 비슷한 위도의 도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을 시애틀의 기후환경인 것입니다. 그러니 안개가 피어오르듯 모호하고 스산하며 슬픔이 배어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낮게 깔리는 안개와 먹먹함이 어울려야 할 곳은 순천만 습지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영화 <만추>의 O.S.T. 에서 '놀이공원'입니다. 서로에게 막 다가가려는 잠재적 연인들의 음악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고 이제는 남이 된 추억의 사랑을 회고할 때 함께 해도 썩 어울릴 법한 멜로디라고 생각하는데요. 잠시 눈을 감고 시애틀의 사랑을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LYNF11plzss


 

 <나 혼자 산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탤런트 경수진 씨가 바지런하게도 혼자만의 캠핑 준비부터 목공 작업까지 척척 해 내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어찌나 금손이시던지 그 방면으로 유난히 형편없는 저는 감탄을 하며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성취감도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도 없이 가구며 장식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얼마나 부럽던지요. 가쁜 숨을 쉬어가며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모습에 성훈 씨가 한 마디 하시더군요, 제가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집에선 좀 쉬어도 좋을 텐데 정말 바쁘셨겠네요." 경수진 씨가 답했습니다.


 "아니오, 바쁜 건 없었어요, 몸이 일을 했을 뿐이지 마음은 하나도 바쁘지 않았어요."


 내공이 느껴졌습니다, 순수한 노동의 기쁨을 아는 분이었군요. 그 기쁨 또한 자신을 위한 노동에서 비롯됐으니 얼마나 컸겠습니까.


 어떤 식으로든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랬습니다. 영어 구사능력을 떠나 직접 얼굴을 맞대고 부딪혀야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었고 어지간한 가구나 기계들은 알아서 조립과 수리를 해야 했으며, 가족들과 어디라도 콧바람 쐬러 갈라치면 캠의 준(準) 달인은 돼야 제대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곳곳의 홈 디포(Home Depot)와 같은 DIY 매장들이 식물의 씨앗부터 컨테이너 하우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용품을 팔고 있으니 스스로 만들고 즐기기는 그들의 문화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멍청한 눈빛으로 거대한 매장을 둘러보던 이주 초기와 달리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 무렵에는 제법 노동의 기쁨을 체감하며 필요한 것들을 매장 구석에서 쏙쏙 뽑아낼 수 있었는데요, 당연히 그래야 하기도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계획하고 만들어가는 행복은 꽤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왜 꼭 무엇이든 누군가든 어느 곳이든 손에 익고, 익숙해지고, 정이 들 때쯤 이별을 해야 하는 건지요. 그런 법칙이라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보이는 해 질 녘 바다


 특정한 대상에 대한 간절함과 그리움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가는 것 같습니다. 지나친 그리움보다 앞으로 마주칠 그리움의 합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일까요. 그리움의 대상은 사람이 될 수도, 공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시 공간과 함께 기억되는 이미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때는 말로 풀어놓아 버리면 해소되었을 간절함 대신 어느 순간부터는 허공을 바라보며 큰 숨으로 회상하는 것이 유일하고도 최선인 자가 치유가 되었습니다. 기억들이 더 아득해지고 덧없어져서라기 보다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때가 와서 그러는 것뿐인지도 모릅니다.

 품고 있는 공간의 기억들이 화석처럼 굳어버려 돌덩어리들을 안고 살아가는 느낌이지만 그 또한 버릴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무거움이겠지요. 무수한 시공간을 지나오며 굳어진 그리움이란 돌들을 석탄처럼 태우며 계속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무언가 돌이키고 싶을 때는 두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으면 추억이 그려지니 눈을 감는다는 것은 곧 지난날을 볼 수 있는 방법에 다름 아닙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볼 수 없는 아름다움 또한 얼마나 많을까요.

 파이크 플레이스의 전망 좋은 곳에 서 있는 제 모습이, 닫힌 눈꺼풀 안쪽을 스크린 삼아 투영됩니다. 

 볼에 스치는 바람이 부드럽고, 노을의 그라데이션은 사람들의 이마를 붉고도 푸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시애틀의 날씨처럼 잔잔한 바다는 하늘빛을 반사하며 발아래에서 일렁이고 있습니다.


 참 좋습니다. 


 이게 낭만이라는 겁니다.




  



작가의 이전글 17 계획적인 초록 -담양 죽녹원,메타세쿼이아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