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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Jul 21. 2020

21 커피전쟁  -Downtown Seattle ②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예전에,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이 흐르는 축제였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녀는 맛이 썼다.
                         그래서 욕설을 퍼부어 주었다.                 
      나는 정의에 대항했다. 나는 도망쳤다.
오 마녀들이여, 오 비참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은 바로 너희들에게 맡겨졌다.


              -  아르튀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 中



 제 필명은 'Total Eclipse'입니다. 제 자신을 나타내는 데 별 쓸모가 없는 영어 단어입니다. 오히려 재치 있게 한글로 지어진 닉네임이 더 세련되어 보이는 요즘인데도 고집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특별한 사연이 있다기보다 20년도 더 된 언젠가 비디오테이프로 보았던 충격적인 영화 제목일 뿐입니다. 가슴을 때리는 이 젊은 배우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저에게 이 영화 속 캐릭터 이상으로 파고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연기력에 비해 유난히 상복이 없는 배우로 명성(?)을 떨치다 결국 그는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의 '혈연(血演)' -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연기 아니었나요 - 에 힘입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게 됩니다.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듯한 그의 필모그래피를 고려하면 <토탈 이클립스>에서의 연기는 등산로 초입의 매표소쯤에서 쏟아낸 열정이었을 텐데요. 많은 배역의 경험이 없는 내면의 순수함이, 날카롭게 날이 선 천재 시인의 삶을 그대로 투영하는데 되레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한 게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프랑스 상징주의 대표 시인인 16살 연상의 폴 베를렌과 사랑과 증오를 버무린 감정을 공유한 천재 시인 랭보의 이야기는, 단순히 동성애라는 영화적 흥미요소가 문제가 아닌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끊임없이 내던집니다. 세계 최강의 미소년이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 아름다움보다 몇 배는 더했을 랭보와의 일체감을 무기로, 관객들로 하여금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몰입으로 몰아넣습니다.  


     (좌) 풀 베를렌과 랭보의 실제 모습                                                (우) 영화 토탈 이클립스에서의 베를렌과 랭보


 아내와 랭보의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던 베를렌은 랭보에게 총을 쏘게 되고, 이 사건으로 둘은 갈라서게 됩니다. 정신적인 피폐함이 겹겹이 쌓인 이맘때 랭보가 내놓은 연작이 바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습니다. 이후 랭보는 예멘의 프랑스 커피 무역회사에 들어가 커피나무의 주산지 에티오피아로 발령이 나게 되지요, 그는 품질 좋은 커피콩의 고향인 에티오피아의 커피를 유럽에 수출하며 사업가의 수완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한때 압생트에 매료돼 시의 영감을 빌려왔던 그에게, 향기롭고도 쓰디쓴 커피는 길지 않은 삶의 후반을 함께 해 주었던 동반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커피라는 검은 액체는 예술가에게도, 평범한 우리에게도 쉽게 헤어질 수 없는 치명적인 연인이 되어 왔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슬람권에서 처음 기호식품으로 등장한 커피는 예멘의 '모카'항구를 통해 유럽에 알려지게 됩니다. 참으로 익숙한 이름의 항구입니다. 커피의 매력에 빠진 유럽의 도시에는 수많은 커피하우스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회가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는 걸 보면 요즘 커피숍의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영국에선 이런 커피하우스에서의 토론이 왕의 권위에 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으로 한때 커피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는데요. 이해는 됩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정권의 치부가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한번 퍼지기 시작한 유행의 물결을 막는 게 어디 쉬울 리가 있을는지요,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커피 수요를 맞추기 위해 열강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에 커피나무 재배지를 조성합니다. 식민지에 넓게 퍼진 커피농장에서 유럽의 상인들은 노예나 현지인들로 하여금 지옥 같은 노동을 강요하며, 본국에서 침을 삼키며 기다리고 있을 그들의 고객에게 눈물과 고통의 산물인 커피 원두를 공급해 온 것입니다. 현지 농민들의 입장에서 유통구조가 제대로 드러난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자는 운동은 그래서 당연히 추구해야 될 움직임이라는 생각입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바로 건너편에 있는 스타벅스 1호점

 

 시애틀 도심의 골목은 온통 커피 향 투성이입니다. 블록마다 기막힌 향기를 내보내며 행인들을 유혹하는 커피 맛집들이 수두룩하게 박혀 있습니다. 늦가을, 시애틀 특유의 부슬비와 뿌연 안개가 감싸는 습한 날씨 커피 향 분자들의 비행을 활성화시켜서 그랬던 건지 유난히 향기가 진하게 다가옵니다. 그토록 유명한 시애틀에서의 커피 한잔은, 역시 '스타벅스의 도시'라는 이미지로 인해 가치가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1971년 제리 볼드윈, 제브 시글, 고든 바우커 세 사람이 이곳 시애틀에서 전설적인 미국 다방의 창업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추출법으로 만들어진 커피를 취급했는데요, 신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하워드 슐츠가 수증기의 압력으로 더 농축되고 더 강한 맛을 낼 수 있는 '에스프레소 추출법'을 도입하면서 한 단계 도약하게 됩니다. 이어서 하워드 슐츠는 이전 추출법을 고집한 창업자들과 결별을 하면서 '스타벅스'라는 이름을 사들였고, 그것이 지금의 스타벅스 전설로 이어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어원입니다만 영국의 'Star Bek'이란 늪지대에 이주해 살던 바이킹 가족을 지칭하는 말에서 스타벅스(Starbucks)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하지요. 이 스타벡의 가족이 소설 <모비 딕>에 실리고, 이 소설을 본 창업 3인방 가운데 한 명인 제리 볼드윈이 가게의 이름을 스타벅스로 지었다고 하니, 그에게도 오늘날 스타벅스 신화의 상당한 지분이 있다고 해도 될 듯합니다.


 현지에 있었던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도 여러 브랜드의 커피전문점이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만 요즘은 어떨지 검색해보니 소규모 지역 커피전문점의 공세가 엄청난 듯합니다. 맵디 매운 작은 고추들이 도심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스타벅스 같은 철옹성의 업체들도 오히려 그들의 고향인 시애틀에서만큼은 가장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 같더군요. 시애틀을 기반으로 경쟁해 왔던 대표적 업체들을 들자면, 스타벅스를 위시해 털리스 커피(Tully's Coffee)와 시애틀스 베스트 커피(Seattle's Best Coffee)가 있겠습니다. 1992년에 창업한 털리스 커피는 미국 각지뿐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에 상당수의 지점을 내며 성장했으나 경영에 큰 위기를 맞으면서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시애틀스 베스트 커피는 1968년에 설립된 전통 있는 브랜드로 2003년 스타벅스에 인수됩니다. 링컨과 포드, 렉서스와 토요타, 제네시스와 현대의 관계처럼 스타벅스로 인수된 뒤에는 더 대중적인 브랜드로 눈높이를 낮추었다고 합니다만 시애틀의 우중충한 잿빛 날씨 속에 고유의 빨간색 간판과 로고는 산뜻하고 고급스러운 자극을 선사합니다. 이 외에도 스텀프타운(Stumptown), 에스프레소 비바체(Espresso Vivace) 등의 소규모 커피숍들이 만만치 않은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다시 한번 시애틀을 찾게 되면 꼭 장인들의 커피전쟁, 그 현장에 몸 바쳐 뛰어들어봐야겠습니다. 

 각오는 이렇듯 철저하지만 어느 곳의 커피든 시애틀에 어울리지 않는 맛이 있을까요, 다운타운을 걸으며 입에 머금는 커피의 맛은 달콤 아니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특유의 공기가 더해져 그런 걸까요, 커피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는 시애틀의 인상입니다.


        시애틀 다운타운에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방향에 있었던 털리스 커피


    시애틀스 베스트 커피


  진한 커피를 선호하는 탓에, 연한 아메리카노를 주는 곳에서는 꼭 샷 추가를 부탁합니다. 커피 향을 제대로 즐길 줄 안다기보다는, 달고 짠 음식을 찾는 습관이 커피의 맛 역시 웬만큼 진하지 않고서는 즐길 수 없도록 만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수 중의 하수입니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2차 대전 중 커피 원두 대부분이 연합군으로 보내지고 - 각성효과가 있는 커피는 군인들의 경계심 유지에 필수였는지요 - 이미 커피 음용이 생활화된 미국인들은 부족해진 커피 원두를 최대한 아끼기 위해 물을 순환시켜 계속 재탕, 삼탕해 내려 마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재활용된 원두에서 나온 커피가 그토록 익숙한 '아메리카노'가 된 것인데요. 연하 마시고 싶어 연하게 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미국인들도 원래는 에스프레소 같은 '진한'맛으로 커피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메리카노의 부드럽고 연한 맛은 곧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 샷 추가를 남발하는 이유도 커피 본연의 맛을 추구하려는 본능이 아닐는지요.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커피의 종류가 등장하며 개인의 취향 역시 셀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어떤 커피 맛을 찾느냐 하는 건 전적으로 Taster's Choice입니다.



 예전 제주시의 한 도서관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탁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해 달라고 하더군요. 난 떠든 적이 없는데? 그런데 그 날 제 습관을 알아차렸습니다. 영어 단어나 문장을 익힐 때 나도 모르게 그것들을 중얼중얼 읽고 있었던 겁니다. 제 딴에는 머릿속에서 되뇌는 줄 착각을 하고 몇십 년 동안 그렇게 공부를 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을까요. 돌이켜 보니 낯이 붉어졌습니다. 결국 제가 공부하거나 책을 읽을 적당한 장소는, 약간의 소음도 민폐가 되는 독서실 혹은 도서관의 열람실이 아니라 백색소음이 주위를 채우는 카페나 커피숍이었던 것입니다.


 회사 근처 커피숍 테라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한라산 정상 부근이 구름으로 덮여있습니다. 하필 오늘따라 비가 부슬부슬 내립니다. 시애틀인 줄 알았습니다. 화창한 날에는 한라산의 장엄함이 눈부시도록 와 닿습니다만 오늘은 그렇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래도 커피 맛은 이런 날이 제 격이지요. 글을 쓰기 시작하며 커피를 마시는 빈도는 잦아지고 위장에는 결코 좋지 않을지라도, 맛에 대한 감별력은 조금씩 높아질 것도 같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제작에 협찬이 있다면 보잘것없는 저의 글에도 협찬처가 있습니다. 보통 협찬과 다르긴 합니다, 커피값을 제가 치르니까요. 그러나 계산해 봅니다. 산과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 카페에서 커피 한잔과 함께 하는 글쓰기는 손님이 가득 들어찬 도심 한복판 커피숍에서의 그것에 비해 얼마나 효율이 높을지, 만약 이런 곳에서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내용은 얼마나 더 부실해졌을지. 뛰어난 작가라면 탓할 수 없는 여건들이 저에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노릇이니 그동안 자리 잡은 제주의 카페들은 커피값을 지불하더라도 그 몇 배, 혹은 몇십 배에 가까운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협찬처임에 틀림없었던 것입니다. 글을 써 내려가다 막힙니다. 고개를 잠시 들면 곧 제주의 환상입니다. 큰 숨을 쉬고 멍청히 바라봅니다. 글감이 떠오릅니다. 다시 고개를 숙이면 될 뿐입니다.


 

 제주에선 한갓 평범한 글쓰기 장소일 뿐입니다

 

 업무 사이에 마시는 믹스커피는 물론이고요, 더운 여름날 점심식사 후 마시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기분이 울적할 때 입술에 닿는 쓰디쓴 에스프레소 등 커피는 다양한 맛으로 변신을 하며 사람들을 달래줍니다. 베를렌과의 이별과 세상에 대한 증오로 나락에 빠져있던 랭보도 결국 에티오피아의 아라비카 커피를 마시며 상처로 가득한 마음에 향기를 불어넣었겠지요, 물론 랭보만큼 아픈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신기할 따름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향긋한 커피 한 잔은 박제화된 일상에서 깨어있는 자아를 소환해 주며, 슬픔과 고독으로 쓰리게 벗겨진 마음을 검게 코팅해주는 마법의 약물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달콤 쌉싸름한 커피 향이 거리에 가득한 시애틀 다운타운이 기억납니다. 글을 써 내려가며 맡고 있는 이 순간의 진한 커피 향과 섞이며 시간과 공간이 오버랩되는 듯합니다.

 고독은 고독대로 안고 싶을 때, 슬픔의 표면을 도포해 버리고 싶을 때 늘 함께 있었던

 두 사람 외에 아무도 허락지 않는 소중하고도 은밀한 자리에서조차 늘 그 사이에 놓였던 

 특권 가득한 물질입니다.


 그것은 커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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