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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Jul 26. 2020

24 글자는 책이 되어  -파주 출판단지 & 지혜의 숲

모든 곳의 어떤 것들







 가계에 부담이 될 정도인데도 가능하면 새 책을 삽니다. 빌려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독립서점에 가서 느낌이 따뜻한 책 한두 권을 사 오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프리미엄 회원에게 만만치 않은 할인 혜택이 주어지는 대형서점의 온라인 매장에서 그간 점찍어 두었던 책들을 한 번에 열 권 정도 주문합니다. 언젠가 독립서점을 차리고 말겠다는 사람의 책 구매방식 치고는 전형적이고 세속적이지요. 다독(多讀)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변명을 해 봅니다. 그래야 책 한 권의 기쁨이라도 더 느껴볼 수 있을 테니까요. 미래에 독립서점을 차린다 해도 많이 사 가시라는 말씀은 벌써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두 권만 사 가시면 황송하겠습니다, 주인장의 관념부터가 이러니 말입니다.   




 훌륭한 공립도서관의 책 대여 시스템이 있음에도 부담스러운 비용을 들여 책을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의 책을 두 번 이상 읽을 필요가 있거나, 그게 뭐였더라... 하며 책 속 정보를 찾아볼 경우가 많고, 두 번째는 책 속 놓치면 안 될 문장에 빨간색 펜으로 진하게 밑줄을 그어놓기 때문이죠. 내용을 다시 찾아볼 땐 빨간 줄 위주로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탐색을 하니 서로 연관이 되는 이유라 해도 좋겠습니다. 책에 밑줄을 긋는 이유야 그 부분이 당연히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책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상상을 뛰어넘을 산고를 통해 세상에 나온 소중한 책 한 권, 저자의 머릿속에 있었을 그 안의 보석 같은 글에 빨간 줄을 치며 '염치 불고하고 감사히 얻어가겠습니다'라고 답하는 의식인 셈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어느 분야의 어떤 책을 읽어왔구나 하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쭉 훑어보며 확인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특정 분야에 지나치게 편식을 했다 싶으면 방향을 당분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런 몇 가지 이유 속 음흉하게 감춰져 있는 하나의 원초적 본능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늘어가는 책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자부심의 가면을 쓰고 있는 허영심인 것입니다. 어느 정도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을지라도 독서의 욕구와 목표를 상향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건 사실이니 인정 아니할 수 없는 새 책 구입의 또 다른 이유입니다.


 새 책을 사면 한바탕 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책을 놓고 고사를 지내는 건 아니고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거쳐야 할 루틴을 반복한다고 하는 게 낫겠습니다. 투자 대비 설렘의 강도는 상당한데요, 그 설렘의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먼저 앞표지를 봅니다. 제목과 부제를 확인하고 저자, 그리고 있다면 역자 이름을 확인한 후 표지의 디자인을 봅니다. 주로 아래쪽에 있는 출판사가 어딘지 살피며 출판사마다 선호하는 북 디자인이 있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이어서 뒤표지입니다. 본문이나 머리말의 일부가 발췌되어 있던지, 추천사들로 채워져 있는 경우가 많지요. 저명한 인사들의 추천사가 잇달아 있으면 괜찮은 책일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목 외에 단순하고 깔끔하게 처리된 표지의 책 중에도 좋은 책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이어서 앞날개 차례입니다. 저자의 프로필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독립서점 이야기를 하며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군요, 간추려야겠습니다. 뒷날개로 시선을 옮겨 이른바 해당 출판사에서 미는 다른 책들의 소개를 받아봅니다, 눈팅이라고 하지요. 목차를 꼼꼼히 살피기 전 마지막 단계는 지금 들고 있는 책의 생산이력 확인입니다. 두꺼운 속지의 바로 다음 장, 즉 제목이 쓰여 있는 부분과 맞닿아 있는 바로 뒤 페이지나 혹은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박혀 있어야 할 정보입니다. 작가, 역자, 발행인 등의 이름, 출판사의 주소나 홈페이지 정보, 그리고 언제 출판된 책이고 지금 보고 있는 것이 1판인지, 개정판의 몇 쇄 인지를 유심히 봅니다. 쓸데없는 편집증 같아 보일지라도 어느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책이고 지금까지 얼마나 개정작업이 있었던 책인가를 알고 나면 내용 파악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련의 정보 중 효과적 독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출판사의 '주소'에 유독 눈길이 가곤 하는데요, 10권의 신간이 있다고 하면 대체로 3 : 3: 2: 2의 비율입니다. 제가 읽었던 책들은 그랬다는 겁니다. 파주 : 마포 :  강남 : 기타 지역의 순입니다. 자의식 깊은 곳,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걸까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도심 한가운데보다는 외곽이 나을 것 같습니다. 책과 더불어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덜 북적이는 공간이 감성 발휘에 제격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곳뿐이겠군요, 경기도 파주로 갑니다. 맛집이 모여있듯이 국내 대표적인 출판사들이 담을 마주하고 들어서 있는 출판단지입니다. 익숙해진 로고와 글씨체들이 가득할 책들의 성지, 파주 출판단지는 어떤 분위기일까요?


깔끔한 전원주택 지구 느낌의 파주 출판단지 모습


 일하고 싶은 욕망을 이야기했습니다만 어디 쉬운 직업이 있을지요. 출판사에 근무하는 것도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거라 믿습니다. 특정한 주제를 관통한 글들의 묶음이 작가에 의해 쓰이고 나서 독자의 손에 한 권의 세련된 책으로 쥐어지기까지는 수많은 과정 - 편집, 교정, 디자인, 각종 문구와 사진의 법적인 권리 확인, 인쇄, 발행 등 - 들을 거쳐야 할 것이고, 작가와의 소통과 교감을 포함한 이 모든 고행의 과정은 오롯이 출판사 직원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정신의 근육을 키워주는 것이 책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걸 만들어 내는 출판사는 마땅히 쾌적하고 건강한  공간에 들어서야 하는 게 아닐까요. 파주 출판단지의 지리적 위치와 환경은 그런 점에서 훌륭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출판사 투어' 같은 상품이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만약 있다면 견학하는 출판사 별로 도서 할인쿠폰 정도는 받고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입맛을 다셔 봅니다. 무작정 달려왔으니 출판사들의 사무실을 습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계획대로 시민들의 칭찬이 자자한 '지혜의 숲'으로 갑니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더 웅장한 느낌입니다.


   지혜의 숲 1관 입구

  지혜의 숲 2관

 

 출판도시문화재단이 만든 독서공간인 이곳은 3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1관은 프로 작가들이나 학자들이 기증한 도서를 전시, 대여하는 공간이고, 2관과 3관은 각 출판사에서 기증한 도서가 벽을 채우고 있습니다. 약 20만 권의 책이 꽂혀있다고 하니 얼마나 방대한 규모입니까. 저 같은 초보 탐방객은 신기한 눈길로 연신 사진 찍는데 정신없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진지한 자세로 책을 고르거나 테이블에 앉아 한눈팔지 않고 삼매에 빠져 있습니다. 한 가지 궁금했던 것은, 검색을 통해 찾은 읽고 싶은 책이 저 거대한 책장의 맨 꼭대기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였습니다. 누군가 긴 사다리를 갖고 와서 직접 꺼내 줄까요? 아니면 같은 책의 여분이 다른 수장고에도 보관되어 있을까요? 눈이 휘둥그레져 알고 싶은 것 투성이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유독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들이 많았습니다.


 "아빠는 그럼 어렸을 때 책 많이 읽었어? 왜 나한테만 읽으라고 해?"


 어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아이들의 질문 중 하나입니다. 엄마 아빠의 실제 독서량이 얼마나 되었건 이곳은 참으로 효과적인 조기교육의 공간인 것이고, 증거로 남겨놓은 온 가족의 책 읽는 사진이 몇 년 후 닥칠지 모를 아이들의 질문 공세에 적절히 대응할 무기가 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파주에 살고 계신 주민들께서는 커다란 혜택을 받으신 듯합니다. 부러웠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장서와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유명 도서관이 자리한 마을의 주민들은 생활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고 하지요. 지혜의 숲 근방에 사는 분들의 삶의 만족도도 만만치 않을 듯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가와 지혜의 전당이 동네에 있으니까요.



 QR코드를 찍으면 개인의 신상정보가 업소에 기록되어 혹시 모를 코로나19의 감염 고리를 추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공항의 사전등록 전용 입구에서는 손바닥을 기기에 대면 항공편 이용자의 정보가 스캔되면서 자동문을 통해 보안검사 단계로 빠르게 진입이 가능합니다. 가까운 미래에는 칩이 인체에 삽입돼 내 몸이 곧 신원확인 수단이 된다고 하지요. 잘 아시듯 각각의 책에도 국제 표준 도서번호인 ISBN(International Standard Book Number)이 인쇄돼 있어 해당 책의 '정체'를 드러내 줍니다. ISBN 번호의 부여는 법으로 정해진 의무가 아닌 세계 출판업계의 암묵적 약속과도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즉, 굳이 ISBN으로 등록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책의 유통과 판매를 위해서는 당연히 등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책들의 뒤표지에 ISBN과 바코드가 인쇄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자 입장에서는 본인의 책이 서지정보 유통시스템에 올라 공식적인 '도서'로서 대중에게 인정받는 셈이 되겠고요, 출판사 입장에서는 시스템 속 고유번호의 등록으로 특정 도서의 판매량과 재고량 등의 추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법적인 의무가 없더라도 업계 스스로 알아서 구축하지 않을 수 없는 시스템입니다.


 13자리의 ISBN

 

 제 가방 속에 있는 책의 ISBN 코드를 찍어봤습니다. 아래에 있는 ISBN이 979-11-6134-050-0이라는 13자리 숫자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석을 해 보면, 먼저 첫 세 자리 979는 국제적으로 도서에 붙는 공통 숫자입니다. 978 혹은 979가 쓰인다고 하지요, ISBN의 '접두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11은 국가 부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책들은 978-89나 979-11로 첫 다섯 자리가 채워집니다. 그러니 두 가지 접두부와 국가 부호가 있는 셈입니다. 다음의 6134 네 자리는 출판사의 고유번호입니다. 부가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뒤따라오는 050은 항목 번호이고 마지막의 0은 확인 숫자입니다. 확인 숫자란 이 번호의 조합이 공식적인 ISBN이 맞다는 것을 맨 뒤에서 보증해 주기 위한 역할을 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위의 번호가 짝퉁(?)이 아님을 증명해 볼까요? ISBN이 abcdefghijklm의 열세 자리 숫자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오류가 없는 번호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a+3b+c+3d+e+3f+g+3h+i+3j+k+3l+m 를 계산했을 때 10의 배수의 답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은 9+(7×3)+9+(1×3)+1+(6×3)+... 의 답이 80이 나오게 되니, 10의 배수라는 요건을 충족했습니다. 곧 서지정보에 제대로 등록된 정상적인 도서가 맞다는 얘기지요. 그럴 리 없겠지만 갖고 계신 책의 ISBN으로 계산해 봤더니 끝자리가 0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글쎄요 '해적판'을 소장하고 계신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직 남았습니다. 이 열세 자리 숫자 모둠에 포함되지 않습니다만 바로 뒤에 이어지는 03300이란 숫자가 보이시나요? '부가기호'라고 합니다. 책의 내용을 짐작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고 다섯 자리의 숫자 중 가장 앞의 자리가 중요합니다. 이 책의 경우는 '0'이지요. 부가기호 맨 앞자리 0은 '교양'도서 임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앞자리가 1일 경우는 '실용'서적, 5는 '학습, 참고서' 등으로 분류된다고 하니 책의 모든 것이 이 숫자 속에 데이터가 되어 담겨 있는 것입니다. 2007년까지 ISBN은 열 자리였는데 그 이후 출판되는 도서부터 열세 자리의 조합과 부가기호를 병기해 한국 표준 도서번호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덧붙여 ISSN(International Standard Serial Number)는 잡지를 비롯한 정기간행물에 부여되는 기호라고 합니다. 잡지를 읽은 기억이 오래되었습니다. 집에 있는 잡지를 꺼내 확인을 해 봐야겠습니다.


가격에서부터 2007년 이전의 책임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10자리의 ISBN입니다


 굳이 삐딱선을 타고 지혜의 숲에 대해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을 끄집어 내보려 합니다. 셀 수 없는 책들이 주위를 둘러싼 웅장한 공간입니다. 유수의 대학 도서관이 뿜어내는 학구적인 아우라가 공간을 따라 순환하고 있습니다. '독서'라는 것의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자기의 내면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책을 숭배하는 성소로서의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높은 천장과 서가가 감시하듯 내려다보는 불안함과 압박감, 상판 하나의 넓이가 어마어마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밖에 없는 독서 공간의 획일화는 '오늘부터 일주일에 한 권 독파!'와 같이 독서와 공부에 대한 다짐을 줄 수는 있어도, 은은한 독서의 여유와 어울리는 공간이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야말로 개인 취향의 차이겠지만 저라면 구석의 작은 의자에 앉아 바깥의 햇살과 빗소리를 잔잔히 감상할 수 있는 커피숍에서의 독서가 훨씬 매력적일 것 같군요. 아무도 없는 것도 어색할 겁니다. 손님 두어 분은 주위에 있어야겠고요,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배경에 커피 한 잔 정도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어야 제격이겠지요. 손에 들린 책이 주파수가 일치하며 나와 공명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얼마 전 글을 보다가 흔한 어감의 차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와 '나한테' 란 명사와 조사의 결합이었는데요, '에게'와 '한테' 의 뜻을 찾아보면 공히 '유정(有情) 체언의 뒤에 붙어, 행위가 미치는 대상임을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유정 체언이라는 것은 감정이 있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결국 사람이나 동물이 되겠습니다. 물론 반려'식물'을 키우고 있고 진정한 동반자의 마음으로 그것을 돌보고 있다면 애정의 대상인 식물도 유정 명사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당혹스럽게도 정의가 같으니 모든 유정 명사 뒤에 구분 없이 이 두 조사를 썼다가는 어색할 때가 많습니다. 뉴스에서 '미국 대통령한테'하는 소리가 들리거나 친한 친구가 '그거 나에게 줘'라고 말하는 경우인데요. 전자는 왠지 가벼워 보이고, 후자는 이상하리만큼 어색하고 불편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한테' 는 구어적 표현이어서 '말'을 할 때 많이 쓰이는 조사라는 것이 이유지만, 그보다는 친밀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쓰게 되는 말이 '한테'라서 일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대통령'한테'는 유아적인 말이 될 수밖에 없겠죠. 이럴 때는 당연히 대통령'에게'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고 자연스러울 겁니다. 친구가 '나에게 줘'라고 나'에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거 나한테 줘!' 해야 '응' 하고 건네줄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오죽할까요. 연인이 상심에 빠져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는 오직 ' 나한테 와' 뿐인 겁니다. 그래야 다가가서 안길 수 있습니다. 모든 걸 품어줄 수 있습니다. 연인들 사이의 '나에게 와'는 있어서는 안 될 말입니다.' 나한테 '가 온도에 맞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라면 말이죠.


 너무도 감탄할 만한 구성과 규모를 자랑하는 지혜의 숲입니다. 단지 책을 읽으러 '나한테 와'가 아닌 '나에게 와'의 느낌이 조금 더 강하다는 게 개인적인 인상이었을 뿐이죠. 하지만 다수의 시민들을 독서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공간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타협을 하자면, '나에게 오라'하고 부르는 지혜의 숲에서 남들에게 뒤지지 않을 독서의 열망을 품어오시고, '나한테 오지 않을래?' 손짓하는 멋들어진 카페나 사사로운 공간에서 그 열망을 찬찬히 풀어가시면 될 일이겠습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글 중 독서와 관련해 와 닿는 문구가 있습니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요즘, 격하게 공감되지 않으신지요. 그렇습니다. 책 읽기는 내 마음대로 목적지를 고르며 떠나는 맞춤여행입니다. 가이드의 횡포가 끼어들 여지가 없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이유가 없죠, 미지의 세상으로 내딛는 여행은 한 페이지씩 넘기는 현장의 독서에 다름 아닙니다. 여행이 오랜 준비와 적지 않은 비용으로 어쩌다 잡을 수 있는 기회라면, 독서는 소박하지만 다양한 관점으로 시대를 불문하고 떠날 수 있는 간편한 일탈이 아닐까요. 지혜의 숲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면서, 앉아서 하는 여행의 값어치가 끝 모르게 높아짐을 실감하게 됩니다.


 김칫국도 이런 김칫국이 없습니다. 손에 잡히고 줄을 긋는 감촉이 좋아 그 물리적 아름다움에 홀딱 반한 터라 나중에 책을 낼 수 있다면 표지는 이런 질감으로 골라야겠다, 겉표지 바로 뒤 속지는 누군가 이름을 쓰거나 서명을 할 수 있으니 검은색은 피해야겠다, 책의 한 행은 25자 안팎이 돼야 읽기가 수월하겠지... 

 편집과 디자인을 벌써부터 신경 쓰고 난리입니다. 지금은 오직 진정성을 지니고 창피하지 않은 글쓰기를 이어가야 하는 단계임에도 말이죠.

 한 글자가 한 단어가 되고, 단어가 모여 한 문장을 이룹니다. 문장은 단락을 이루고 결국 한 권의 책으로 거듭나는 법이니 한 글자, 한 단어를 이어나가면 될 뿐입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한 걸음씩 내딛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그 끝에는 고유의 열세 자리 ISBN이 당당히 찍혀있는 나만의 책을 선물 받을 날도 있지 않을까요.


 도대체 어떤 느낌의 공간일까 그토록 궁금했던 파주 출판단지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이 제 글을 교정해 주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다행스러운 건, 상상만 해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겁니다.

 

 켜켜이 쌓인 종이책들이 내뿜고 있는 향기는 지혜의 숲만의 피톤치드입니다. 떨리는 심정으로 찾은 오늘의 공간은 좌절과 환희를 반복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권의 작품을 완성했을 세상 모든 작가님의 작품 전시장이기도 합니다. 놀이공원에서 폐장 직전까지 놀이기구를 실컷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꼬마처럼, 꽉 들어찬 흐뭇함과 만족감을 전리품처럼 챙기며 숲을 빠져나옵니다. 


 여운이 오래 지속될 듯합니다. 다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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