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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Jul 31. 2020

25 별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영월 별마로 천문대

모든 곳의 어떤 것들








 140억 년 전 한 점에서 빅뱅이 일어나 지금의 우주와 별들이 만들어졌고 대부분 빈 공간으로 보이는 우주는 암흑물질로 채워졌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지구에는 인간들이라는 존재가 생겨나 감히 우주의 기원을 들춰내겠다며 머리를 맞대고 있고, 그들이 궁금해하는 이 우주는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아주 먼 미래에 냉각이 가속화된 우주는 결국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해지겠지만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또 다른 셀 수 없는 다중우주들이 냉정함을 유지하며 각자의 운명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예전 중학교 과학 중에 '물상(物象)'이란 과목이 있었습니다. '무생물 또는 그것들의 성질을 학습의 대상으로 하는 교과목'이니 얼마나 광범위한 내용이 포함되었을까요. 물상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기에 호남형이었던 선생님의 얼굴만 떠오릅니다. 성함도 기억나는군요, 이상철 선생님이었습니다.

국민 교육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이니 각 과목 교과서도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많은 내용들이 수정돼 왔을 텐데요, 내용의 관점이 가장 극적으로 바뀐 교과목이 '역사'라고 한다면 첨삭이 가장 활발했던 과목은 역시 '과학'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일상생활에 정신없어 놀랄 타이밍을 놓치곤 하지만 실생활 구석구석 스며드는 과학의 발전상만큼은 모든 분들이 인정하실 테니까요.

 물상엔 큰 흥미가 없었다 해도 '지구과학'만큼은 끌렸습니다. 당시 지구과학을 좋아한 친구들은 대개 이유가 비슷했습니다. SF영화나 만화를 통해 본 우주와 지구의 비밀에 대한 호기심이었죠. 과목 명은 '지구'과학이지만 우주와 태양계, 혜성 등 지구 바깥 역시 다뤘으니 '천체과학'이라도 불려도 좋았을 뻔했습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져도 하늘과 별과 우주에 대한 동경은 예전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동심을 지키고 있다고 자랑이라도 해야 할 판일까요. 몇 년 전 시골로 이사를 오면서 동심을 되찾기 위해 천체망원경을 마련하고 싶었지만 저지른 일이 워낙 많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 한을 풀기 위해 훨씬 거대한 망원경이 있고 하늘과 한층 더 가까운 곳, 영월에 있는 별마로 천문대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달려갔습니다.


  



 생각보다 가팔랐습니다. 한때 강원도의 산길을 수년간 거침없이 운전하고 다닌 경험이 있어 별 긴장감 없이 운전대를 잡았습니다만 눈, 비가 오는 날이나 한 겨울에는 아주 위험할 수 있는 고갯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르내리는 길 내내 경고 문구들이 많이 보였던 것이 이해가 되더군요.

 강원도 영월 봉래산 정상에 있는 별마로 천문대는 별 + 마루(정상) + 로(恅, 고요할 로)의 합성어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요, 천문대 홈페이지에 있는 입 구(口) 변의 고요할 로는 찾지 못해서 같은 뜻을 가진 마음 심 변인 위 한자를 어렵게 찾아 써넣었습니다. 글쎄요, 굳이 고요하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포털사이트에서도 검색되지 않는 낯선 한자를 꼭 써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저 별이 있는 정상이란 뜻도 좋으니 별마루 천문대라고만 해도 이상한 게 없을 것 같았고, '로'라는 음의 한자를 꼭 붙이고 싶었다면, 별이 있는 정상으로 가는 '길'로 해석할 수 있는 '路'를 쓰거나, 그것도 너무 뻔하다면 별을 볼 수 있는 정상의 '망루'라는 뜻을 가진 '櫓'를 이어 붙인 별마'로' 천문대가 조금은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자의 고수들이 보시면 코웃음 칠 의견일 수도 있겠으니 강하게 밀어붙일 자신은 없음을 고백하는 바입니다.

 

 관측 프로그램의 특성상 사전 인터넷 예매는 필수였고 코로나19 때문에 시간대별 참가자 수도 크게 제한된 상황이었습니다. 여정을 계산해 본 결과 오후 4시 30분 프로그램이 적당할 듯해 예약했는데요, 별 관측보다는 태양 관측과 가상 별자리 강의만 듣겠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장마철이라 기상상황도 좋지 않다는 예보를 봤기 때문에 차라리 밝은 시간에 천문대의 모습이라도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밤하늘 관측은 언제든 다시 도전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천문대 지하의 천체투영실로 가는 길

   천체투영실 내부, 이 장면 뒤로 돔에 밤하늘의 별들이 실제처럼 투영되나 촬영 불가였습니다.


 투영실 내부가 점차 밤하늘로 바뀌어가며 선명한 - 그럴 수밖에 없는 -  별빛들이 머리 위를 채웁니다. 베이스의 멋진 음색을 가진 해설사 분의 설명과 함께 여름철 밤하늘에 나타나는 별자리들을 바라봅니다. 서양에서 유래된 전설을 듣고 있노라면 우리 것이 아닌 믿음을 강요당하는 느낌도 있고, 왜 저런 배치에서 곰이나 전갈이 그려져야 하는지 쉽게 공감이 되진 않습니다. 사실 전갈이 그려진 그림을 빼고 본다면 누가 그 별들의 연결망에서 "틀림없는 전갈 모양이야!" 하고 유추해 낼 수 있을까요? 객관적인 것은 하나 없는 일방적인 별자리의 이름과 모양에 괜한 투정도 부리고 싶습니다만 프톨레마이오스에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에서 뉴턴과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진 그들의 천체에 대한 열정을 고려해서, 별자리 정도 창작해 내는 건 이해하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어떻게든 저작권을 인정해 줍니다. 하지만 이내 대안이 떠오릅니다. 대한민국 사람의 정서라면 한층 멋들어진 스토리를 하늘에서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젠가는 대 국민 설문조사를 통해서라도, 우리나라만의 4계절 별자리를 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상상해 봅니다. 소나무 자리, 흥부와 놀부 자리, 다보탑 자리, 심지어 돌하르방 자리도 멋지게 하늘에서 반짝거릴 수 있지 않을까요?



   4층에 있는 보조 관측실

   4층 주 관측실의 리치크레티앙 반사망원경


 망원경들이 있는 보조 관측실로 올라와 태양계에 관한 짧은 강의를 듣고 이제 끝났겠구나 하는 순간, 


"날이 흐려 관측은 어려우니 대신 지붕을 열어드리겠습니다." 


 해설사께서 버튼을 누릅니다. 크게 놀라운 기술도 아니건만 체험객들의 감탄사로 관측실이 메아리칩니다. 태권브이의 출격 전 갈라지는 천장의 짜릿함이 이런 것일까요. 건너편에 위치한 주 관측실엔 덩치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거대한 망원경이 있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천문대 직원의 관측용이겠지요. 뛰어난 망원경이란 물체를 커다랗게 보여주는 능력이 아니라 빛을 포착해 내는 능력이 탁월한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우주로 마음껏 도약해 직접 장관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아직은 보편적인 경험이 될 수 없으니 앞다퉈 망원경의 성능이라도 높이고 있는 것이겠죠. 다행스럽게도 강원도의 대지에서 바라보는 우주의 모습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낭만적입니다. 하물며 여름밤 시골의 평상이나 잔디에 누워 바라보는 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입니다. 줄거리에 대해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만 관객들이 유독 몰입했던 부분은, 기체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 시간과 공간의 왜곡이 발생한 뒤 매튜 맥커너히가 다중우주 속을 유영하는 장면과 지구와 우주의 시간차로 그가 자신보다 늙어버린 딸을 재회하는 후반부가 아닐까 합니다. 우주를 무대로 하는 영화에서 한결같이 다루는 원리이긴 하지만 그때마다 신기해 미치겠는 것이 우주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과 블랙홀처럼 중력이 한계에 달할 정도로 큰 지점에선 시간과 공간이 모두 빨려 들어간다는 사실일 텐데요, 이 우주는 절대로 지구와 그곳에 사는 지구인들 위주로 관측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만이 진실이라 하겠습니다.

 다중우주 단계까지 나아가자면 양자역학의 깊은 곳까지 들춰내야 할 일이겠습니다만 매튜 맥커너히가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며 딸과 재회하게 되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만으로도 의심의 여지없이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상대성이론을 다룬 책들을 쌓아놓으면 달까지 도달한다고 하죠. 그만큼 다양한 저자의 무수한 저서가 존재하지만 전문가를 대상으로 하는 책들과 '과. 알. 못.'을 주 독자층으로 하는 책은 난이도가 당연히 다를 텐데요, 가장 어려운 일은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는 만큼 일반교양과학서로서는 쉬운 책이 곧 좋은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간의 왜곡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림에서는 트럭이 나와있습니다만 사실은 거의 빛의 속도에 가까운 우주비행선 정도는 돼야 시간 왜곡의 결과가 뚜렷하게 나오겠지요. 그러니 저 트럭을 우주선이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상대성(Relativity)'이란 말은 왜 붙여진 것일까요? 무엇이 상대적인 것인지요. 

 신호등 주위에 서 있는 상태에서 100km로 과속을 하는 차를 바라보면 그야말로 100km의 속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만 나 자신이 80km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상황에서 내 옆을 추월하는 100km의 과속차량은 불과 시속 20km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겠고, 반대방향으로 80km 속도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면 건너편의 100km 차량은 무려 180km의 속도로 폭주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관측하는 주체의 속력이나 운동방향에 따라 관측되는 대상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다른데, 그 원리를 자세히 밝혀내기 위한 이론이 바로 '상대성'이론인 것입니다. 물론 흐른 시간의 차이에 따라 이동한 공간의 범위도 달라질 테니 결국은 공간의 상대성도 포함이 된 것이겠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지면에 있는 관찰자'에 집중하겠습니다. 이 관찰자를 A라고 할 때, A가 공을 위로 던져 다시 받는 시간이 2초라고 해 보겠습니다. 그 정도면 한 4미터쯤 위로 던졌다가 받는 셈일까요? 어쨌든 이 관찰자는 본인이 던진 공이 똑바로 위로 올라갔다가 역시 직선에 가깝게 내려온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을 겁니다. 옆에 서 있는 다른 사람이 관찰해도 그렇게 보이겠죠. 그러나 트럭보다 훨씬 빠른 우주선을 타고 이동 중인 B가 똑같이 공을 위로 약 4미터를 던진다면 B 본인은 공이 2초간 직선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온다고 느낄지 몰라도, 지상의 관찰자 A에게는 그 공의 동선이 위의 그림처럼 포물선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주선의 속도가 빛에 가깝다면 2초라는 시간에 선체의 이동거리는 어마어마할 것이고 - 거의 60만 km를 이동했겠습니다 - 따라서 B가 공을 던지는 순간 A가 봤던 공은 까마득한 저 멀리서 다시 B의 손으로 떨어질 테니 공의 궤적은 포물선 중에도 지극히 완만한 포물선이 될 것입니다. 즉 A가 2초라는 짧은 시간에 공을 던지고 받는 하나의 연속동작을 했다면, A가 보는 B는 그 2초의 시간이 한없이 늘어진 포물선처럼 부풀려져서 길고도 긴 방학처럼 인식될 거라는 거죠. 지구 밖에 있는 우주인에게 시간은 이처럼 느리게 흐르게 되니 매튜 매커너히가 귀환했어도 여전히 젊은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비록 단면을 일별한 것에 불과하지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의 핵심은 이렇듯 어렵지 않게 파악이 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끝없이 펼쳐진 우주의 시공간은 왜곡과 변형으로 가득하다는, 즉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상대성 이론은 지구라는 한 점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한계를 지니며 살아가고 있는 작은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故) 조경철 박사님


 아무리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번뜩임감탄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이 분 이상의 우주대스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천문, 기상학자로 2010년에 별세하신 조경철 박사님이지요. 아직은 맑은 심성을 유지했던 7,80년대 꼬마와 청소년들로 하여금 넓은 세상을 동경하게 만들어 준 영웅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렵기만 한 듯한 하늘 위의 비밀을 TV 속에서 풀어내며 꿈을 가지라고 하신 덕담으로부터 유능한 우리나라의 천문학자들이 잉태되지 않았을까요. 이젠 과학은 물론이고 역사, 문학 등 다방면의 교양을 각종 매체에서 일반 대중에게 알리는데 활약이 지대한 분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중엔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끌고 있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대중의 습관이 쌓여 만들어지는 문화체계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는 신성한 역할을 담당한 분들이어서 영 고마운 게 아닙니다. <알쓸신잡>이 그때에도 있었다면 가장 먼저 출연 섭외가 들어갔을 과학자, 우리의 조경철 박사님입니다.




 뛰어난 과학자들의 유산을 간접 체험하더라도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은 세상 모든 것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답변이 인간 궁극의 숙제가 아닐까요. 과학을 넘어 종교와 철학이 그 답을 찾으려 기원전부터 고뇌와 사색을 종횡해 왔습니다만 정답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리석은 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 너머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지를 넘어서 도대체 이 광활한 우주 공간은 왜 존재하는 것인지, 인간의 입장에서 그토록 혹독한 우주의 환경 속에 왜 하필 지구라는 행성이 탄생해 왜 이렇듯 생명이 살아가기 안성맞춤인 환경이 만들어졌는지, 거기서 태어난 생명이 진화해 만들어진 우리는 무슨 연유로 사고능력이 발달해 이 모든 것들을 고민할 수 있는 것인지, 뫼비우스의 띠 마냥 돌고 돌아도 끝이 없는 의문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모든 것이 그리 필요치 않은 고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당한 대기와 물이 흐르는 지구가 만들어진 건 극히 희박한 확률이 어쨌든 조합을 이뤄 그렇게 된 것이고 너무도 신기한 인간의 탄생 역시 우주와 지구가 여러 원소들을 기막히게 뒤섞어 가능해진 것일 테니,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희박한 확률을 뚫고 나와버린 뒤의 결과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도 놀랍지 않은 일입니다. 놀랍다는 걸 감지하는 주체가 '나'라는 형태로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있는 것보다 없을 확률이 지극히 높았지만, 우리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 희박했던 확률은 벌써 100퍼센트가 돼 버린 것입니다.




 프로그램 시작을 기다리며 4층 야외 공간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데,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빨간 무언가가 갑자기 시야에 들어옵니다. 천문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체험장에서 도움닫기를 하며 둥실 날아오르는 체험객들의 패러글라이딩이었던 것입니다. 어쩐지 봉래산을 올라가기 전 시내에서 높이 떠 가는 패러글라이더들이 연달아 목격되더라니, 그들의 출발지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국내에도 수많은 곳에 패러글라이딩 명소가 있겠지만 경치만큼은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강원도의 웅장한 산맥과 대지를 가르며 나아가는 동강이 눈 아래 기가 막히게 펼쳐질 테니까요.


 높은 곳에 올라 우리가 사는 곳을 바라보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겁 없이 하고 싶은 것을 왜 마음껏 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살았는지 자연스레 상념에 빠지게 됩니다.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다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실제로 우주 한복판에 떠 있기 전에는 함부로 예상하기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억지로라도 상상해 봅니다. 혹시 압니까, 목숨이 다하기 전에 우주여행에 당첨이라도 될지.


 우주선에 탑승해 본 극히 일부의 인류가 그렇게 느꼈듯 푸른 구슬의 지구를 목도하고 넋이 빠집니다. 오염된 대기와 그로 인한 지구 온난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하지만, 적어도 우주공간에서 바라보는 지구별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봅니다. 위성인 달을 제외하곤 반짝이는 별들이 생각보다도 작습니다. 저 아래 지구의 대기권에서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창가에 보이던 자동차의 반짝거림 정도라고 해도 되겠군요. 지구를 감상할 수 있는 이곳까지 오는데 수백만 년이라는 인류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구를 벗어난 태양계를, 태양계를 넘어선 은하계를 직접 관측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흘러야 할까요. 

 이 정도에서 만족하려 합니다. 광대한 우주의 베일을 벗기는 일은 후손들에게 넘겨주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소의 털 보다도 수억 배 많을 우주공간의 별들 중에도 지구별의 푸른 설렘을 줄 수 있는 행성은 흔치 않을 거라는 것은, 미래가 아닌 지금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확률 계산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주의 한 구석, 둥실 떠 있는 지구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다고 말해버리면 될 일입니다. 태양 크기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이 작디작은 행성 위에 두 발을 붙이고 서서 외롭고 힘들게도 살아왔지만 가슴 벅찬 사랑과 셀렘의 시간도 보냈습니다.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로 잠시 머물다 떠나게 되어도, 그 모든 감정을 통렬하고 벅차게 느낄 수 있게 해 준 무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지구인입니다.


 


 우주도 다른 어떤 것의 티끌일 수 있듯이

 나 역시 우주 그 자체입니다.

 내 안에도 티끌이 있습니다.

 그 티끌도 우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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