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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Aug 05. 2020

26 응답하라 1997 -태백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여보세요? 아 네 부장님, 안녕하세요?"

 

 "네? 강릉으로 가라고요?"


 " 왜 갑자기...?"


 "... 네, 일단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웠습니다, 당장 다음 주에 강릉으로 가야 한다니요. 동기들, 선배들과 더불어 충분히 설레는 신입시절을 만끽하고 있는 중인데 느닷없는 발령이라니, 바다가 아름다운 멋진 도시로 가게 된다는 설렘도 없지 않았지만 당황스러움이  먼저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 강원도에는 춘천방송총국을 포함해 무려 6개의 지역국이 있었으니 빈번한 발령은 어쩔 수 없는 일이도 했습니다.


 저는 KBS 아나운서입니다. 그저 그런, 지역의 아나운서입니다. 겸손이 아니라 실제가 그저 그렇습니다. 요즘은 지역에도 뛰어난 실력과 출중한 외모로 활약하는 후배들이 수두룩하지만, 지방에 가서 TV를 틀면 어쩌다 나오는 적당히 나이 들고 촌스런 아나운서, 제가 딱 그렇다는 소리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입사 후 이십몇 년이 지난 지금 비교적 바쁘게 TV와 라디오 스튜디오를 뛰어다니는 편입니다. 하긴 서울 본사에 비해 인력 상황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국에선 나이가 들어 시청자들께서 지겹다 하시더라도 뻔뻔히 얼굴을 내밀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요.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덕분에 다음 개편 때 혹시 일이 줄어들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해 보지 않았으니 일이 없어 문제인 세상, 오히려 커다란 장점일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 비하할 의도는 없습니다. 나름 누구와 비교해도 크게 뒤쳐질 것 없이 자신 있는 분야가 있습니다만 지역에선 이것저것 입맛에 맞는 특정 분야를 선택해 집중할 여유가 없으니까요. 크게 이루어 놓은 것 없는 어른이 즐겨하는 변명이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내 체질에 맞는 방송만 쭉 할 수 있었으면 틀림없이 잘 나갔을 거라고!"


 "그럼, 맞아! 너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술 마시며 일 이야기하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한때는 친구들을 앞에 놓고 아재다운 한탄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고맙게도 그걸 받아주는 친구들이란... 어떻게 저는 이렇듯 착한 녀석들만 알게 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한탄과 증명할 수 없는 뒤늦은 자신감이 아주 쓸데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가상의 현실을 술안주 삼아 훌훌 풀어버리고 난 이튿날이면 눈앞에 주어진 현실에 집중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말은 이렇게 해도 그간의 모든 경험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만약'이란 조건이 붙어 잘 안 나갔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는지요.

   


탄현에 있는 SBS 일산 제작센터


 며칠 전 SBS 방송아카데미 시절 동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랜만에 동기들과 만난 자리에서 제 이야기가 나왔다면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문자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1기 아나운서 과정은 남자가 여섯, 여자가 30여 명 이상이었으니 처음 겪어보는 여초(女超)의 공간이었습니다. 대부분 여자 수강생의 나이가 남자보다 어렸던 탓에 태어나 '오빠'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시절도 있었다니요. 시간이 흘러 TV에서 지금까지도 반가운 모습을 보여주는 동기들도 있지만 그 외에는 무얼 하고들 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방송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 않더라도 남들 앞에서 뻔뻔해지는 교육을 공히 받았으니, 다들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


 방송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신분을 갖기 전에는 대기업의 사원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회사생활이 시작돼, 학생에서 직장인으로의 혁명적 신분 변화를 간신히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죽겠더군요, 사내 분위기에도 익숙해져야 했지만 상대해야 할 거래처 사장님들이 평균 50대니 세월이 쌓아온 능수능란함을 어떻게 받아칠 수 있었겠습니까. 입사 초기 정장 차림의 출근길이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앞이 막막했습니다. 너무 방탕하게 살아왔던 탓인지 을지로입구 한 건물 안의 똑같은 일상이 앞으로 수십 년간 계속될 거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배부른 소리라는 걸. 그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평생 더불어 일하지 못하게 될 운명의 사회 부적응자가 아닌지, 눈앞은 안개로 가득했습니다. 

 어느 날 출근길, 회사로 가지 않고 친했던 친구가 살고 있는 대구로 가버렸습니다. 정장 차림으로 들이닥친 절 보며 어느 정도는 짐작했다는 듯이 녀석은 군소리 없이 사흘 내내 저의 술친구 노릇을 해 주었습니다. 가끔은 백수인 친구가 있다는 것이 좋을 때도 있더군요. 가면 언제든 맞아주고 부르면 언제든 와 줄 수 있는 친구였습니다. 무단결근 사흘째, TV 하단 자막으로 SBS 방송아카데미 1기 수강생 모집공고가 났고, 친구가 슬쩍 운을 띄웠습니다. 


"니 저거 함 해봐라, 괘안을 거 같은데?' 


 운명의 신이 친구의 입을 빌려 미래를 점지해 준 것일까요. 사실은 저도 자막이 나가는 동안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 두 눈동자를 좌우로 이동시키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이란 대나무에 하나의 굵은 마디가 생길 징조였습니다. 


 대학교 때 교내에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4학년 2학기부터 MBC 방송 아카데미 아나운서 과정에 다니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뭐하는 곳인지 물어봤더니 방송사 시험에 통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원인데 입학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공중파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의 권위는 상당했습니다. 축하한다고 말해줬습니다. 아무튼 이제 성실히 다니기만 하면 TV에 나오는 아나운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몇 달이 지난 후 저는 회사원이 되었고 그녀는 아카데미 학원생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아카데미가 끝날 시간에 맞춰 픽업을 하려고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막 야외 촬영을 하고 돌아오는 듯한 여자친구가 보였습니다. 커다란 차에서 내려 PD, 카메라 과정의 수강생들과 장비를 들고 아카데미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아직 방송국 취업도 하지 않은 아마추어들이지만 각자의 분명한 꿈을 찾고 기꺼이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부러울 데가 있을까요.

 여자친구와는 얼마 후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날 스태프들과 만면에 웃음을 띄며 걸어가던 순간만큼은 지워지지 않을 인상이 되어 기억에 또렷이 새겨졌습니다. 방송이란 일은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중독된다고들 하는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예감도 말이죠.    

 그러니 그녀에게도, 그날 주차를 했던 그 자리에도 고마워해야 할 따름이겠습니다. 자막에 나가는 아카데미 수강생 모집이란 것이 어떤 사람들을 뽑는 것이고 그곳에선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알게 해 주었으니까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나운서를 꿈꿔온 사람들에 비하면 말이 안 될 정도로 급작스런 결정이었지만, 결정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서 장래희망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남의 것이라 바라만 보았던 설렘이 이젠 제 것이 되었습니다. 뚜렷한 과녁이 저 앞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대기업의 신분증보다 아카데미 수강생의 명찰이 더 자랑스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과녁에 집중하고 힘차게 달려갔던 약속의 공간을 20년이 지나서야 찾아봅니다. 방송 아카데미가 있었던 경기도 탄현의 제작센터 앞에서 건물을 바라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군요. 아직도 익숙한 공간들이 선명히 그려지는데 그때의 명찰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기웃거리기만 할 뿐 들어가 볼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추억 때문에 왔는데 들여보내 주실래요 식의 요청은 상상만 해도 손발이 오글거려 결국 하지 못했습니다. 길 건너에서 경비 아저씨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기억의 단편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는 수밖에요. 무엇보다 수상한 몸짓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제작센터의 사진을 찍어댔으니 방송국 테러범이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영월에서 태백으로 가는 국도변


 별마로 천문대를 내려와 태백으로 가는 코스는, 신입 시절 서울에 살면서 제천과 영월을 거쳐 들어가는 길과 달랐습니다. 천문대 출발 후 얼마 간은 동강을 끼고 달리는 환상적인 코스였지만 내비게이션은 그간 확장된 38번 국도를 따라 달려야 하는 경로를 안내했습니다. 다음에 태백을 올 때는 영월에서 상동을 거쳐 태백으로 들어가는 31번 국도를 무조건 타야 겠습니다. 태백이란 도시의 이미지는 저에게 있어 영월에서 태백으로 향하는 길 중 오직 그 길이어야만 완성됩니다. 수천 번도 더 들었을 그때의 음악과 31번 국도변의 풍경은 하나로 모아져 성인이 된 후 덤으로 부여받은 또 하나의 고향, 태백의 그리움을 증폭시킵니다.   


 얼마나 방송계에 무지했는지, 아카데미에서 공채를 준비할 때조차 각 지역에 아나운서가 따로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였습니다. 아나운서를 하겠다는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무식할 수 있었는지요. 유독 그 해에 KBS가 지역에서 근무할 아나운서를 많이 뽑는다는 정보가 있었고, 근무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주저 없이 '강원권'을 선택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리울 때마다 찾던 동해가 있는 곳이니까요. 기쁘게도 합격을 했지만 첫 근무지는 기대와는 천양지차였습니다, 해발 680미터 산골로 발령이 날 줄은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고원의 도시 '태백'이었습니다. 태백이라면 의심할 여지없이 강원도에 속해 있으니 할 말은 없었습니다. 영월로 발령 난 동기를 먼저 내려준 뒤 한참을 더 내달려 태백의 경계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폐광의 상흔이 곳곳에 배어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는 딴판으로, 적어도 시의 중심은 당당한 'city'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10층 이상의 높은 아파트 단지도 보였고요, 방송국 건물도 꽤 늠름했습니다. 당시의 영월 KBS는 지금 <라디오 박물관>이 되어 깔끔히 단장된 모습이지만 그때는 허름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태백 KBS의 자태는 그에 비하면 '위풍당당'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신입사원의 의지는 충만했습니다.


  지금은 라디오 박물관이 된 옛 영월 KBS

                          철거되기 전 태백 KBS


 꽤 많은 수의 신입사원을 뽑은 덕에 운 좋게 들어온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각 직종의 동기들은 태백이라는 고원도시에 대한 낯가림 없이 그야말로 열심히 뛰고, 찍고, 만들었습니다. 광부 매몰사고가 났을 때는 새벽에 조명을 들고 다 같이 탄광으로 달려갔고, 퇴근 후에는 전국 최고의 품질과 가성비를 자랑하는 태백의 '실비집'에 모여 고기를 구웠습니다. 덥지 않고 모기가 없는 한여름엔 최고의 피서지에 살고 있음을 감사했고, 6개월간 이어지는 태백의 겨울은 별빛이 지척인 데다 모든 것이 하얗게 덮인 동화의 나라임을 실감했습니다.

 물론 낭만적인 고원의 도시를 탐닉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과거 지나가는 개들 조차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석탄산업의 중흥기를 경험했던 이 도시는, 시내 한복판을 제외하면 지역 생명산업 몰락의 증거가 곳곳에 드러나 있었으니까요.

 촬영보조로 허물없이 지냈던 후배는 늦둥이였습니다.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후배의 형님은 오랜 시간 탄광에서 일을 하시다 진폐증으로 심한 고생을 하고 계셨습니다.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탄광산업의 아픈 후유증이었던 것입니다. 워낙 친했던 덕에 언제든 찾아가도 모든 가족들이 저를 반갑게 맞아주셨는데요, 후배의 집에 갈 때마다 이불속에 누워서 왔냐고 인사를 하시던 형님에 대한 기억은, 죽을힘을 다해 한 시대의 영화(榮華)를 이끌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쓰러져 버린 희생의 전형으로 남아있습니다.


루르드의 샘물과  대성당을 찾는 순례객들



 어느 날 베르나데트라는 14살 소녀는 프랑스 남부 루르드 강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근처의 동굴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환한 빛과 소리가 비롯된 곳으로 가 보니 놀랍게도 그곳엔 성모 마리아가 있었는데요, 마을 사람들에게 마리아를 만났다는 목격담을 전했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그러나 계속해서 그녀 앞에 현현하는 성모 마리아를 보며 베르나데트는 강력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나타나는 동굴의 바위틈에서 나오는 샘물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었는데요. 당시의 주교는 여러 증거들을 바탕으로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그 후 이 기적의 도시는 치유의 명소로 거듭났습니다. 지금까지 신비의 샘물을 마시고 7천 명에 가까운 난치, 불치병 환자가 병을 고쳤다고 하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평생을 수녀로서 이타적인 삶을 살다 1879년 숨을 거둔 베르나데트의 시신이 지금까지도 썩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두고 사기라 주장하는 의견이 거세지자 성당 측에서는 실제 검시를 했다고 하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실제 사람의 시신으로 판명이 됐던 것입니다. 진공상태였던 관 속 환경 때문이라는 등 설이 분분합니다만 진실은 성모 마리아만이 알고 있지 않을까요.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바로 그곳에 지금도 마리아상이 서 있고, 그 아래를 흐르는 샘물의 주위는 많은 순례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신통하고 신성한 도시의 유명세는 날로 높아져 루르드 대성당 광장에는 전 세게에서 모인 환우들과 신자들이 심신의 치유를 기원하며 매일 오후 행렬을 이뤄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의식을 치르고 샘물을 마신 많은 환자들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나, 샘물에 들어있는 성분보다는 믿음의 힘이 건강한 세포를 증식시킨 효과가 더 컸던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고관절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유통기한이 가까워지는 자연스러운 이유겠지만 언제 상태가 악화될지 모르는 몸뚱아리입니다. 부지런히 용돈을 모아 언제든 루르드로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아야겠습니다


 절박하고도 짜릿했던 나날들, 태백과 그 인근에서 목숨을 담보로 캐내어진 석탄은 대한민국 전체를 비추고 덥혔습니다. 검은 지옥, 갱도에서 불꽃의 심장을 꺼내온 역전의 광부들은 잠깐이나마 희열의 시대를 살았지만 후유증은 이를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산업의 쇠퇴는 둘째 치고, 매몰사고라는 청천벽력을 겪거나 불꽃의 찌꺼기인 죽음의 가루들을 몸속에 쌓아가며 시나브로 스러져 갔습니다. 기적의 성모 마리아는 바로 이 산자락에 나타났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새롭게 만들어지는 겉모습으로 도시는 아픔을 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산골에 깃들인 아픔의 흔적은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이곳에 루르드의 샘물까지는 아니더라도 힘든 기억과 고통스러운 신체를 치유해 줄 수 있는 특화된 공간이 들어선다면 꽤나 상징성이 있지 않을까요. 

 힘들었던 과거를 비추고 따뜻하게 만들었던 석탄은 이미 우리에게 루르드의 샘물이었습니다. 강원도의 기운이 어느 곳보다 뭉쳐진 이곳이, 이제는 다른 의미의 루르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태백 KBS가 있었던 자리, 공사가 한창입니다

  황지 자유시장 옆에 세워진 태백방송센터


 큼지막한 체육관도 갖추고 있어 태백시내 학교들과 단체들의 행사 장소로도 이용됐던 방송국 청사가 사라지면서 송출 등, 기본적인 기능만을 갖춘 방송센터가 시내의 한 작은 건물 안에 들어섰습니다. 청사가 있던 자리는 대기업에서 시공하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입니다. 이곳에 입주하실 분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한번 내리면 1미터에 육박하는 눈이 쌓이는 태백시내에서 가장 가파른 오르막길을 끼고 있는 곳이니까요. 눈이 쌓인 다음 날, 아침 뉴스를 위해 아이젠을 신발에 차고 두 손과 두 발을 다 사용해 언덕을 기어 올라 출근했다면 믿으실는지요.


 시간이 갈수록 바뀌는 것이 있습니다. 일출보다는 일몰이 좋아지고, 떠들썩함 보다는 차분함이 편해집니다. 무언가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오는 것들에 더 신경이 쓰이고, 흥하는 것에 대한 동경보다 쇠하는 것에 대한 연민이 더욱 깊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첫 발령지로서의 설레었던 느낌은 조금씩 애잔한 감정으로 변해가는 중입니다. 아니, 그렇게 변해버렸습니다. 겁 없이 달려들었던 기억의 단면들이 회색의 프레임 속으로 하나씩 재단되어 가슴속에 단단히 박히고 있습니다.


  황지연못 입구 부근


 태백시내 한복판에 있는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연못입니다. 낙동강 뿐입니까, 이곳에서 20분 거리에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도 위치해 있으니 태백은 명실상부, 근원의 도시임에 틀림없습니다.

 황지동을 다시 찾은 것이 7월입니다. 장마철이라고는 하지만 여름이지요. 해발 680미터 안내 조형물에 표시된 기온이 보이시나요? 네, 16도입니다. 지구 온난화가 그간 이 산골에까지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속에 있는 태백의 여름은 최고로 더워봤자 27도 정도이고 열대야란 것은 경험할리 만무하며, 따라서 시내에 있는 가전사 대리점에는 선풍기는 있을지언정 에어컨은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처음 여의도에서 김병찬 선배와 방송했던 내용이 '시원한 태백의 여름'이었습니다. 이런 과거를 깡그리 잊고 반소매를 입고 돌아다니다니... 망각의 동물이 된 벌칙은 온몸에 돋아난 소름과 코로나 시대에 주위를 위협하는 재채기였습니다. 여름 태백행의 필수품은 점퍼 혹은 후드 티셔츠입니다. 잊지 마시길.


 그놈의 역마살의 시초가 됐던 곳입니다. '태백'이란 어감이 어떠신지요? 도시 이름의 느낌에 대해 민감한 편이긴 합니다만 유독 '태. 백.'의 감각은 쨍하니 맑고 순수하면서도 확실합니다. 실제 태백산의 위치가 어디였나 하는 한민족의 출발점 개념은 접어두고라도, 입을 크게 벌려야 하는 '태'와 투명하고도 주저함 없이 입술이 닫히는 '백'은 이 고원의 도시를 드러내는 너무도 잘 지어진 이름이지요. 찌든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크게 빛날 '太白'입니다. 영원히 기억될 감정의 고향이자 번민이 치유되는 루르드의 샘입니다. 강원도의 깊은 산속에 홀로 놓여있는 육지 속의 섬과도 같습니다. 주말마다 훌쩍 떠나 쉽게 들렀다 올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소중한 곳은 쉽게 갈 수 없어야 합니다. 감춰져 있어야 합니다. 소중함을 쉽게 저버리는 인간들에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이란 금세 닳아 없어지는 달콤한 사탕과도 같습니다. 

 태백은 사탕 같은 공간이 아닙니다.



 "언제 올 수 있냐고요? 아, 주말 동안 정리하고 바로 가겠습니다."


 "이사요? 뭐 집주인에게 얘기하고 짐 빼면 바로 될 겁니다."


 "예, 방송 열심히 할 각오돼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태백 어땠냐고요?"

   ..........



 "최고였습니다. 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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