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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Aug 10. 2020

27 이것이나 저것이나 -한계령 휴게소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살아가다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진로의 결정이나 생과 사를 넘나들 수 있는 납덩이같은 선택은 논외로 하더라도,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그 선택의 괴로움을 항상 겪게 되는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고속도로나 국도를 달리다 마주치는 '휴게소'라는 공간이지요. 심히 동의하실 거라 믿습니다.

 평소라면 길거리에서 무심히 지나쳤을 핫바와 떡볶이, 호두과자와 핫도그, 소떡소떡, 그리고 회오리 감자에 이르기까지 위풍당당한 간식 군단이 "나를 선택해주오!" 하며 휴게소 전면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고, 실내에 있는 식당에선 돈가스냐 김치찌개냐, 그거도 아니면 떡라면이냐 하는 갈등의 진동을 감수해야 합니다.

 무엇이 휴게소의 음식을,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휴게소의 시간을 이리도 아깝고 귀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여행길의 설렘이라는 답이 가장 그럴듯하면서도 타당해 보이지만 생계를 위해 고속도로를 오가는 사람도 있을 테니 꼭 들어맞는 이유는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여행 중이던 단순한 이동 중이던 시내보다는 고속의 장거리 운전을 요하는 여정이라는 상황과 더불어 도로 위에서 갖게 되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식욕을 더욱 자극하는 촉매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푹 쉬다 가면 좋으련만,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허겁지겁 요기를 한 후엔 재빠르게 차에 올라탑니다. 목적지까지 서둘러 가고픈 마음에 휴게소에서의 시간은 귀함에도 바쁘고 잘게 쪼개지기 마련입니다.


 제주에 살아서 받는 혜택은 불편함보다 훨씬 많습니다. 육지에 다리와 바퀴로는 갈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제주라서 아쉬운 점이라곤 이런 것들 뿐입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정취를 즐길 수 없다는 것 정도?


    가평 휴게소 내부


 얼핏 보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칸막이는 투명합니다. 연인과 옆자리에 앉아 바에서 칵테일을 즐기듯 식사를 하기도 어색하고요, 평소처럼 마주 보고 앉아도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칸막이 탓에 괴상한 거리감이 느껴질 듯합니다, 이건 뭐 큰 집에 면회 온 것도 아니고 말이죠. 코로나19의 그림자는 떠들썩한 휴게소 공간의 분위기까지 바꿔놓았습니다.

 이 시대의 쾌적한 휴게소들은 번뜩이는 재치마저 갖췄습니다. 계산하는 곳 위에 보이는 이 푸드코트의 이름, 'FOR:REST'입니다. 숲과 산이 많아지는 강원도와 가까운 휴게소이니 그저 'Forest'라고만 작명을 했어도 무리가 없었을 텐데, '휴식을 위해서(쉬었다 가세요)' 란 뜻을 중첩해 버립니다. 그야말로 여행자들에게는 'Forest for rest'에 다름 아니겠습니다. 


 휴게소 하면 떠오르는 기억의 유형은 대개 비슷할 것도 같습니다. 잊지 못할 여행 중의 파편이겠죠. 그러니 그 유형들을 차별화하는 것은 오직 동반자에 대한 각자의 추억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나시죠? 버스 기사님이 돌아오라고 했던 시간이 다 됐는데 이제야 감자를 주문하고 있는 느려 터진 친구 녀석, 평소와는 다르게 군것질 거리를 잔뜩 사 주시는, 유독 휴가 때 마음까지 넉넉해지곤 했던 우리 엄마 아빠.

 제 기억 속 휴게소에는 서태지의 노래와 함께 강원도의 고갯길을 같이 넘던 대학교 동기들이 앉아있습니다.


   한계령 휴게소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초대형 휴게소, 심지어 육교 역할을 하는 신개념 휴게소도 등장한 지 오래지만 저에게 여행의 확실한 일부분으로 기억되는 곳은 바로 한계령 휴게소입니다. 서울에서 설악, 홍천을 지나 인제와 원통을 거쳐 양양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국도의 풍경을 끌어안고 달리다 보면 무엇인지 모를 알싸한 기운이 온몸을 가득 채웁니다. 굽은 길을 돌 때마다 어깨들이 부딪히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벅찬 가슴으로 강원도의 핵심을 뚫고 나아갑니다. 속초 앞바다를 영접하기 전 잠시 발길을 내려놓은 한계령 휴게소의 모습은 든든한 산장지기 그 자체입니다. 주차장에 내린 친구들은 일단 큰 숨부터 들이쉽니다. 서울 촌놈들이니 그 산속의 공기가 얼마나 달콤했을까요.

 한계령 휴게소는 적어도 제가 갈 때마다는 안개로 자욱합니다. 처음 몇 번은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뿌연 모습에 애가 탔지만 이제는 그것이 한계령다운 날씨라 믿게 되었으니까요. 이번에는 아예 작정하고 안개 낀 휴게소의 모습을 기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바람대로 그곳은, 늘 그랬듯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신령한 연기가 피어오른 연후에야 산신령이 등장하듯, 한계령 휴게소의 이미지는 구름과 뒤섞인 안개가 가득해야 완성되는 법입니다.  

반복되는 CD플레이어의 재생으로 완벽히 외워버린 서태지와 아이들 2집 앨범의 모든 노래가 귀에서 웅웅 거릴 지경이지만 한계령 휴게소에 발을 내디디면 그 순간 가요의 역사는 다시 역주행입니다. 

 

 양희은 님의 진공을 가르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감아 돌며 흐릅니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1984년 시인과 촌장의 곡으로 탄생했지만, 1년 후 양희은의 <찔레꽃> 음반에 수록된 뒤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문인들이 유독 사랑하는 노래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될 듯합니다. 한계령에 서서 <한계령>을 듣노라면 누군들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역주행이라고 했습니다만 친구들과 한계령을 넘던 때도 90년대 중반이니 그 당시 양희은 님의 <한계령>은 그리 탑골스럽지 않은 '약간 흘러갔을 뿐인' 노래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친구 녀석들, 말이 없어집니다. 사춘기가 20대 중반에 온 건지 아니면 학생 신분의 끝자락에서 불투명한 미래가 못 미더웠던 건지, 센치해진 표정으로 멍하니 안개 너머 있을 숨겨진 풍경을 바라볼 뿐입니다.



 속초에서 출발해 한계령을 오르려니 오색약수와 오색온천을 지나게 됩니다. 휴게소의 초입에 '백두대간 오색령'이라는 표석이 떡하니 서 있는 것도, '오색'이라는 이름을 가진 명소들이 지근거리에 있어서 그런가 싶었습니다. 한계령의 별명인 듯도 했고요.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휴게소 주차장 한 켠에는 별도의 표지주(柱)가 서 있었습니다. 


 


 오색령, 한계령... 

 맑디맑은 탄산수가 떠오르는, 이름부터 낭만적인 '오색령'과 차가운 시냇물(寒溪)의 쨍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한계령'. 둘 다 버리기 아까운 이름이기에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취사선택하면 될 일이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스멀스멀 호기심이 밀려옵니다. 인터넷과 지명을 다루는 책들을 찾아보니 시원하게 궁금증이 풀리는군요.


 나라와 나라의 영토분쟁도 경계가 모호한 지점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오색령과 한계령이라는 지명 정체성의 분화도 결국은 접경지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노래 <한계령>이 인기를 끌자 강원도 인제군은 <한계령 노래비>를 세우려 했습니다. 지명이 제목이 되어버린 노래가 뜨면 해당 지역에 노래비가 건립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긴 하지요. 그러자 이 고개를 기준으로 동쪽(동해 쪽)에 맞닿아 있는 양양군에서 이에 제동을 걸고 나섭니다. '한계령'이란 이름은 일제가 강점기에 개명을 한 것이고, 예로부터 부르던 이 고개의 원래 명칭은 '오색령'이 맞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인제군 역시 이에 반발해 '한계령'이 이전부터 부르던 명칭이 맞다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어느 한쪽의 의견으로 기울어지지 못하고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바다 쪽에서 오색약수를 지나 오르막을 올라오는 지점엔 양양군의 <백두대간 오색령> 표석이, 휴게소 주차장에서 영서지방을 향해 내리막으로 출발하는 지점에는 인제군의 <한계령> 표지주가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다오위다오냐 센카쿠 열도냐의 심각한 분쟁처럼 비화될 일도 아니지만, 두 자치단체 사이에서 괜히 눈치를 보는 기분이 들어 찜찜한 것도 사실입니다. 둘 다 매력 있는 명칭이니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기도 민망하고요. 그저 더 이상의 마찰 없이 지금과 같은 '한 고개 두 이름' 상태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만 이 글의 무대는, 휴게소 명칭이 '한계령 휴게소'인 터라 한계령이란 이름을 쓸 수밖에 없겠습니다.

 독도 이야기는 안 하려 합니다. 그건 명백한 답이 나와 있는 사안이니까요. 




 한 끝 차이로 의미가 통째로 바뀌어버리는 말들이 있습니다. 물론 언어에 그런 맛도 있어야 지루하지 않은 법이긴 합니다. 대한민국 지성의 상징, 이어령 선생님의 기가 막힌 비교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나가 볼까 합니다. 먼저 '이것이냐 저것이냐'입니다. 'Either A or B', 즉 A 아니면 B입니다. 선택의 문제지요. 둘 다는 안됩니다, 하나는 무조건 탈락입니다. To be or not to be의 매우 심각한 상황임에 틀림없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이데아를 염원해야 하는 카오스의 대립에서 비롯된, 서구 특유의 칼로 자르듯 나뉘는 이분법. 육체와 정신, 인간과 신,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 선과 악의 이항대립이 뿌리 박히듯 심어진 서양의 관념 체계입니다. 세상의 모든 요소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고 오직 끊어져 따로따로, 대적하며 존재합니다. 당연히 '관계' 보다는 개별 사물, 사람 하나하나의 '본질'이 강조됩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오직 한 끝 차일 뿐이지만 그 고갱이는 천양지차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 둘 중 하나로도 만족하겠지만 'Both A and B'도 허용하는 것이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니 다 합격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로댕의 조각처럼 접근을 쉽게 허용치 않는 사람의 불편한 마음 상태라면, '이것이나 저것이나'는 맘씨 너그러운 포장마차 손님의 배려와 같습니다. "아, 그 안주 없어예? 마 그럼 아무거나 주소!" 딱 그 느낌인 것입니다. 정반대의 시선에선 우유부단함으로 읽힐 수도 있을까요? 아니오, 노자의 사상에서 꽃을 피워온 동양의 지혜입니다. <도덕경>은 충격적인 첫 문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으로 시작하지요. 도를 도라고 한정 지어 구분하는 순간 늘 그러한 도가 되지 못하고, 어떤 것에 이름을 붙여 구속하는 순간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되지 못한다는, 감히 단편적인 서양문명의 관념 체계 속에선 끄집어내지 못할 우주의 운영 논리입니다. 대립으로만 알고 있는 음과 양의 관계는 태극의 문양처럼 서로 휘몰고 감싸드는 구름의 섞임과 같습니다. 음이었다가 곧 양이 되고, 양의 기운이 흘러내리며 다시 음의 상태로 바뀌어버립니다. 모든 것은 변화와 생성의 과정입니다. 어디 하나의 존재, 하나의 상태가 영원불변할 수 있을까요. 굳게 정지되어 있는 듯한 바윗덩어리라 할지라도 잘게 쪼개져 있는 자체의 분자들은 순간순간 깎여나가고 흔들리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입으로 표현하는 그 순간 날아가 버리는'현재'라는 시점에도 내 몸은 끊임없이 역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명이 다해 죽어버리는 세포들의 진혼곡과 새롭게 피어나는 세포들의 축제의 나팔이 신체 내부에서 정신 사납게 연주되고 있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손에 든 정답판을 뒤집는 ○×퀴즈가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죽어가는 세포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져 도달하는 마지막 변화의 과정인 것이죠. 아무것도 이름 붙일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똑똑히 구별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저것이 되고, 저것은 곧 이것으로 치환됩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라는 말속에는 만고의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A 이므로 반드시 B가 되어야 한다는 서양철학의 유산이 논리학과 수학, 과학의 발전에 대체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카페 테이블 위 전기 콘센트에 충전기를 연결해 가성비 탁월한 노트북으로 감히 서양의 관념에 대해 비판글을 쓰고 있는 별 것 아닌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하지만, 가끔은 지나다니는 구석에 개똥철학이랍시고 주절대는 사람도 필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동양은 동양대로, 서양은 서양대로 각각의 사고체계에 걸맞은 사회를 구성하면서 잘 살고 있다 정도로 결론 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군요, 간이 부었는지 플라톤까지 들먹거리며 황망한 비판을 웅얼거린 것 같습니다. 결국 이렇게 동,서양을 나누면서 또 이분법의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여기는 한계령이자 오색령입니다. 그동안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쉼 없는 반목을 해 왔다면 이젠 '이것이나 저것이나' 도 괜찮지 않을까요? 딱히 다른 지역에서 온 객들은 이 승부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고 도덕경의 수준까지 올라가서 "이름이란 것 다 소용없으니 오색령이라고도, 한계령이라고도 이름 붙이지 말고 그저 내려서 풍취나 즐겨라, 자연일 뿐이다." 하는 것도 영 어색한 게 사실이군요.


 말을 그렇게 늘어놨어도 저 역시 이름 지어진 것들의 매력에 끌릴 수밖에 없는 필부일 뿐입니다.



한계령 휴게소 내부와 야외 데크


 25년여를 뛰어넘었지만 여전한 안개비에 한계령 휴게소는 뜸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한계령에서 찍은 사진을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비를 맞으면서도 좋다고 웃고 있는 녀석들입니다. 주위는 안개로 온통 희뿌연 배경색뿐입니다. 기억에 저장되어 있지 않으면 여기가 어디인지 짐작조차 못할 여지가 큽니다. 다만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녀석들이 보여 여기엔 올리지 않으려 합니다. 올려봤자 뿌연 주위와 시커먼 남자 녀석들만 보이니 재미도 없겠고, 그래도 방송국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심의의 걱정이 항상 따라다녀서도 그렇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친구들의 얼굴에 중년이 훌쩍 넘어버렸을 지금의 모습을 중첩시키려 하니 질주하듯 지나가버린 시간이 먹먹해지는군요. 모든 분들이 공감하실 종류의 느낌이라 외롭진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려한 간식 군단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소박한 컬렉션의 간식이 오히려 어울릴 법한 강원도 깔딱 고갯길의 휴게소니까요. 참았던 용변을 보러 잠시 스쳐 지나갈 장소도 아닙니다. 구름과 안개가 어우러지는 쉼의 공간, 누군가에겐 여행의 목적지가 될 수도 있는 이 작은 휴게소는 천상의 쉼터이자 추억의 소환처인 것입니다.


 



 한계령 휴게소를 나와 서쪽으로 굽이길을 내려가니 안개가 걷힙니다. 도로와 하늘을 제외하곤 온통 초록입니다. 나무들이 싱싱합니다. 바닷속 물고기처럼 펄떡이는 것 같습니다. 바다 방향보다 완만한 반대쪽 경사라 수월하게 돌아 내려갑니다. 힘든 산행에선 내리막이 반가운 것일지 모르나 흔히 비유되는 '내리막길'의 의미는 부정적일 때가 많은데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쁘기만 한 단어도 아닌 것 같습니다.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마음껏 에너지와 사랑을 쏟아붓고 희열과 아픔 모두 날카롭게 받아냈던 시간. 그 뒤에 찾아오는 내리막은 처음엔 심장 철렁하도록 낯선 것일 수 있을지라도 결국엔 거둠과 안식의 시간이라는 것을 체감하며 오히려 편안해지기까지 합니다. 예전처럼 힘들여 가파른 길을 오르지 않아도 저절로 안착을 향해 삶이 궤적이 이동하니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일입니까. 가파른 추락만 아니라면, 속도가 조절되는 내리막은 차라리 경쾌하고 짜릿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전기차는 내리막길에서 충전도 되지 않습니까. 내리막길에 접어든다는 것은 중력을 거슬러 올랐던 압박에서 벗어나 자연에 법칙에 가까워지는 순리로의 과정일 뿐입니다.


 마을이 보이고 토종닭 전문 음식점들이 하나 둘 나타납니다. 천계(天界)에서 노닐다 이제야 인간계로 내려온 느낌이군요. 하나의 공간 분류기준인 고도(高度)가 이렇듯 정서를 바꿔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입니다.

 강원도의 신령스러운 고갯길이 다시 그리워질 무렵 힘차게 흘러내리는 장마철 오색의 차디찬 물이 아쉬움을 달래줍니다. 안개가 녹아들었을 계곡물 덕분에 한계령의 여운은 다행스럽게도 오래 이어질 듯합니다.

 푸른 하늘빛과 안개로 쌓인 회색빛, 여름날 진초록을 잎 속에 담뿍 머금은 나무들과 어둡지 않은 갈색으로 솟아있는 바위의 위용들, 그리고 모든 색이 버무려졌을 젊음의 순간들이 고갯길 곳곳에서 툭툭 터져 나옵니다.


 방금 넘어온 그곳은


 오색의 한계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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