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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Aug 15. 2020

28 나는 고수다
-신길동 옛 쿵후도장

모든 곳의 어떤 것들








 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비디오테이프를 투입구에 넣습니다. 제대로 녹화는 됐을지, 그래도 화질은 볼 만해야 할 텐데... 하며, 치이~~~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을 채우는 어지러운 무늬를 주시합니다. 20초쯤 지났을까, 아래에서 위로 흰색 선이 몇 개 올라가더니 '땅. 땅. 땅. 땅.' 하는 타악기 소리와 함께 직사각형이 하나씩 등장하며 제작사 로고가 완성됩니다. 침이 꼴딱 넘어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로고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제가 사춘기에 야동을 빌려서 부모님 몰래 보고 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증언해 줄 수 있는 분들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바로 수많은 액션스타를 배출하며 20년 이상 아시아 무협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홍콩의 영화제작사,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사(社)의 로고입니다.

 어떤 영화의 오프닝보다도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던 제작사 소개 화면이 지나고 영화의 본 제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리던 그가 보입니다.



 Bruce Lee! 

 그렇습니다. 영웅이 하나가 아니어서 뻘쭘하긴 합니다만, 태권브이는 로봇이고 이소룡은 인간이니, 이런 경우엔 영웅이 복수여도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tv의 채널이 엄청나게 다양해지면서 그 귀했던 이소룡의 명작들을 채널 탐색 중 어쩌다 마주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덕분에 40년 이상 사생팬인 저는 영화배급사의 대표가 된 것 마냥 흐뭇해지곤 합니다.   


 처음 비디오 대여점 아저씨께 녹화를 부탁한 영화는 <맹룡과강(猛龍過江)>이었습니다. 당대 잘 나가던 액션배우 척 노리스와의 콜로세움 결전이 백미였던 작품이죠. 그나마 컬렉션에 없는 대여점이 많아 쉽지 않았던 부탁이었는데요, 보고 가져다 줄 필요 없는 내 것으로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내 책장에 꽂아둘 수 있다니! 소유욕이란 이렇듯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단골을 자처한 저는 이어서 <용쟁호투(龍爭虎鬪)>, <사망유희(死亡遊戱)>의 녹화를 간청합니다. 이제는 이소룡의 팬이 될 자격을 갖췄다는 듯 테이프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뵤~~~~~~~!"


 '국민'학교 1학년 때로 기억납니다. 어머니와 함께 본 첫 영화 - 만화영화가 아닌 - 는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였습니다. '죽음 놀이'라는 이 오싹한 제목은 영화 중반부 주인공 이소룡이 갱단의 총에 맞아 죽은 것처럼 가장하는 대목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적들을 안심시킨 후 무술의 고수들이 포진해 있는 악당들의 탑에 들어가 각 층에서 대결을 벌인다는 내용으로, 속리산의 법주사 팔상전을 영화 속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이소룡이 의혹이 가득한 사망을 함으로써 영화 제목이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예견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영화 속 총에 맞아 엎드려 쓰러진 이소룡을 주변 사람이 바로 눕히는 장면에서, 분장이었다는 걸 짐작했었음에도 피투성이가 된 영웅의 얼굴을 보고 진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소룡의 촬영 도중 사망으로 영화 후반부 주요 장면을 대역이 어색한 연기로 채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끔찍했던 피격의 순간이 신경 쓰여 불평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의 팬이 되었는지요. 

 그의 무술 동작을 외우며 쌍절곤을 사고, 피비 케이츠나 소피 마르소가 아닌 이소룡의 얼굴이 코팅된 책받침을 지니고 다니는 걸로 그 허망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로부터 좌 하단, 우 하단 각각 <맹룡과강>, <용쟁호투>, <사망유희>


 <그린 호넷>, <당산대형>, <정무문>까지 언급하다가는 끝이 날 것 같지 않습니다. 이소룡의 영화 속 대역으로 출연했던 이른바 '골든 트리오' 멤버인 성룡, 홍금보, 원표가 이후 홍콩 무술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가게 되지만, 제 마음속 '브루스 리'의 아우라는 걷힐 줄 몰랐습니다.


 중3 여름이었나요, 버스를 타고 신길동을 지나가는데 못 보던 간판이 보였습니다. [전영록 쿵후도장]이란 선명한 글자에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여기저기 쿵후도장은 많이 있었지만 '전영록'이란 이름이 붙었으니, 그 유명한 분이 정말 이곳을 다닌다면 진짜배기 도장이 틀림없겠다는 추리를 합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어머니에게 통보해 버립니다.


 "저 무조건 쿵후 배울래요." 


 이튿날, 신길동 육교 옆 건물 3층으로 뛰어올라갑니다. 이제 진정한 이소룡의 후예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도장이 있었던 육교 옆 건물, 뛰어올라가지 않았던 적이 없는 건물의 입구


 콧수염을 기르신 관장님은 학생은 공부가 먼저라며, 학교 성적이 일정 점수 이상 떨어지면 도장의 문도 열어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그간에 쿵후에 빠져 성적이 급 추락한 관원들이 꽤 있었나 봅니다. 공부도 열심히 할 테니 믿어주시라 말씀드리고 등록원서를 작성했습니다. 고3이 되어서는 차마 부모님께 더 이상 다닌다고 할 수 없었지만 전영록 쿵후도장에서의 2년 반은 제가 받은 최고의 사교육 과정이었습니다. 몸이 부드러워지는 것이, 발차기가 점점 높아지는 것이 뿌듯했습니다. 봉(棒)과 도(刀)를 다루는 손놀림이 익숙해지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는 정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분을요.



 상당한 수준의 동작을 보여주시며 모두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역시는 역시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스타 전영록이 쿵후를 연마하는 곳에 내가 다닌다니, 버스 안에서의 눈썰미를 스스로 대견해하며 당랑권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두 눈에 힘을 잔뜩 넣어봅니다. 그 무렵 존재하던 쿵후도장의 90퍼센트는 홍콩, 대만의 정식 쿵후협회에 속하지 않는 곳들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 쿵후협회 부주석이었던 관장님의 위용은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었습니다. 6개월쯤 지나니 연예인들을 봐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전영록 선배님은 물론이고 인기 개그맨이었던 밥풀떼기 김정식 님, MC의 귀감인 임성훈 님, - 이 분은 도대체 언제 늙게 되는 것일까요 - 그리고 성우 배한성 님도 꾸준한 수련생이었습니다.

 관장님의 성함은 홍문탁이었습니다. 포털사이트에서 그리운 관장님의 얼굴까지는 아무리 검색을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TV는 사랑을 싣고>의 옛 방송분을 찾아 캡처를 하면 될 것도 같지만, 본사에 그런 부탁까지 하기는 미안스럽습니다. 프로그램의 전성기, 가수 전영록의 은사를 찾는 편에서 홍관장님을 보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전영록 님보다는 감격의 깊이가 덜했겠지만 비슷한 종류의 감정이었겠지요. 대학에 들어가면 다시 도장에 다니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한 마음도 더해졌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훌쩍 도약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이야기는 시공간의 점프가 연속될 듯합니다. 이소룡으로부터 실타래를 풀어내게 되니 어쩔 수 없는 비약이네요. 이해해 주실 거라 믿으면서 2009년으로 뛰어넘습니다. 


 홍콩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시애틀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이소룡은 짧은 생애에 반비례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뒤, 학창 시절을 보낸 이곳 시애틀의 Lake View Cemetry에 묻힙니다. 사생팬으로서 묘지 참배가 너무도 늦었습니다. 아름답게 조성된 공원묘지의 가장 높은 위치에, 사진이 있는 그의 비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 나란히 그의 아들이 있습니다. 닮아야 하지 말아야 할 요절(夭折)을 하며 아버지 옆으로 너무도 빨리 와 버렸습니다.




 Bruce Lee와 Brandon Lee, 이진번과 이국호. 부자(父子)의 이름입니다. 이소룡이라는 예명이 아닌 '이진번'이라는 본명을 보자 인간적인 그리움이 가득합니다. 1993년 액션 영화 '크로우'를 찍다가 총기 오발사고로 숨진 아들 브랜든 리는 1965년 생이니 만 28세라는, 아버지보다도 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는데요. '사망유희'라는 꺼림칙한 제목의 아버지 유작에 이어, 음습한 분위기의 작품  <The Crow>의 마지막 촬영을 일주일 남기고 숨졌다는 우연한 비극도 이 부자의 신비스러운 죽음에 슬픔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그토록 한 꼬마를 열광하게 했던 브루스 리의 묘지가 있는 곳이 하필 시애틀이라뇨. 이소룡과 나는 질긴 인연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이제 장년이 되어버린 꼬마는 아직도 굳게 믿고 있습니다.


 7년 후 제주의 아나운서실. 큐시트에 인쇄된 출연자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음악회나 가요제 진행을 그동안 여러 차례 해 왔어도 기회가 없었는데, 드디어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녹화 당일 대기실에서 나이가 드셨지만 여전히 소년의 이미지를 뿜어내시는 그분을 만났습니다. 간단한 인사만 드리고 일부러 무미건조하게 리허설을 마쳤습니다. 본 녹화가 들어가고 후반부에 등장한 전영록 선배님이 노래를 마치는 순간 무대 중앙으로 뛰어들어가 전형적인 질문을 드립니다. 제주 얼마 만에 오셨는지, 제주와 인연은 있으신지 같은 것들 말이죠. 이어서 그토록 참고 있었던 물음과 함께 원고에 없던 대화들이 오갔습니다. 


 "신길동에 있었던 도장 기억하시죠?"


  "(눈이 휘둥그레지시면서) 네? 아 네 알죠."


  "제가 중고등학생 때 거기 다녔거든요. 전영록 씨도 거기서 자주 뵈었는데, 저 기억 안 나시죠?" 


  "아 정말이에요? 와 그때가 언젠데... 진짜 반갑네요."


 방송을 이용해 지극히 개인적 추억을 소환했으니 순간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전영록 선배님의 진심으로 놀란 표정과 감사하게도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여주신 관객 분들 덕분에, 사적 욕망이 가득했던 인터뷰는 어느 정도 변명의 여지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같이 진행했던 한서경 누님도 대본엔 없었던 티키타카로 어리둥절하셨을 텐데요, 늦게나마 죄송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녹화가 모두 끝난 뒤 대기실에서는 마음속에서 되뇌던 '선배님'으로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한 번의 재회에 가볍게도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소속감이 남다르고 엄격해야만 하는 무도의 한 문파(門派) 후배로서 어찌 선배님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전영록 선배님은 왜 진작에 말을 하지 않고 녹화할 때 이야기를 했냐고 하시더군요. 미리 말씀드리면 인터뷰 때 분위기가 살지 않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다 털어놓고 싶었는데 참느라 혼났다는 말씀도 드리면서 말이죠. 선배님과 신길동 육교 옆 도장의 추억담을 나누던 중 홍문탁 관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인연을 이어가려면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부고 조차 몰랐다는 부끄러움이 잠시나마 제자였던 저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습니다.


             2016년 가을 제주 시청자 음악회 중


 세계적 대스타가 된 후에도 상상을 뛰어넘는 수련으로 무도인의 자존심을 보여준 브루스 리, 그의 사후 홍콩의 액션 영화는 급격히 말랑말랑해져 남녀노소 웃음을 머금고 바라보는 장르로 변했습니다. 성룡과 홍금보의 코믹 액션 역시 40대 이상 많은 어른들의 선물 같은 추억으로 남아있겠지만, 이소룡만의 오소독스함은 그 어떤 액션배우의 분위기로도 대체 불가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더구나 그의 영화에서 주로 배경이 된 일본과 서구의 식민시절, 약자의 편에서 외세를 격파하는 통쾌함은 우리의 정서에도 불꽃을 튀게 하지 않았을까요.

 어린 시절 꼬마를 사로잡았던 이소룡의 존재는 대한민국의 천재적인 작곡가이자 가수, 액션배우였던 전영록을 만나게 했습니다. 팬이 된 순간 이미 세상에 없었던 이소룡에 대한 동경은 전영록 선배님께 그대로 포개어졌습니다. 세상을 떠난 영웅의 묘지에서는 영원한 안식을 기도할 수 있었고, 다시 만난 영웅과는 과거의 꿈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지극히 그리면 무언가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 도장 자리를 다시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30년도 훌쩍 넘었으니 그곳이 '신길동'이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있었지요. 인터넷을 집요하게 뒤적거린 결과, 한 초등학교 앞 육교 건너편에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 말고도 당시 도장의 기억을 더듬는 분들이 또 있었던 것입니다. 3층 그 자리에 [전영록 쿵후도장]은 없었지만, 건물이 헐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것조차 얼마나 다행스럽던지요.  


 육교를 내려와 건물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입구 계단으로 쏜살같이 뛰어들어가는 녀석이 떠오릅니다.

 

 '오늘은 영화에서 이소룡이 했던 연속동작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지난달에 오셨으니까, 전영록 아저씨 오늘은 혹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승급심사가 있는 날입니다. 일단은 지난주 배웠던 동작을 외우는데 집중하자 마음먹습니다.

 유난히 헷갈리는 봉술을 연습하는데 관장님의 꿀밤이 들어옵니다.  


 "똑바로 안 하지?"


  세계 쿵후 부주석께서 고작 꿀밤으로 혼내시다니, 황송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옛날 사진을 뒤져보다 끝내 찾고야 말았습니다. 홍문탁 관장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요, 맨 왼쪽에 서 있는 어린이 바로 옆에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분입니다. 관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덧붙이는 글**


 댓글이 달렸다는 신호가 왔습니다. 확인해 보니 <신길동 옛 쿵후도장> 편에 꽤 긴 댓글이 보였습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홍문탁 관장님의 아드님이 쓴 글이었던 것입니다. 가끔 아버지의 성함을 검색해 보곤 하는데 제 글이 보여 들어가 보니 당시의 도장의 모습과 관장님 이하 관원들이 담긴 사진이 있어 마음이 짠해지신 것 같았습니다. 관장님은 2015년에 돌아가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럼 전영록 선배님과 만났던 시기는 관장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는 얘깁니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다면 선배님께 연락처를 물어본 뒤 한번 뵙자고 전화라도 드렸을 텐데요. 부모님이나 스승님들은 좀체 오래 기다려 주지 않는 분들이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 무도를 배우던 분들이 지금까지도 그 추억을 공통분모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고 있다는 표현도 써넣으셨더군요. 왜 안 그랬겠습니까, 입장을 바꿔놓아 봐도 충분히 그렇게 느끼셨을 법합니다.

 

 분명 같이 뒹굴며 운동을 했을 텐데 관장님 아드님의 얼굴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빠가 되고 남편이 된 마흔을 넘긴 나이라고 하시니 젊은 날의 질풍노도 다 헤쳐내시고 한 가정의 듬직한 가장이 되신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다만 슬슬 지쳐가는 저질 체력이 걱정돼 다시 권법을 연마해 볼까 결심을 해 봐도 예전의 동작이 생각이 나지 않아 고역이라는 내용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동병상련의 연민일진대, 연륜에 동반된 망각이 생각보다 일찍 오신 것 같았습니다. 꾸준히 운동해서 뇌의 건강도 잘 지켜 내시기 바랍니다. 


 친절한 댓글이었지만 연락처라도 주고받자는 말은 없었습니다. 개성 있는 글과 쿨내 진동하는 매력으로 볼 때, 확실히 홍문탁 관장님의 유전자를 갖고 계셨습니다. 기억을 공유하는 분들께 아드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 인상 깊습니다. 


"사형들, 모두들 건강하시고, 코로나로 힘든 이 시기를 잘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아련한 기억으로 남은 그날의 추억들은 쭉 간직하기로 해요."


 그렇습니다. 제가 다녔고 그리워한 그곳은 선, 후배나 동기로 표현하기엔 뭔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신체와 정신을 인내로 단련하는 신성한 무도의 공간이었습니다. 잊었던 그 호칭, '사형'들이 서로의 몸을 부딪혔던 나날들이었습니다. 


 아버님께 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형!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고.   





 P.S. 이토록 화살 같은 세월이란...

 불혹이 넘은 아드님은 사진의 관장님 바로 옆, 왼쪽에 서 있는 어린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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