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tal Eclipse Apr 27. 2020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여는 글

Miscellanea for every spot

 








 사실은 그랬습니다.


 글을 시작하기 전 여는 글을 먼저 써 두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니, 두 가지 정도로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여는' 글이란 개념에 충실하려, 행사의 오프닝처럼 시간적으로도 본문에 앞서 쓰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야 '닫는 글'에 쓸 이야기들과 구분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굳센 다짐을 표현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글쓰기의 과정을 앞둔 시점에서 마라톤 출발을 앞둔 선수의 인터뷰처럼 '나 이제 굳게 마음먹고 뛸 테니 지켜봐 주십시오' 하는 각오와 다름없었습니다. 낯부끄럽지만 의지만큼은 스스로 칭찬할 만했습니다. 단지 의지를 안고 뛸 체력과 실력이 문제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죠.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쓰기로 결심을 하고 한 걸음을 떼는 순간, 글은 아무나 써도 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무나 중 하나가 쓰고 있었으니까요. 보잘것없는 하나의 묶음을 지어낸 지금엔,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믿음 쪽으로 다시 몸이 기울었습니다. 뒤돌아보면 한 글자 한 글자 신경을 써 꾹꾹 눌러쓴 글에선 전체를 보지 못한 엉성함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자아도취되어 쏟아낸 글에선 이기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파렴치함이 묻어나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각오를 담은 여는 글의 오리지널 버전은 단 몇 줄도 읽기 힘들 지경이어서 이렇듯 감추어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은 과거의 자신을 업신여기게 만들곤 하지요, 이 순간의 결과물 역시 머지않은 앞날엔 또 부끄러워질 것이 명백할 테니 더 이상의 자백은 굳이 필요치 않을 것 같습니다.


 제주라는 섬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간 시간이 20년에 가까워졌습니다. 낯선 곳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천성이 주위의 시선에 둔감하고 무색하게 그 시간을 만들어준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신기하기만 했던 공간과 사람들이 이젠 나의 앞마당이 되었고 나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피상적으로 훑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제주의 모습에서 이제는 껍질 속 숨겨진 이야기들을 조금씩이나마 끄집어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꿈같이 느껴집니다.


 '공간'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은 곧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기억은 오래전 심장 속을 파고든 감정들의 흔적일 수도 있겠고 언젠가 내 일부분이 될 미래의 기억일 수도 있겠습니다. 공간과 기억은 항상 교차합니다. 낯익은 공간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곳에서 채록된 이미지와 음성, 관계와 이야기가 파도처럼 밀려듭니다. 반대로 기억이 갑자기 소환되면 그때의 나와 우리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합니다.

 공간은 또한 시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공간에 담긴 모든 기억들은 시간이 흐름을 공급하며 재생됩니다. 시간이 흘러 변한 내가 있어야 변하기 전 나의 추억이 있는 것이겠지요. 모든 기억은 일방적인 시간의 질주 속에 그 인상과 디테일이 변색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공간을 탐색하며 글을 쓴다는 것은, 기실 공간과 엉켜 붙어 있는 시간을 붙잡아보려는 시도일 수도 있겠습니다.  


 특정 공간을 상념의 도마 위에 올려놓으면 추억에 달린 감성만 솟아 나오는 건 아니었습니다. 치열한 현실의 삶과 엮이는 사회적 이슈들이 뒤따르기도 했고, 영화와 음악이 배경처럼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방송과 관련된 평소의 신념들을 말씀드려야 할 순간도 있었으며 역사 속 인물들의 가르침이 새삼 공간과 연결되어 깨우침이 되는 시간도 맞닥뜨렸습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해외로 날아갈 여행자들이 제주로 몰려듭니다. 호시절도 위기의 시간에도 제주는 최후의 보루임에 틀림없습니다. 너무나도 효율적이고 감성적인 안내서가 넘쳐나고 제주의 정보는 현미경처럼 분석돼 검색자에게 제공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현지인의 라이프스타일 그대로 살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책은 여행안내서가 아닙니다.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소금결정처럼 응어리져 가슴에 깊숙이 박혀있던 덩어리가 제주의 공간을 만나 가끔은 격렬하게, 때로는 녹아흐르듯 솟아 나온 결과물입니다. 장소의 안내엔 지극히 부족할지라도 제주의 땅이 속삭이고 있는 이야기는 귀기울여 들으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만 가져볼 뿐입니다. 


 솜씨 좋은 단막의 에세이가 넘쳐나는 시대, 아무나 중 1인이 제 능력에 비해서 넘치는 분량을 던져놓은 듯한 불안함이 스며듭니다. 토마스 만은 '작가란 누구보다 글쓰기를 더 힘들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지요, 그의 명언으로 불안함을 지워버리려 합니다. 힘들게 여기까지 걸어왔으니까요. 

 개인적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는 공간 속 이야기들이 당신과 공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려갔던 당신과 내가 공원의 벤치에 앉아 보석처럼 감춰져 있던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준비되셨나요?     


 길을 떠나겠습니다. 여기는 제주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