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 가면 안돼요?"
"애월이 요즘 뜬다며? 애월로 가지 뭐."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애월 어디로 가자는 건지. 물론 이해는 됐습니다. 정신줄 놓고 살다가 갑자기 제주를 갈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마침 TV와 SNS에서 애월의 명소들이 소개되고, 연예인들도 집을 마련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하니 호기심이 생길 법도 하죠.
지금은 동쪽으로 이사를 간 이효리 씨에게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속물로 보이긴 하겠지만 덕분에 토지의 가치도 제법 상승했고 힙한 레스토랑도 많이 생겨 그럴싸한 외식도 가끔 하게 됐으니까요. 애월로 이사를 간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도 몇 년 사이에 많은 것들이 바뀌긴 한 것 같습니다. 단순한 마을의 외양뿐 아니라 '애월(涯月)'이라는, 온몸이 축 늘어질 듯 감성적인 이름을 가진 이곳의 지명도도 말입니다. 어쨌든 제주에 20년 가까이 살아온 준(準) 토박이로서 애월이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월 어디로 가자는 건데? 꽤 넓어 애월은, 중산간 쪽 바다 쪽, 어떤 분위기를 원해?"
대부분은 해안도로가 있는 바다 쪽을 답합니다. 허기진 사람이 밥을 찾듯,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연신 바다를 대령하라고 외쳐대는 경우가 많은 데다 소문난 맛집과 카페들도 바닷가에 몰려있기 때문이죠. 제주의 다른 지역과 달리 애월 바닷가는 상당히 터프해 보입니다. 섬 둘레를 따라 곳곳에 깔린 해안도로 중 애월의 해안도로는 유독 높은 절벽 위를 달려야 하는 구간이 많다 보니, 내려다 보이는 짙푸른 바다가 꽤나 야성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숨 막히는 도심에서 제주의 풍경으로 초대하고 나면 이후의 접대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남국의 정취를 싹쓸이라도 하려는 듯 엔도르핀이 넘쳐있는 상태의 방문객이 태반이니까요. 그저 바닷가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드라이브를 하다가 저녁으로 회를 먹는 스케줄을 잡으면 별점 5개 주겠다며 대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익숙한 공간은 다른 누군가에겐 아찔할 정도로 생경한 장소가 되어버립니다. 이럴 때 듣게 되는 레퍼토리가 있습니다. 제주에 살아서 얼마나 좋겠냐고, 나도 언젠가 한 달 살기 말고 제대로 터 잡고 살고 싶다고 말이죠. 그런데... 장담합니다, 그렇게 쉽게 결정 못할 거라고.
애월 한담의 카페 앞마당
오늘은 비가 내립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당연했던 일상들이 많이 바뀐 지금, 바다를 보는 느낌도 조금은 달라집니다. 언젠가는 오늘을 떠올리면서 그땐 정말 아찔하고 숨 막혔다고 씁쓸하게 회상하겠지만, 확진자가 전국적으로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이 상황은 모두가 재난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곳 한담 바닷가의 카페에는 생각보다 많은 관광객들이 와 계시는군요.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빼고는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어찌하겠습니까. 건강하게 살아남아야, 코로나의 숙주가 되지 말아야 더 멋진 미래를 선물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허물을 벗은 듯 구름으로 가려진 시야를 뚫고 섬의 자태가 드러납니다. 제주에 사는 도민들도 육지로 나갔다 돌아올 때의 아름다운 항공 뷰를 놓치지 않을진대, 힘든 시간을 내 섬으로의 소중한 여정을 시작하실 분들에게는 비행기의 자그마한 창 너머 보이는 제주의 모습이 얼마나 치명적일까요. 며칠간 섬의 모든 것을 흡수할 작정인 모든 분들에게 하늘에서의 풍경은 여행의 진정한 첫 페이지와 다름 아닙니다.
땅에 내려 바라보는 제주보다 하늘에서 조망하는 제주가 매력적인 것은 색감의 조화와 대비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와 섬의 경계면에서 느껴지는 깊은 푸름과 흑갈색의 대비, 주 착륙 동선인 서쪽 상공에서 활주로 사이의 하늘길은 짙은 초록의 밭들과 그 밭들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의 검은 윤기가 이국적인 색의 조망을 펼쳐냅니다. 그저 보색의 효과, 혹은 이항대립(二項對立)의 미(美)일뿐일까요?
제주는 그렇게 해석되기엔 너무도 많은 사연들이 그 색 속에 녹아있습니다. 바다와 뭍의 사이엔 세월을 품은 현무암의 무더기들이 해녀들의 전쟁과 안식의 공간을 가르고 있고, 초록의 밭과 검은 돌담의 경계에선 제주인들의 운명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명확히 구획된 밭의 한가운데에는 다시 담으로 둘러쳐진 조상의 공간, 무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 자연이 한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순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제주 속 애월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지요. 제주를 대표하는 서정적인 공간, 남국의 정취가 가득한 풍경을 가진 동네 정도일 수 있겠습니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대가 된 제주섬이지만 말 그대로 무대로서의 역할뿐이었는데요. 이 영화만큼은 영화 제목 자체가 노골적으로 <애월>입니다. 차라리 속이 시원합니다. "그때 그 영화에 나온 애월 봤어?"가 아닌 "영화 <애월> 봤어?". 군더더기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위해 취업을 선택하고 음악에 대한 미련을 접기로 합니다. 차분히 마음을 정리하러 내려온 제주에서 그는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습니다. 여자는 제주로 내려와 그가 추락해버린 절벽이 지척인 해안도로의 한 카페에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어 냅니다. 연인의 삶이 끊겨버린 마지막 공간에서 그의 자취를 영원히 간직하려는 의도였을까요. 한편 죽은 남자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시에 여자의 친구이기도 한 남자 주인공은, 친구의 부재 속 기타리스트의 힘겹기만 한 삶을 돌아보고자 제주에 살고 있는 그녀를 찾습니다. 둘은 각자 이젠 세상에 없는 친구와 연인의 상실에 힘겨워하면서도 슬퍼만 할 수 없는 이 세상, 부딪혀 살아가기 위한 단단한 껍질을 한 겹 한 겹 만들어 내며 성장합니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에게 애월이라는 장소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상실의 공간이자 극복의 공간이며 다짐과 치유의 공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곳도 아닌 '애월'이 무대가 되어야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어감 때문인지도 모르겠군요. '애월(涯月)', 물가에 뜬 달인지 물가가 달의 모양인 것인지, 지금도 지명의 유래에 대해 갑론을박이 진행 중입니다만 바다와 달이 만들어낸 신비스러운 애절함이 지명의 상징 효과로 작용해 영화 속 이야기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헛헛함마저 느껴지는 애월은 그들에게 涯月이 아닌 '哀月'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습니다.
한림읍 '매기의 추억'
영화 속 주요 배경이 된 카페로 자리를 옮깁니다. 영화에서는 한없이 짙푸른 하늘과 바다의 색을 보여주는데 오늘 제주의 하늘은 잿빛이군요. 낮게 깔린 하늘과도 썩 어우러지는 카페의 모습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과도 우울한 제주의 날씨는 분명히 함께 했을 테니까요. 내부로 들어가니 단체손님들이 몇 안 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날것 그대로의 경상도 사투리로 제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십니다. 잠시 귀를 기울여보니 웬만한 제주의 명소는 다 돌아본 분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뫌라고 다 가본 데 가는데? 사람 쌔고 쌘 데 가지 말고 내 가자는 데 함 가보자 말이다. 그런 식으로 돌아댕길라카믄 제주 올 필요가 없다 아이가."
제주 여행자들의 등급으로 따진다면 상위 레벨인 듯도 싶었습니다. 네, 이왕 귀한 걸음 하신 김에 제주의 속살을 제대로 느껴보고 가시길 바랍니다.
손님들이 빠지고 자리에 앉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내부를 그대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영화 <애월>만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에서 찍은 드라마와 영화가 꽤 있었군요. 보통 드라마에 잠깐이라도 모습을 비춘 장소들은 요란하게 사진을 도배해 놓고 입구에서부터 '~~~ 촬영 장소'라는 홍보문구를 장식해 놓곤 하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화장실로 가는 벽면 일부에 관련된 사진이 몇 장 붙어있을 뿐, 오히려 노출로 인한 유명세를 멀리 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합니다. 남들에게 비치는 모습과 상관없이 내 삶만 살아가겠다는 제주사람의 뚝심과 닮아 있다고 할까요.
화려하지 않지만 매력적인 내부와 바다를 향해 난 창가의 자리, 아담하고도 전망 좋은 마당을 품고 있는 어울림의 공간입니다. 드라마나 영화감독님들이 로케이션의 최적지로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이 카페는 애월읍에 적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애월읍에서 보다 서쪽에 위치한 '한림읍 한림해안로'가 이곳의 주소인 것이죠. 애월과 가까운 한림이니 풍경이 급격히 바뀔 건 없다고 쳐도, 영화에 자주 출몰하는 버스 정류장은 명백히 애월이 아닌 한림, 그것도 훨씬 서쪽으로 치우친 협재 해수욕장 앞입니다. 영상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된 장소이겠으나 요즘처럼 지리의 엄밀함이 강조되는 시대에 협재와 애월의 중첩은 영화의 집중도를 떨어뜨릴 수 있는 옥에 티일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삶을 바꾸기 위한 방법으로 공간의 이동을 택합니다. 한없이 침잠하기 위해서 삶의 무대를 옮기기도 하는 반면, 재기를 위한 쉬어감의 장소로 터전을 바꾸기도 하지요.
당신은 어떤 공간을 두루 거친 끝에 지금의 그곳에 계신 건지 궁금합니다. 부모님의 사업이나 발령 때문에, 장성해 분가를 하면서, 그저 그곳에 살고 싶어서... 혹은 복합적인 이유로 많은 곳들을 거치고 그곳들의 이미지를 가지고 계시겠지요. 제주는 수없는 사연들을 간직한 사람들이 새롭게 정착을 하는 곳입니다. 대한민국의 본토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반전의 삶을 그리는데 제격이라서 그런 걸까요.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이주의 굳은 결심과는 별개로 낯선 제주로의 적응은 그리 녹록한 것만은 아닙니다.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과 탐라의 문화 속에 섞이는 과정이 절대 만만할리가 없겠지요. 그나마 제주인으로 거듭날 결심이 선 분을 곳곳에서 목도하는 것은 이미 그 힘든 과정을 겪어온 선배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애월>에서도 주인공들의 뒤에는 제주에 먼저 정착한 선배 이주민들이 있었으니까요. 녹록지 않은 과정이라도 앞서 있는 누군가로 인해 용기를 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역마살이라고 하죠,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하는 액운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이 액운을 행운으로 뒤집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으니까요. 극단적으로는 지구를 동네 삼아 평생 세계를 누비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긴 지구 상 거의 모든 장소에서 무선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통화를 하는 모바일 시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킹이 가능한 유비쿼터스 세상에서 한 곳에 붙박여 살아갈 필요가 있을리가요. 가능한 모든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 미덕이 된 지금, 역마살은 되레 이중, 삼중으로 끼여 있어야 만족스러울 것 같습니다.
타이밍 탓을 하는 것은 비겁하더라도 아쉬운 건 사실입니다. 조금만 더 일찍 이런 시대가 왔었으면 누구보다 제대로 역마살을 누리고 살았을 텐데 하고 한숨이 나오니까요. 나이 핑계를 대는 것 자체가 이미 한물갔다는 증거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정도 발자취와 추억을 만들어 놓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느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겐 꿈일 수도 있는 제주 이주민으로서 후배 전입자들에게 조언도 하며 살아왔으니 그리 후회스럽지는 않습니다.
시간과 감정이 교차하면 수많은 공간에서 수많은 기억들이 만들어집니다. 스쳐갈 모든 곳들에 애정을 갖고 바라본다면 이 세상 모든 것들도 자연히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역마살은 '살(煞)'이 아닌 '복(福)'으로 불러야 할 시대인 듯합니다. 여러분에게 역마'복' 이 가득 차기를 기원합니다.
애월 바다가 거울이 되어 하나의 보름달을 더 탄생시키는 날엔 누구라도 풍경의 일부로 녹아듭니다. 조각으로 나뉘는 감상보다는 자연과의 합일로 인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들기 수월합니다. 하늘도 바다도 저 하늘의 달도 사라질 리 없는데 아침이 되면 다시 우리가 만들어놓은 생활의 질서 속으로 발을 들여놓고 어젯밤의 일체감은 일상의 소음 속으로 날려버리기 마련입니다. 애월에 뜨는 달을 언제고 다시 소환하기 위해 한 편의 시라도 남겨두었으면 좋으련만, 느낌을 압축하는 능력의 부재로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입니다.
해안도로에서 달을 바라보며 듣기에 제격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의 부제 '월광(月光)'은 '달빛을 받을 운명'이라고 해석되는 사주의 명칭이라고도 합니다. 자연의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것이 사주일 테니 달의 기운으로 풀이되는 운명이겠지요. 진지하게 파고들 의도는 없습니다만 이 월광의 운을 지닌 사람은 타인의 주목을 받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한 방송에서 역술인이 출연해 대표적인 월광 사주를 가진 사람으로 서태지 씨를 꼽았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주목의 사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의아한 게 있습니다. 왜 찬란한 '햇빛'이 아닌 '달빛'이 주목을 받을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요. 화창한 날에 해를 바라보면 알게 될 일이겠습니다. 실명의 각오가 되어있지 않는 한 쨍하고 뜬 해를 정면으로 두 눈 크게 뜨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오죽했으면 '태양을 피하는 방법'까지 노래했을까요. 달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는 부끄러워할지 모르는 일입니다만 누구나 넉넉하게 바라보도록 순하게 허락합니다. 숭고한 감정들을 선물로 주면서 말이죠.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건 바람이 아닌 따뜻함이었다는 것과도 같은 논리일 수도 있겠습니다. 스스로 열을 내며 타오르는 해와 달리 달은 아무것도 뿜어내지 않습니다. 그저 해가 쏜 빛을 반사해 선물할 뿐이지요. 선한 느낌으로 주목받기 위해선 해보다는 달이 되는 편이 좋겠습니다. 설화와 역사에 따라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 과거도 있지만 숨 막힐 듯 고요한 밤의 하늘에서 은은하게 나의 공간을 채우는 달빛은 몇 시간이라도 마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은 소중한 얼굴들이 떠오르는 시간이고, 흐르는 음악도 내 몸속에 100퍼센트 흡수되는 시간입니다. 달빛에 비친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애월에서는 밤을 그냥 넘기면 억울할 노릇입니다. 그 이름만큼 달빛을 바라보기 좋은 공간이 또 어디 있을는지요.
제주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GPS는 여러분을 제주시 용담동에서 찾아냅니다. 그리고 애월은 공항에서 가장 근접한 '읍(邑)'입니다. 번잡한 공항 주변을 벗어나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제주다움은 애월에서 입니다. 갓 도착한 여행객의 설렘이 최고조가 되는 공간입니다. 제주를 흠뻑 느끼고 일상으로 복귀 전 마지막으로 묵은 때를 털어낼 곳 역시 애월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벅참과 아쉬움의 상념을 모두 담고 있는 공간이지요. 어쩌면 연인의 부재를 새로운 시작으로 메우기 위해서, 당장의 좌절을 실현 가능한 꿈으로 바꾸기 위해서 영화는 애월을 무대로 삼지 않았을까요.
애월의 해안도로를 달립니다. 들뜨는 낭만을 주지만은 않습니다. 온몸으로 와 닿는 바람쯤은 견뎌 내야 이 섬에 발을 들여놓을 자격을 갖출 수 있습니다. 낮은 하늘과 현무암을 때리며 흑백의 대비를 만드는 하얀 포말은 여행자의 사연이 무엇이든 속에 있는 상념을 토해내라고 부글거립니다. 지쳐서 흔들렸던 영혼의 한 구석이 거침없이 벗겨집니다. 바다가 있고, 하늘이 있고, 달이 떠 있는 애월은 누구든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애월의 품에 안기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