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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Sep 22. 2020

14 해물탕과 아포가토
-서귀포 소라의 성&허니문하우스

모든 곳의 어떤 것들








 프랑스어에서만 느껴지는 그야말로 '앙데팡당(Indépendant)'한 발음 중에도 'r'의 오묘함을 따라잡을 요소는 찾기 힘들 듯합니다, [ér]라고 표시된 기호를 그저 [에르]하고 읽어도 어색하기 그지없겠고요. 프랑스 단어 속에 들어있는 이 문제의 r은 입천장을 기술적으로 긁어줘야 제 맛이 나는 법이죠. 한글 자모로 최대한 표현해 보려 해도 'Paris'는 프랑스 [빠리]가 아니라 [빠 ㅎㅋ+ㅣ]라는, 도무지 존재하지 않을 자음의 결합이 있어야 할 지경입니다. 프랑스어 회화의 기본이 되는 이 r 발음의 특이성은, 그래서 오히려 가장 쉽고도 분명하게 프랑스어를 구별해 낼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그리(Charles-Edouard Jeanneret-Gris)',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의 본명입니다. 전통적인 관습에 얽매여 있던 건축, 예술계의 심장부에서 과감한 개혁을 주창하는 글을 쓰며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그의 필명 중 하나가 '르 코르뷔지에'였습니다. 하긴, 사람 이름 앞에 정관사 'le'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 건축가 이름 중에 으뜸으로 세련되어 보이니 불만은 없었던 것이죠. 발음으로도 'Le Corbusier'는 그 특유의 r이 중간에 걸려, [르 꼬ㅎㅋ +ㅡ 뷔지에]라는, 에펠탑이 눈앞에 보일 것 같은 매력적인 음가를 가지고 있으니 본명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르 코르뷔지에, 그의 탓인 것입니다. 


            

   르 코르뷔지에(1887 ~ 1965)


 진정한 제주에서의 삶을 살아보겠다며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벌써 6년 전의 일입니다.  착공 전 2,3년은 새로운 직업을 모색하듯 건축 관련 최신 도서와 잡지를 닥치는 대로 파고들었습니다. 천장은 박공이어야 하고 외장은 청고 벽돌이 일부라도 들어가야 하며, 데크로 이루어진 중간지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등 나름의 기준이 생기더군요. 건설 붐이 최고조였던 때라, 심각할 정도로 오래 걸렸던 공사가 끝나고 난 후의 심정은 복잡 미묘했습니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떠올라 울컥하는 감정과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기대감, 뭐 그런 것들이 무작위로 섞여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어떻게든 완공된 나만의 집을 바라보며, 복잡한 양식을 따르지 않으면서 필로티 공간의 효용성과 직선의 간결한 아름다움을 구현해 냈다는 자아도취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흔히들 집 지으면 10년은 늙는다고 하는데요. 고생은 고생대로 실컷 할 가능성이 높지만 준공 후의 뿌듯함도 있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대략 3,4년 정도 늙어 보일 수 있다고 하면 적당할 듯했습니다.  

  

 건축도 트렌드입니다. 전원주택이 늘어나는 제주에서는 이런 트렌드에 충실했던 것이 분명한 집들이 곳곳에서 목격됩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는 제가 지은 집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정말 이상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 건축의 경향에 발맞춰 지어진 이 수많은 집들이, 7,80년 전 코르뷔지에가 추구하고 설계한 집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필로티와 가로로 긴 창이 있고, 철근콘크리트의 간결한 구조로 내부의 구성도 자유롭습니다. 옥상정원은 지금 시대에도 핫한 건축요소입니다. 많은 건축비평가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도 현대건축의 커다란 부분은 르 코르뷔지에가 시작했던 모험의 연장선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당시 코르뷔지에의 신념이었던 건축의 기능화와 단순화 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가 만들어낸 집단 주거체에 혐오감마저 표현하는 비평가들도 부지기수였지만, 시대는 결국 코르뷔지에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오히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열악할 대로 열악해진 유럽의 주거환경을 고려하면 그의 표준화된 건축방식은 되레 필연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들어서 몰개성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것이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 주거체임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코르뷔지에는 공동주택을 건설할 때조차 공간의 조화와 자연을 향한 조망, 개성을 끌어넣었기 때문에 현대의 몰개성 문제를 풀 수 있는 힌트도 제공하고 있는 셈이 아니었을까요. 그 힌트에서 답을 끌어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공동주거체 작품 <위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좌)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빌라 사보아(Villa Savoye)>(우) 


 더위와 연이은 태풍으로 유난히도 힘들었던 여름은 지나갔지만 긴장감이 돋을 정도로 쨍한 공기를 들이마시기까지는 아직 한 달여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괜찮습니다, 걷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 날씨가 된 것만 해도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는지요. 

 알고 보면 재료 중의 대부분은 서해에서 공수한 것일 수도 있는데, 장쾌하게 펼쳐진 서귀포 바다 앞이라는 까닭으로 그 맛을 잊지 못한 것일까요? 그곳이 여행잡지에 소개되는 '해물탕집'이었던 시절에는 제주여행 중 무조건 한 끼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해결하러 찾아가곤 했습니다. 식당 건물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어도 해물탕을 먹기엔 과분한 공간이 아닌 건지 괜한 죄책감마저 들 정도였으니 실은 뭘 먹으러 갔다기보다 뭘 보러 간 김에 끼니를 해결했다는 편이 맞겠습니다, 음식이 아닌 공간의 이미지만 남아있었으니까요. 그곳의 실체는 한참 뒤, 어리석게도 제주에 정착한 뒤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정방폭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관광안내소에서 방향을 물어봅니다. 워낙 오랜만이라 길을 묻지 않고서는 찾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퇴근 후 50분, 내 앞에 바다가 지척인 산책길이 놓여있었으니까요. 20미터쯤 앞에는 혼자 여행을 온 듯한 남성 분이 배낭을 둘러메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앞날을 차분히 모색하며 여유 있는 일정을 보내고 계신 건지, 빠듯한 일상 속 귀하디 귀한 잠깐의 휴가를 얻어내 후회 없이 제주를 탐색하고 계신 건지 모를 일입니다만 왠지 모르게 기운을 불어넣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가벼운 일탈은 낯선 이들에게도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인지요. 


 

 오른편에 바다를 끼고 정돈된 데크길을 따라 초가을을 걷습니다. 눈에 보이는 섶섬은 이제 이중섭이 그랬던 것만큼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태풍으로 고생 많았던 바위와 절벽으로부터 내쉬어진 안도의 한숨은 향기가 되어 코끝에 전해져 옵니다. 채 5분도 가지 않아 말도 안 됐던 그 해물탕집이 등장합니다. 'The Castle of Shell'이라는 영문 표기보다는 한글 이름이 한층 어울리는 곳. 

 '소라의 성'입니다.


  소정방 폭포로 이어지는 산책길이자 올레길 위에 있는 소라의 성


 '소라의 성'은 <빌라 사보아>와 같이 건축가가 지은 명칭이 아닙니다. 단순하게도 옛 해물탕집 주인장이 지은 이름일 뿐이죠. 식당 이름 치고는 건물의 격(格)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듯하니 주인장의 작명 센스는 그만하면 합격점을 줘도 될 일이었습니다. 1969년에 지어진 소라의 성은 공식적으로 설계자가 미상이지만, 전문가들은 이 건물이 대한민국 현대건축의 선구자 고(故) 김중업의 작품이라고 입을 모아 주장합니다. 준공연도를 돌아보면 참으로 의아합니다. 불과 50년 전의 건축물인데 누가 설계하고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뇨. 이 작품을 의뢰했던 분의 후손이라도 나타나 속시원히 답을 해준다면 최선이겠으나 설계와 축조의 양식을 볼 때 김중업의 그것으로 확신하는 건축가들이 대다수이므로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의 해답은 내려진 것이겠습니다. 


 평양 출신인 김중업은 일본의 고등 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한국전쟁 기간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요, 이 시기에 이중섭과도 교류를 했다고 하니, 제주에 작품으로서 연(緣)을 둘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중업은 1952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 예술가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 르 코르뷔지에를 알게 되었고, 이 만남을 계기로 약 4년이라는 소중한 경험을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서 쌓게 됩니다. 물론 저명한 건축가 밑에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김중업을 찬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프랑스와 유럽 전체가 인정하는 그만의 실력을 키웠을뿐더러 고국으로 돌아와 숱한 명작을 설계하면서 코르뷔지에의 양식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도 그를 한국 현대건축의 시조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입니다. 한때 우리나라 최고층 빌딩이었던 삼일빌딩과 명보극장, 친숙한 88 올림픽 상징 조형물, 그리고 지금은 아쉽게도 헐린 구 제주대학교 본관 건물 등이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건축가  김중업(1922 ~ 1988)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올림픽공원 상징조형물>, <삼일빌딩>, <구 제주대학교 본관>


 그곳에 깃든 스토리를 알고 난 뒤 바라보는 대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해물탕을 먹으며 이 건물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어떻게 이런 바닷가 절벽 위에 건축허가가 났을까 하는 의심뿐이었습니다. 태풍이었는지 기억은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뒤집어질 듯한 파도의 포말이 건물 전체를 때리는 바람에 겁이 나기도 했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건물과 배경의 조화에 더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제라도 소라의 성을 작품으로 느껴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눈 부릅뜨고 돌아볼 심산입니다.

 지금의 소라의 성은 여행자 북카페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서귀포시가 매입해 관광객들을 위한 쉼터로 조성한 것인데요, 제주와 관련된 책들과 전통적 베스트셀러 위주로 도서를 구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주변 관광지와 올레길 안내까지 해 주시는 분들도 상주해 있어 여행자의 쉼터로 이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예전처럼 복잡한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손님들로 꽉 찬 식당도 더 이상 아니니 건물을 감상하기엔 제격이었습니다.


여행자를 위한 북카페로 자리 잡은 소라의 성 내부 1층(좌)과 2층(우)


 외부를 찬찬히 둘러보니 절대 영업을 위한 건축물이 아니었을 거란 확신이 듭니다. 아무리 가볍게 보아도 별장은 되지 않았을까요. 건물의 격을 이야기하기 전에, 식당으로서 기능을 하기엔 영 적합해 보이지 않습니다. 주방은 도대체 어디였는지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소라의 성의 1층과 2층을, 음식을 담은 쟁반을 가지고 오가기에는 꽤나 불편했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식당으로 바뀌기 전, 서귀포의 절경이 펼쳐진 이 건물의 주인이 무슨 사연이 있어서 주거를 포기하게 된 건지 그것이 알고 싶었습니다. 

 외관이 어딘가 익숙한 것 같은 느낌은 예전에 와 봤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김중업인데, 오히려 스페인의 자존심 안토니 가우디(1852 ~ 1926)의 작품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르 코르뷔지에도 그의 말기 작품 중 <롱샹성당>에서 비정형인 곡선의 공간을 창조해 내지만 소라의 성은 아무리 봐도 가우디의 곡선에 가깝습니다. 저만의 인상일까요? 르 코르뷔지에 보다 한 세대쯤 전에 가우디가 활약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중업이 파리에 있을 때 가우디의 작품들이 이미 상세한 분석이 되고 참고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김중업이 아닌 가우디의 제자가 제주도의 풍경에 반해 이 건물을 몰래 지어놓고 도망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공식적으로는 아직 설계자 불명이니까요.   


  소라의 성

구엘공원, 바르셀로나(가우디 作)

소라의 성(좌), 프랑스 롱샹성당(우)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 롱샹성당의 지붕은 특이하게도 게딱지를 모티브로 했다고 합니다. 웬일입니까. 김중업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서귀포의 이 작품명도 결국 '소라'의 성이 되었네요. 해물로 연결된 르 코르뷔지에와 김중업,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요. 


 다시 걷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주 찾았던, 심지어 학창 시절 부모님과 제주여행을 올 때 경치가 좋아서 들렀던 허니문하우스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주에 오래 살았다고 지리에 통달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인상 속에 깊게 새겨져 있는 이 두 곳이 이리 지척이었다니요. 작가의 산책길이자 올레길인 소라의 성 앞길을 오던 방향대로 그대로 걸아가면 소정방 폭포가 나오고, 이어서 절벽 위에 지중해풍 리조트 건물이 등장합니다.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는 듯 이국적인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사연이 많은 공간이죠.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4.19 혁명 이후 정부 소유의 허니문하우스로 운영됐습니다. 이후 1970년 민영화와 함께 파라다이스 그룹이 인수한 뒤 시설 보수 끝에 '파라다이스 호텔'로 개장해 큰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 경영악화로 다시 2008년 한진그룹이 인수하게 되는데요, 현재 한진그룹 역시 이곳을 매각할 계획을 세웠다고 하니 우여곡절을 거친 이 아름다운 공간의 사연도 기구하기만 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텔의 가장 바닷가 쪽에 위치한 허니문하우스로 가보니, 이럴 수가요! 카페가 예전처럼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사의 대립으로 리조트 전체가 폐쇄된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건물이라도 볼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터벅터벅 걸어온 건데 문을 열고 손님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님과 제주를 올 때면 꼭 들러야 할 장소였고, 제주에 정착한 이후엔 여름마다 팥빙수를 시켜놓고 서귀포의 바다를 감상하는 '계절성 루틴'의 공간이었기에 앨범에서 옛날 사진을 찾은 느낌 그대로였다고나 할까요.


허니문하우스의 입구와 내부


 일교차가 벌어져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지만 한낮에는 아직도 더위의 꼬리가 남아있습니다. 카페에 앉아 아포가토를 주문했습니다. 팥빙수는 혼자 먹기에 양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주문하기 민망스럽기도 합니다. 진한 커피의 향과 시원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번에 맛볼 수 있으니 적절한 선택이라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입니다만 실은 어린아이의 입맛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선 아포가토가 어울린다고 괜히 끼워 맞춰보는 것이죠. 메뉴의 단점은 있습니다. 천천히 먹어도 5분이면 끝입니다.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먹어야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허니문하우스는 야외가 백미입니다. 절벽을 따라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으니 관광객들은 입을 다물 줄 모릅니다. 바다를 감상하는 사람들도 있고 산책로에 있는 그네를 타 보는 연인들도 있습니다. 신혼부부의 성지였으므로 이 그네는 오랜 시간 포토 스폿 역할을 충실히 해 오고 있는 셈입니다. 


 허니문 하우스 카페의 외부


 재수를 하고 있을 때니 무려 30년 전입니다. 문제를 풀어도 하나를 더 풀어야 할 시기인데, 고생하는 녀석 며칠 콧바람 쐬고 스트레스 풀라고 제주에 데리고 와 주신 것 같습니다. 정말 아들을 사랑하시는 두 분입니다. 그런데 이를 어쩔까요, 그 배은망덕한 녀석은 제주에 있던 사흘 내내, 밤에 때 아닌 산책을 나가겠다며 몰래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습니다. 숙소 바로 앞까지 와서는 껌을 닥치는 대로 씹어 흔적을 없애는 음험함까지 보이면서 말이죠. 비록 한참 후의 일이지만 그 녀석 결국 담배를 끊긴 했으니 뒤늦게나마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요? 

 

 USB에 담아놓은 수 백곡을 랜덤으로 들으며 드라이브하는 것이 저에게 큰 힐링이 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동을 켜고 오디오 버튼을 누르니 성시경의 <제주도의 푸른 밤>이 흘러나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꼭 사람만이 그 대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도심을 벗어나 조금만 달리면 숨이 멎을 듯한 제주의 본모습이 훌쩍 다가옵니다. 제주에 살면서도 가끔 실감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긴 시간 살아왔어도 결국엔 이방인일 수밖에 없어서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황홀한 아름다움을 찾으러 오는 이 섬이 정말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입니다. 차 안 가득 흐르는 <제주도의 푸른 밤>이 제주에서의 시간을 거슬러 돌아보게 만듭니다.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공간들이 하나씩 스쳐갑니다. 


 스쳐가는 공간들 중 다시 소라의 성이 떠오릅니다. 팔팔 끓던 해물탕이 보입니다. 거센 바람에 절벽을 때리는 파도를 보며 식사를 하는 것도 꽤 운치가 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짰습니다. 무척.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소금기가 잔뜩 실려온 것 같습니다. 

 그때의 해물탕이 짰던 것은 분명 바닷바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도 멋진 소라의 성에서 만든 해물탕이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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