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는 생일이 몰려 있습니다. 저와 제 아들의 생일이 있고요, 아들 생일 사흘 뒤가 사람이 아닌 우리 식구 중 맏인 '리카'의 생일입니다. 2010년 9월생이니 사람이었다면 당당히 초등학교 고학년생으로 좌충우돌할 나이였겠지요. 포메라니안 아빠와 몰티즈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그저 몰티즈처럼만 생긴 귀여운 녀석입니다. 성격이요? 소심 그 자체입니다. 다른 견공들이 있는 자리는 관심도 없고 오직 아빠뿐입니다. 물론 친아빠가 아닌 저 말입니다. 사람 나이로 70 가까이 된 셈이라고 하니 소심한 성격에 행동은 더 느려졌습니다. 다행히도 생일 전날 밤, 여느 때처럼 리카가 제 팔베개를 베고 누워있을 때 생각이 나더군요.
"얘들아, 두 시간 뒤면 리카 생일이야!"
"와 그렇구나~~~"
생일이라고 해서 고깔 씌워주고 특식을 주고 한 적은 없습니다. 하긴 사람 가족들에게도 다정다감하게 특별한 날을 축하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으니까요. 반성을 해야겠습니다만, 강아지 자식 - 제 자식이란 뜻입니다 - 들에게 생일이라고 해서 특별한 이벤트는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평생 태어난 날을 기억해 주고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준다면 그 이상 반려견들에게 훈훈하게 느껴지는 것이 더 있을까 싶어서 이기도 합니다.
애니멀 호더(Animal Hoarder)는 아니지만 손이 그만큼 많이 갈 수밖에 없으니 반려견 네 마리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 솔직히 걱정은 됩니다. 집 안에 같이 사는 녀석들이야 수시로 놀아줄 수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밖에서 외롭게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인 진돗개 '리내'에게는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미안한 마음 가득입니다. 다른 집에 갔더라면 훨씬 행복했을 거라는 자책이 들어 산책을 할 때면 그 큼지막한 덩치를 몇 분 동안 품에 안고 다니기도 합니다. - 오히려 학대일까요? - 괜스레 반려견의 집합처를 자처해서 한 마리도 최선을 다해 키우고 있지 못한 건지,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가정형편은 생각지도 않고 반려견들의 복지까지 책임지려 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반성으로 시작해서 사람과 동물의 행복을 하나씩 찾아보고자 합니다.
아버지가 제주에 계시던 어느 날, 슬쩍 찔러봤습니다.
"아버지 강아지 한번 키워 보실래요?"
아들 집에 놀러 오시면 리카를 그리도 예뻐하셨습니다. 리카도 은근히 할아버지를 잘 따르는 모습을 보니, 반려견이 이제 사라져 가는 손주들의 애교를 대신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자그마한 주택에 사셨으니 그리 크지 않은 중형견 정도 마당에 두시면 되겠다 싶더군요. 지척인 거리니 강아지 관리는 제가 매일 해도 될 것 같았습니다.
사실은 네댓 살 정도의 어린 시절, 집에 큼지막한 반려견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에게 물어봤습니다.
"정말로 우리 집에 개가 있었다구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어머니가 그러셨습니다.
"있었는데 어느날 사라졌어. 너희 아버지가 범띠잖니, 범띠 있는 집에선 개가 도망간다더라"
정말로 희고 큰 덩치의 개가 있었는데 입양한 지 얼마 안돼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개에 대한 범띠의 태생적 악연을 끊어드리고 싶기도 했고, 아버지 역시 저의 제안에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다음날, 제주시 영주고등학교 부근에 있는 제주특별자치도 동물보호센터를 찾았습니다. 입양을 서두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유기돼 들어온 수많은 견공들을 보며 적당한 한 마리를 찾아보는 저의 행동이, 마치 펫 숍의 유리창에 전시되어 있는 강아지들 중 가장 귀여운 한 녀석을 고르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주인을 찾거나 새로운 가정에 입양되지 않는 한 곧 비극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녀석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저는 그저 미소를 띠며 곳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니 말입니다.
다음날 아버지는 아무래도 개를 책임질 체력이 안될 것 같다고 하시면서 가끔 와서 리카나 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멍청한 제안을 한 것이었고, 아버지는 현명한 결정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느슨한 책임감만으로 매번 저지르고 보는 이놈의 어리석음에 후회와 자책은 반복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주 동물보호센터 입구(좌), 센터 초입에 있는 유기동물 검사, 치료실(우)
3년 만에 동물보호센터를 다시 찾았습니다. 주무관 한 분을 붙잡고 10분 동안 이것저것 캐물었습니다. 어찌나 친절하시던지요. 유기동물이 들어오면 열흘간 공고 후 제주도로 동물의 소유권이 넘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동물보호법에 나와 있는 그대로였습니다. 제20조 1호에 따르면 '유기동물은 공고한 날부터 10일이 지나도 소유자를 알 수 없으면 지방자치단체로 소유권이 이전된다, 그리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안락사 처리가 가능하다'. 그러니 열흘까지는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이 되지만 그 이후에는 보호센터의 사정에 따라 언제든 안락사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근무하는 모든 분들이 하나의 생명이라도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으나 대개는 20일 정도가 지나면 운명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포획되는 개체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 100마리가 들어오면 보통 10마리에서 15마리 정도만 새로운 가정으로 입양된다고 하니 대다수의 생명들은 슬픈 운명에 처해지는 현실입니다. 그렇다 해서 안락사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유기동물을 그냥 놔둬야 할 수도 없습니다. 유기된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결코 바람직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기된 대형견들이 공고기간 머무는 곳
열흘의 공고기간 후 머물게 되는 견사와 그 안에 있던 유기견
검사실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 대형견들입니다. 가장 많이 버려지고 안락사되는 비율도 가장 높은 녀석들이라고 합니다. 덩치가 크다는 것이 유일한 죄였습니다. 열흘이 지나 기적 같은 입양을 더욱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유기견들은 훨씬 더 안쓰러워 보입니다. 누군가 나타나 줄까요? 얼룩덜룩한 무늬가 전통 제주견과 흡사한 사진 속 녀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입양해 갈 것도 아니면서 왜 왔는지 원망이라도 듣게 될까 겁이 났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식사 한 끼와 물 한 모금이 간절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인데 동물까지 책임져야 할 여유가 있는지 반문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타당한 말입니다. 눈앞에 급박한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과 동물이 있다면, 사람을 구하거나 돕는 게 상식적인 행동이겠지요. 물론 ARS 전화 등을 통해 지구촌 어느 곳의 빈민도 물질적으로 도울 수 있겠지만 여기선 그런 간접적인 원조는 제외하고 오직 직접적이고 긴박한 도움만을 예로 들겠습니다.
왜 같은 위험을 겪고 있다면 사람을 먼저 도와야 할까요? 나와 같은 종(種)이라서 그럴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답한다고 한다면 단순한 종 이기주의의 발로라고 여겨질 수 있는 노릇입니다. 보다 그럴듯한 이유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등한 사유 능력과 자의식, 또 거기에서 발현되는 존엄성 때문이 아닐까요. 결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해 쇠약해지거나 병에 걸리거나, 또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고통을 겪을지 연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체적인 고통을 넘어 그의 가족과 친구들, 살아온 소중한 기억들, 건강하거나 더 살게 된다면 누렸을 행복을 모두 잃게 될 상황을, 우리의 사유를 통해 자신의 일처럼 상상해 보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의식'을 갖는다는 게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많은 학자들은 '거울'을 떠올리라고 말합니다. 거울을 보고 거기에 비친 형체가 '나'라는 것을 인식하고, 다른 대상들에게 '내가 이런 식으로 보이는구나' 하는 사실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식하는 존재가 바로 자의식이 있는 주체라는 거죠.
언젠가 TV에서 수족관 한쪽 벽에 고정한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몸을 감상하는 흰돌고래 벨루가를 본 적 있습니다. 거울 앞에서 한동안 취할 수 있는 여러 동작들을 선보이며 자신을 의식하는 행동이, 마치 서너 살 아이들이 거울을 보며 혀를 내밀고 고개를 갸우뚱대는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이더군요. 전문가들은 돌고래를 포함해서 오랑우탄, 침팬지 등의 영장류와 코끼리, 심지어 까치 등을 이렇듯 자의식을 가진 동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자의식을 가진 존재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에 이어질 미래까지도 인식한다고 하는군요. 인간의 자의식 수준이 압도적으로 높은 건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다음으로 분류될 동물 종으로는 개과나 고양잇과의 동물입니다. 의식적인 행동과 더불어 인간과의 감응까지 가능한 부류지만 자기 자신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따로 떼어놓고 보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두신 분들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한 이야기입니다. 자의식이 없다니요, 얼마나 영특한지 내 강아지는 명령어를 열 가지나 알아듣는 데다 우리 고양이는 집사가 시무룩하면 곁에 다가와서 사람처럼 위로도 해 주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반복된 것에 대한 반응은 자의식이 없어도 가능한 학습능력이라고 합니다. 확실한 반복으로 인한 특정 행동은 뇌 속에 저장되어 있으나,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능력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미래를 대비하는 듯 먹이를 저장하는 개미나 벌들의 집단행동은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그것은 특정 종의 DNA에 담겨 무조건적으로 후세에 전달되는 특질이라 자의식으로 인한 행동과는 별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의식의 수준으로 동물을 줄 세우다 보니 당혹스러운 물음이 가능해집니다. 동네에서 매일 보는 철수네 집 강아지와 그 집 위의 전깃줄에 줄곧 앉아있던 까치가 뱀에게 잡아먹힐 상황에서, 둘 중 한 마리만 살릴 수 있다면 어떤 동물을 선택하겠느냐 하는, 심히 유치하고도 섬뜩한 질문이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 예상보다 더 똑똑해 자의식까지 갖추고 있다는 까치라 해도 사람과 훨씬 가까운 강아지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개가 인간과 오랜 세월 곁에 있어 왔다는 답 만으로는 논리가 부족해 보입니다. 자의식을 가진 존재는 시간의 흐름을 자신과 엮어서 감지할 수 있으니 거울에 비친 '나'라는 존재가 없어질 미래를 어렴풋이나마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의식을 갖지 못한 동물에 비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클 수 있지 않을까요? 개나 고양이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겠지만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나 자신'의 부재에 따른 공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응당 까치를 구해야 하는 것이 정답인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선택은 다릅니다. 인간과 가깝다는 이유로만 개나 고양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근거가 있을지요. 만약 개의 조상인 늑대의 습성처럼 지구 상의 모든 견공들이 야생에서만 살아가거나, 친화력이 높은 극히 일부만 인간의 집을 지키는 경비견으로 살아가는 정도라면 죽음을 앞둔 개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정도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들의 필요에 들어맞는 습성과 외양을 갖추도록 개들의 번식 행태를 교란시켰습니다. 크기를 줄여 실내에서 키우기 알맞도록 서로 다른 종들을 교배시켜 왔고요, 만족스러운 개체가 등장한 이후에는 오히려 다른 종과의 교배를 막고 근친의 교배만을 유도함으로써 이른바 '순종'의 우수함을 창조해 냅니다. 근친의 교배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동물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합스부르크 가(家)의 사례처럼 인간의 역사에서 근친혼의 폐해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깨물고 싶을 정도로 극강의 귀여움을 뽐내는 순종 강아지들은 근친교배의 결과로 슬개골 탈구, 특수한 심장병 등 각종 결함을 안고 태어나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이 같은 생명체들은 그 결함으로 인해 독립적으로 살아갈 능력을 잃어버리고,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생존조차 불가능한 비극적인 종(種)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깜빡 넘어가곤 하는 애교와 집착은 그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생존 수단에 다름 아닙니다.
"가까이 와요, 곁에 없으면 무서우니까. 날 버리지 않을 거죠?"
어쩌면 그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까치가 아닌 반려견을 선택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인간 자신을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생명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하도록 만들었다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동물보호센터에 있는 대다수의 동물들은 그런 책임에서 무참히 버려진 존재들인 것입니다.
유기견들을 위한 공간을 나오니 맞은편 아담한 건물이 보입니다.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오롯이 유기묘들을 위한 보호소입니다. 3년 전엔 따로 마련되지 않았던, 고양이만을 위한 공간이 생겼습니다. 먹이를 먹지 못할 정도로 어린 아기들과 막 젖을 떼고 사료를 먹는 어린이들, 성묘들이 따로 구획된 공간에서 전문 관리사분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 안에서의 모습만큼은 아무런 걱정도, 위협도 없어 보입니다. 이방인의 방문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옆으로 바짝 다가와 붙습니다. 이 귀여운 녀석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제주동물보호센터 내 유기묘 보호시설
애월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나서 시작된 고양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더군요. 길고양이들이 워낙 많이 돌아다니는 동네라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다음날은 주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밖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차에서 내리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다시 그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들만의 의사소통을 위한 소리가 아니라, 사람에게 어서 가까이 와 달라고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누구든 듣게 됐다면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소리였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하얀 물체가 웅크려 있었습니다. 눈같이 하얀 고양이였습니다. 어서 안아달라는 듯이 음정이 한 옥타브 올라갑니다. 밝은 현관 앞으로 데리고 가서 자세히 보았습니다. 며칠간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먼지가 엉켜 붙은 부분이 있었지만 길고양이는 절대 아닌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왼쪽 눈은 파란색, 오른쪽 눈은 노란색이더군요. 말로만 듣던 오드 아이(Odd Eyes) 고양이였습니다. 커다란 종이상자 안에 물을 담은 접시와 강아지 사료를 넣어주고 한참을 쳐다보았습니다.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옆집의 할머니께서 이튿날 아침 궁금증을 풀어주셨습니다. 얼마 전 왔다 간 펜션 손님들이 두고 간 녀석이라고 하시더군요. 섬에 와서 반려동물을 유기하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더니, 그 버려진 동물이 정말 있었습니다. 어떡합니까. 동물병원에 데려가니 이 녀석은 '터키시 앙고라(Turkish Angora)'종이고 태어난 지 1년 남짓 된 암컷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양이 사료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고양이에 대해서는 아무 지식도 없던 터라 급하게 인터넷을 통해 반려묘 키우는 방법을 검색했습니다. 강아지 아빠를 떠나 이젠 집사로까지 임명되는구나 싶었지요. 아이들의 작명으로 레몬이라는 새 이름까지 생겼습니다. 새하얀 녀석인데도 꽤 어울렸습니다. 높은 곳을 선호하는 습성 그대로 다락에서 주로 기거하던 레몬이는 흔히 말하는 '개냥이'였습니다. 무슨 고양이가 누워있는 집사 배 위에 올라오나요. 이전 주인에게 부렸던 애교의 본능이 나오는 건지, 아니면 오히려 경험하지 못한 사랑을 애절하게 갈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고양이를 키우는 보람 중 하나가 꾹꾹이를 받는 느낌이라고 하지요, 레몬이는 그게 뭔지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레몬이는 몇 달 후 입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를 여러 마리 기르고 있는 믿음직한 가정이었습니다. 입양 전날 밤, 술을 적당히 마시고 들어왔습니다. 씻지도 않고 바로 다락으로 올라갔고, 그날도 레몬이는 제 배 위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특별하게 만난 그녀를 보내기가 싫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말 걸 그랬습니다. 속이 쓰리고 속이 상했습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녀석이라 보낼 때의 짠한 마음이 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이별을 해야 하는 것은 집 안에 있는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걱정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별이 싫다면 거두지 말았어야죠, 제 선택이었으니 제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애완'동물은 '반려'동물이 되었습니다. 한동안은 혀와 입이 기억하는 '애완'이란 말이 절로 나올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했습니다.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애완'동물이라고 말해 버리면 괜스레 동물을 장난감 취급하는 몰상식한 사람처럼 보이지나 않을까 움츠러들었던 것이죠. 이 글에서도 저는 잠재적으로 들을 수 있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 '반려'라는 단어를 신경 쓰며 동물 앞에 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반려의 뜻을 찾아보았습니다.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 하는 짝이나 동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동물 차원을 넘어 행동과 생각을 서로 읽어내는'동무'가 되는 경지에 올라야 반려견이나 반려묘라 부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과연 그 경지까지 갈 수 있는 사람과 동물의 관계가 몇이나 될까 하는 의심에서, 일부에서는 '반려'는 지나친 수식어라고 말합니다. 가까이 두고 보며 귀여워하는 '애완'이란 표현이 그리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까이 두고 예뻐하고 귀여워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더구나 짝이나 동무는 '기르는' 대상도 아닐뿐더러 주인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전적 의미까지 뒤적이며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것이 과하다는 것을요. 자신의 사랑하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더 위하고픈 마음에서 이왕이면 훨씬 다정다감한 표현을 써서 존중해 주겠다는 것이 뭔가 문제겠습니까. 반려의 정확한 뜻이 무엇이건 '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겠지요. 다만 '애완'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스트레스 역시 심각하게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옆자리에서 삶의 한 때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대상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사랑으로 보살핀다면 '반려'건 '애완'이라 부르건 큰 상관은 없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전 끝까지 '반려'동물이라 쓰겠습니다. 한 치라도 오해받는 일이 없기를 바라니까요.
한 가족이 유기견을 살피고 계십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함께 할 식구를 입양하러 오셨으니 얼마나 떨리실까요,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실 겁니다. 이렇게 소중한 인연이 또 만들어집니다.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방송을 보면 동물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참 다양해진 것 같습니다. 옛날엔 <동물의 왕국> 같이 정색하고 동물의 실체를 다루는 것이나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처럼 과정은 문제풀이 일지 몰라도 결국엔 동물의 습성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전부였다면 요즘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스토리 위주의 프로그램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데요, 덕분에 반려동물을 자연스럽게 식구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조성되었고 시청자들로 하여금 동물의 존엄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도 같습니다. 동물의 존엄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인간을 배려하는 마음도 덩달아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견해는 다를 수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리 곁에 있는 동물의 권리는 더욱 존중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습니다. 사회와 제도 역시 그에 맞추어 끊임없는 변화가 있어야 할 텐데요, 아직은 먼 이야기인 듯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민법상으로는 동물은 물건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동물을 이동 가능한 재산인 '동산(動産)'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죠. 형법의 조항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의 동물을 학대하면 학대죄가 아닌 '재물손괴죄'가 적용됩니다. 아무리 달리 해석해 보려 해도 시대에 맞지 않는 법문입니다. 개정이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것이 법이기 때문에, 대신 이를 보충하는 법률이 '동물보호법'으로 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꽤 구체적입니다. 제3조를 예로 들면
1. 동물이 본래의 습성과 신체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할 것
3. 동물이 정상적인 행동을 표현할 수 있고 불편함을 겪지 아니하도록 할 것
5. 동물이 공포와 스트레스를 받지 아니하도록 할 것
신기하게도 홀수 항들이 유독 단순한 본능보다는 한 단계 높은 정서적 요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습성을 유지해 줄 것, 불편하지 않게 할 것, 그리고 스트레스받지 않게 할 것. 이 정도로 동물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졌다면 민법과 형법도 이제는 손질이 필요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려동물이 있는지, 동물을 좋아하는지 여부를 떠나서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개를 트럭 뒤에 묶고 달려 학대한 주인이 검거됐다는 뉴스만큼은 더 이상 보지 말아야겠죠. 법과 제도는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뉴스가 없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친절한 설명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자 주무관께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또 오라고 하십니다. 꼬치꼬치 캐묻기만을 위해서 다시 올 수 있을까, 벌써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 많은 녀석들이 한 가정의 식구가 되어 센터를 떠나는 모습을 얼마나 보고 싶으실까요. 슬픈 일은 줄어들고, 기쁘고 축복되는 일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TV에선 고발 프로그램이 이른바 '반려견 공장식 사육'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펫 숍의 진열장에서 강아지를 '구매'하지 말고, 보호센터의 유기견을 '입양'하라고 합니다. 진열장에 있던 강아지를 구입한 적이 있는 입장에서 낯이 붉어지면서도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지 의아하기도 합니다. 보호센터의 강아지들도 기구한 운명이지만, 어미와의 제대로 된 교감도 없이 차에 실려 숍으로 온 강아지들도 안쓰러운 것 아닐까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숍에서 강아지, 고양이를 '쇼핑'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으니 공장에서의 '공급' 역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요. 찾는 손님이 없어 숍의 진열장이 텅텅 빈다면 자연히 공장식 사육도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몰론 펫 샵의 모든 동물들이 번식 공장에서 왔다는 뜻은 아닙니다)
토론이나 고발 프로그램이 고구마 100개를 먹은 듯 가장 답답하게 느껴질 때는 결론이 나지 않을 때입니다. 설사 그 결론이 종국에 가서는 잘못되었고 혹은 채택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딱 부러지는 해답을 시청자에게 던져준다면 얼마나 속 시원할까요.
반려동물 문제를 주제로 한 토론이었다면 이렇게 마무리 지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보호센터에 있는 유기견이든 펫 숍의 진열장 안에 갇혀있는 강아지든 누군가 책임져 줄 사람은 필요하다,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면 한없이 취약한 존재들이므로. 그렇다면 유기되어 임시로 보살핌을 받고 있는 보호센터의 유기견들은 당연히 가능한 만큼 많은 수가 입양되는 것이 바람직하니 적극적인 입양 홍보가 필요하겠고, 불법 공장식 사육을 근절하기 위해선 지금 이 순간 숍에서 전시되고 있는 동물들까지는 최대한 많이 입양되도록 하나 그 외에는 단 한 마리의 개체도 더 이상 받지 않도록 한다.'
실현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유명 작가였다면 여기저기서 협박의 목소리도 들었겠지만 그럴 리 없으니 다행이지요. 거슬릴 것이 없는 자의 신분이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안을 해볼까 합니다.
자치단체 별로 부여된 동물보호의 의무는 각 자치단체의 사정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곳, 즉 경제 자립도가 높은 자치단체는 직영 동물보호소를 산하에 두고 공무원을 파견해 관리하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곳은 유기동물 보호의 기능을 민간에 위탁한다고 합니다. 전문적이고 위생적인 민간기관에 맡긴다면야 공공 보호소 못지않은 효과적인 관리가 이루어지겠지요. 문제는 위탁할 만한 곳을 찾기 힘들다 보니 불법적인 개 농장에 위탁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TV 동물농장>에 가끔 등장하는 몸서리 처질 만한 개 사육장을 떠올리시면 되겠군요. 마구잡이식으로 포획된 개들이 좁디좁은 철창에 갇혀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다가 결국 고깃감으로 팔려가거나 평생 번식을 위해 질긴 생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악마의 공간 말입니다. 동물의 지옥과도 같은 곳이 보호소로 지정되는 현실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제안이라고는 하지만 부탁의 성격이 짙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유수의 대기업들이 이 신성한 의무를 맡아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지자체의 직영 보호소는 말할 것도 없고 민간위탁 보호소에 지원되는 금액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양심적인 민간 기관조차 제대로 된 동물의 보호가 불가능할 정도니까요. 그러나 늘어나는 유기동물의 비율만큼 예산이 매년 올라갈리는 만무합니다. 공공 성격의 동물보호센터는 그대로 존치시키면서, 더없이 열악한 '민간' 보호소의 운영만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맡아주기를 제안한다는 것이죠. 전통의 대표기업들에 더해 유수의 게임,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자금력도 상당할 것입니다. 물론 한 곳에만 짐을 지울 수는 없겠습니다. 예를 들어 경기와 강원, 호남과 영남,충청 등으로 업체별 구역을 나눈다던가, 범위가 부담스럽다면 경상북도와 남도, 충청북도와 남도 식으로 지역도, 기업도 더 세분화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오직 기업의 일방적 희생만 강요한다면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이자 일방적이고 편협하며 악에 받친 투정에 불과할 것입니다. 동물보호센터의 운영으로 기업은 얻는 게 없을까요? 보편적인 제품의 노골적인 광고보다는 공공의 선을 선도해 나가겠다며 사회적 역할을 다짐하는 기업들의 홍보전이 치열합니다. 이젠 제품의 품질과 서비스를 넘어 공익실현에 주저하는 기업들은 도태의 길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시대인 것이죠, 그렇기에 대기업들은 엄청난 자본을 들여 사회 공헌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익히 알고 있듯 동물복지는 외면할 수 없는 시대의 방향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이 각 지역에 하나의 동물보호소만 운영해 준다면, 투입되는 비용 대비 홍보효과는 실로 엄청날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입니다. 혹시 1기업 1보호소 직영이 엄청난 경영의 위기를 초래할 거라고 변명할 대기업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그럼 대기업이 아니죠. 그렇다면 그들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서라도 동물보호소 운영은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는 사안이라는 것입니다. 유기동물 안식처로서의 기능만 잘 수행해 준다면 국가에서 특정 분야의 세금 감면 등 혜택을 주는 것도 당근책이 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기업의 홍보효과를 계산하지 않고 이 고귀한 사회적 책임을 자발적으로 떠안아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발적인 선행은 모든 국민들이 알아차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회 좋고 기업 좋은 일석이조의 상황을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이 없는 물건조차도 그 의미의 중요성으로 나에게 없어서 안될 것들이 있습니다. 지구라는 별에 떳떳한 생명체로 테어나 존재하는 생명들은 오죽할까요. 자의식을 가진 동물이 아니어도 나와 교감할 수 있는 종들은 다양합니다. 그들이 비록 사람의 욕심에 의해 탄생한 지극히 약한 존재일지라도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지만은 않습니다, 인간의 빈자리를 채워주기도 하지요. 태어나고 말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연히 우리는 사람이 되었고 우연히 그들은 동물이 된 것뿐입니다. 거기에 기가 막힌 우연으로 마주친 우리와 우리의 반려동물입니다. 종을 초월한 우정과 사랑은 삶의 큰 보너스가 될 것 같습니다.
고3이었을 때입니다. 늦잠이 간절했던 휴일 아침에, 웬만해서는 잠을 깨우지 않는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뜬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시장 갔다가 네 동생 데리고 왔다, 일어나 봐라."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눈을 비비고 보니 꼬물락거리는 흑백의 물체가 있었습니다. 물체가 아닌 생물체였습니다. 삽살개였는지 뭔지 아무도 품종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장날 데려오신 강아지였으니 튼튼한 잡종 - 하이브리드라 부르고 싶습니다 - 이었겠지요. 범띠의 집에 왔다가 도망갔던 어린 시절의 그 녀석 이후 처음으로 늘어난 식구, 여동생 '방울이'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한동안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두꺼운 장갑을 끼고 방울이와 한바탕 레슬링을 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하루라도 거르면 안 될 의식에 가까웠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했지만 저는 여전히 개구쟁이 오빠였습니다. 그리고 출가를 하며 결국 배신을 하고 말았습니다. 방울이의 복수였을까요, 결혼을 한 뒤 부모님과 살던 집을 찾아갈 때마다 이 여동생, 어찌나 올케를 잡던지요. 시집살이도 그런 시집살이가 따로 없었습니다.
방울이는 17살까지 장수하며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행복하게 살다 좋은 곳으로 떠났습니다. 제주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저는 방울이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전화로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못난 오빠죠. 무릎을 베고 잠들기 좋아했던 방울이는 하늘에서 잘 살고 있을 겁니다. 저의 영원한 첫 동생입니다. 아마 네 마리의 조카들을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있지 않을까요. 아, 질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동물보호센터를 나와 입간판을 다시 바라봅니다. 'Animal Shelter'라는 뒤의 두 단어에 시선이 모아집니다. 나름 한글 사용 주창자라 자부하고 있으나 'Shelter'라는 단어는 참 느낌이 괜찮습니다. '보호소, 대피소, 피난처, 은신처'라는 해석만 보면 다소 경직된 공간이란 어감이 감지되는데요, 'Shelter'란 발음에선 은근하게 감싸는 느낌과 왠지 모를 포근함이 연상됩니다. 물론 '보금자리'라는 더할 나위 없는 어감의 우리말이 있습니다만 이 영단어를 정확히 표현하는 것 같진 않고, '쉼터' 정도가 위안이 느껴지는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제주의 중산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 Animal Shelter는 진정한 쉼을 기다리는 생명들로 가득합니다. 그 쉼은 현생의 행복 사이 느긋한 쉼일 수도, 슬픔 속에 맞이할 영원한 쉼일 수도 있겠지요.
오늘은 집 안에 있는 세 녀석들과 그 시절 레슬링을 재현해 볼까 합니다. 덩치가 방울이보다 작으니, 봐주면서 살살해야겠습니다. 기습적으로 얼굴에 뽀뽀 공격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