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의 어떤 것들
회식을 왔으니 온전히 즐겨야 하는데 적어도 첫 30분 정도는 괜스레 주위를 의식합니다. 그래도 회식 장소까지 걸어오는 동안보다는 한결 낫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 다들 분위기가 올라올 때쯤이면, 그때부터는 상관없습니다. 온 식당에 우리만 있는 듯 격 없이 잔을 부딪히고 2차는 어디로 갈지 벌써부터 갑론을박입니다. 물론 코로나19 사태 이전 이야기입니다.
다른 지역에도 똑같은 명칭의 '대학로'들이 있습니다. 그중엔 실제 대학생들로 가득한 대학가여서 '대학로'가 된 곳이 있는 반면에, 제주의 대학로처럼 근처에 대학교가 위치하지 않음에도 핫한 젊음들이 운집하는 곳이란 이유만으로 대학로라고 불리는 곳들도 많습니다. 불만이긴 합니다. 대학생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겁니까. 그냥 '젊음의 거리', '청춘의 거리'라 부르는 게 촌스럽다면, 거리 이름을 공모에 붙이면 될 일입니다. 요즘 얼마나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이 많습니까.
제주의 대학로는 제주시청 맞은편에 있는 격자형 골목들의 집합체를 일컫습니다. 수많은 술집과 노래방, 유흥시설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죠. 지금은 코로나19로 저녁 회식이란 건 꿈을 꾸지도 못하지만 신제주 번화가보다 월등한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직장인들의 회식장소로도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주머니 사정도 고려해 주지 않는 고약한 외지 손님이 제주에 와서 당장 돼지고기를 대령하라고 한다면, 대학로로 모시고 가는 게 최선입니다.
회사가 신제주 한복판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시청 부근에서 회식을 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주위에 주차할 곳을 찾기도 힘들어 회식 장소까지 걸어가는 경우도 많았는데요, 밤거리의 배경은 온통 20대 초반의 젊음으로 가득합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내 또래의 아저씨는 찾아볼 수가 없고 어디서 들어봤음직 하나 녹아들기 쉽지 않은 음악소리에, 이 신선한 젊음의 공화국을 이렇듯 침범해도 되는지 의식을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찌질한 건가요? 그렇게 만은 봐주시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젊은 친구들만 노는 곳? 그런 게 어딨어!" 하고 대학로에서 약속을 잡은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갑자기 위축되고 의기소침해지는 변곡점이 있습니다. 굳이 나이로 말하자면 4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시점 정도라고 하면 될까요.
제주시의 대학로, 코로나 19로 인파가 크게 줄어든 모습
스스로 세워놓은 세대 차이의 벽은 얼큰한 기운과 함께 자동문처럼 활짝 열려버립니다. 2차로 이동할 때면 해류를 따라 흐르는 물고기 떼처럼 흐르는 인파에 스스럼없이 합류하지요. 내가 젊음이고 젊음이 나입니다. 누가 뭐라 합니까, 술의 순기능입니다.
프로그램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결국 사람 이야기로 채워지는 회식이 끝나면 큰 도로 쪽으로 나와야 합니다. 버스와 택시가 집결하는 곳이니까요. 길 저쪽 건너편엔 시청의 조형물이 보입니다.
길 건너의 공간을 한참 응시합니다. 참 이상하고, 이상하지 않습니다. 친구와 동료들이 회포를 풀며 일상을 위로하는 구역과 횡단보도로 연결된 저 너머는, 역시 친구와 동지가 모여 부당함에 저항하고 잘못된 것을 마땅한 자리에 돌려두려던 간절함과 안타까움의 공간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대상이 동료와 동지라고 생각하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보색 대비일 수도 있겠고, 억울해 목이 쉴 정도로 눈물을 삼켜야 했던 공간의 곁에 환락과 희열의 공간이 공히 놓여 있는 현실을 곱씹어본다면 지극한 역설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도시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대한민국의 촛불집회 문화는 서울의 광화문 광장은 물론이고 각 지역의 집회'명소'를 탄생시켰습니다. 전국의 집회 현장을 연결하는 뉴스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각지의 단골 집회 장소 역시 익숙해집니다. 그곳은 대부분 백화점이나 관공서가 밀집한 번화가의 광장들이더군요, 제주에는 백화점이 없으니 - 쇼핑의 행복은 줄어드나 과소비 방지엔 유리한 여건입니다 - 밤늦게까지 유동인구가 많은 시청 일대가 제1의 도민 집결장소로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월드컵과 같은 축제의 집결도 있습니다. 국민이 환호로 하나 되는 집결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주시청에서의 집결은 안타깝게도 국가의 잘못된 정책과 비상식적인 정권에 항거하는 비장하고 간절한 집결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집회를 위한 공간으로서의 제주시청 부근은 광화문 광장에 비한다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광장'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없는 것도 같습니다. 집회의 시작이 보통 저녁시간이라 주차된 차들이 빠져나가는 시청 앞 주차장과 집회신고를 하고 집결을 허락받은 종합민원실 건물 앞 차도를 포함한 좁다란 공간이 전부인 것입니다. 제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나자고 하면 나중에 원망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어디 광장이냐는 핀잔과 함께 말이죠.
수없이 많은 모임이 있었습니다. 지역의 언론사들이 연대해 집회를 열 때도 있었지만 같은 생각을 가진 도민들이 분야와 신분을 넘어 자리를 함께 하는 경우가 최근 몇 년 사이 잦았던 게 사실입니다. 기업체 현장실습 도중 숨진 고등학생 이민호 군의 비극은, 세월호 이후 여전히 안전불감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비추었습니다. 시청 앞으로 도민들을 떠민 것은 단순히 노동자의 안전한 근무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습니다. 인권이라는 것이 힘 있고 농익은 리더만 가지고 있는 천부의 권한일 뿐이고,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약자들에게는 때에 따라 주어질 수 있는 선택적 권리에 불과했던, 이 세상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사고 후 한 달여 쯤 지나 이민호 군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추모금 전달을 위한 통화였는데 그때만큼 조심스럽고 죄송스러울 때가 없었습니다. 울음을 삼키고 한숨을 내쉬며 통화를 이어가시는 아버지에게,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비정한 사회의 일원이 한순간의 생색을 위해 자식을 잃은 애끓음을 오히려 부채질하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우리 대다수는 그때의 억울함을 잊어버렸고, 이민호 군의 아버지는 인권단체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얼마나 변변치 못했으면 사회의 부조리를 앞장서서 고발하려 하신 걸까요. 이 사회는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법이었습니다.
가끔은 제주시청 앞 광장이 협소해서 고마운 것도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결집한 날에는 주변이 미어터질 듯 꽉 들어찬 모습이 압도적인 효과를 낼 수 있었고요, 일부 언론사나 사회단체만 함께 한 날에도 공간이 넓지 않으니 실제보다 많은 인원이 참가한 듯한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2017년 초가을부터 이듬해 초입의 한 겨울까지 이어진 KBS의 파업도 이런 착시효과의 덕을 봤다고 해야 할까요. 제주시청 조형물 앞에서 일렬로 늘어선 조합원들의 모습은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의 시선을 끌기에 꽤 효과적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게 아니면 일당백을 자랑하는 방송민주화 투사들의 능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2017년 겨울, 제주시청 종합민원실 앞에서 제주 MBC와 함께 마련했던 문화제, 전 MBC 사장님의 모습도 보입니다
착시효과가 필요 없었던 날도 있었습니다. MBC의 파업은 KBS보다 한 발 앞서 일단락되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파업시간을 함께 하며 멋진 기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비장한 외침으로 일관하기보다 시민들과 함께 하는 축제 한마당을 기획해 웃음과 뿌듯함을 드렸으리라 확신합니다. 방송쟁이들이 만들어 낸 파업 프로그램이니 볼 만은 했겠지요. 거리에서 함께 해 주신 도민들에게 지극히 감사한 마음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각계각층의 국민들에게 갚지 못할 빚을 졌던 파업의 승리, 실제로 큰 틀에서 많은 것들이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만 사명감으로 빵빵하게 불어넣은 튜브에서 바람이 조금씩 새 나가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간절했던 과거를 망각하고 다시 타성에 젖은 우리를 돌아봅니다. 제 자신도 할 말이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국민들에게 진정 달라졌다는 찬사를 들을 수 있는 날은 올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다시 언론에 큰 위기가 찾아오면 그때도 국민의 힘에 기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방송의 품질도 품질이려니와 상식적이고 정의로운 방송만큼은 지켜내겠다는 각오라도 변치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나마 도민의 시각에서 제주도내 뿌리 깊은 갈등의 현장들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다는 약속 하나만큼은 잘 지켜왔고, 앞으로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란 다짐을 해 봅니다.
제주시청에서 버스정류장 사이의 공간을 '어울림 마당'이라 부릅니다. 넓지 않은 공간이라 소규모 행사 등이 치러지는 곳입니다. 국내에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로 이재민들이 다수 발생했을 때, 그렇지 않더라도 매년 겨울이 되면 불우이웃 돕기 성금 모금을 하는 단골 장소입니다. 매년 수 차례 이상 해야 하는 방송이었기에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어서 와 주세요, 여러분의 정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틀에 박힌 멘트를 할 때마다 낯이 붉어지곤 하는 무대였습니다. 분명 힘든 분들과 함께 하자는 뜻일 텐데도 시민들께 기부를 강요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죠. 아마도 모금방송을 하는 전국의 모든 진행자들이 비슷한 느낌을 갖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럼에도 결국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분들에게 전달이 될 테니 민망함을 느끼는 건 사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금방송을 하는 시간만큼은 어찌 됐건 '부드러운 철면피'가 되어야 마땅하겠습니다. 낯이 붉어지는 또 다른 상황은 방송이 끝난 후 일어납니다. 다음 방송을 위해 서둘러 복귀해야 하는 스태프들, 각종 장비를 능숙하고 신속하게 정리하고 방송국으로 철수합니다. 그나마 장비를 철수하는 것은 품이라도 드는 일이지요. 진행자 입장에서는 무엇이라도 도와드리려 하니 정장을 입은 상태에서 괜히 오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바로 현장을 떠나자니 무언가 텁텁한 느낌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원고를 정리하며, "수고하셨습니다!" 한 마디를 던진 후 회사로 복귀합니다. 시간이 한정돼 소개해 드리지 못한 기부자들께 양해를 구하고 성금접수를 마감하고 나면 어울림 마당은 휑하게 변신합니다. 조금 전의 '나눔의 어울림'은 막을 내리고, 오고 가는 발자국 소리만 빈 공간을 메울 뿐입니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입니다. 일이 끝났으니 철수하는 것이고 모금을 기다리며 줄을 선 시민들의 정성도 다 받았으니까요. 그저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이 무척 낯설고 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 낯섦을 느끼면서도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나'라는 사람에게서 냉정한 낯섦을 또한 발견합니다. 올 겨울 다시 어울림 마당으로 가게 된다면 현장의 따스함을 온몸으로 더 흡수하고 올 작정입니다. 일은 끝났어도 여운은 남아있으니까요.
제1횡단도로(5.16 도로) 개통식 당시
과거 제1 횡단도로, 현재는 1131번 지방도가 공식 명칭이지만 이렇게만 표현하면 어느 도로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을 텐데요, 이 지방도는 우리가 '5.16 도로'로 알고 있는 그 아름다운 길입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본격적으로 정비되어 1969년 개통식을 가진 제주 최초의 남북 횡단길이죠. 개통 전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오가려면 해안을 따라 빙 둘러갈 수밖에 없어 편도 5시간 이상이 걸렸다고 하는데요, 한라산의 숲을 뚫어 만든 제1횡단도로로 인해 그 시간이 1시간 30분으로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독재정권의 망령을 소환하는 이름이라는 주민들의 반발로, 한때 기억 속에서 '5.16'이라는 명칭을 삭제하려는 시도도 많았으나 한번 굳어진 이름을 바꾸는 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정 도로의 명칭이 거슬린다면 5.16을 청산해야 할 과거의 사건으로 기억하면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요. 일제의 탄압이 고스란히 상기되는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해 오히려 반면교사 삼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기면 되겠습니다.
갑자기 5.16 도로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의 시청광장 부근이 5.16 도로의 제주시 쪽 출발점이기 때문인데요, 도로의 개통식 당시 지금의 시청 앞은 공설운동장이었다고 합니다. 연예인들의 축하공연과 군악대의 축하연주가 줄을 이었고 KBS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했다고 하니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 역사(役事)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제주에 사는 주민들이 서귀포로 가는 장도에 올랐을 출발점. 생계와 여가를 위해 첫 발을 내디뎠던 곳이 지금은 한데 모여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공간이자 어울림의 공간이 되었으니, 집결과 새 출발의 공간이라는 운명을 지닌 곳이라도 되는 걸까요. 시청 앞의 역사적 의미도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제주시 탄생 50주년을 기념하는 조형물 옆에 제주의 도로원표가 있습니다. 한 지역의 지리와 방위의 기준이 되는 척도가 도로원표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리적인 중심을 떠나 제주시청 앞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제주의 중심점이겠습니다. 신제주가 아무리 휘황찬란하게 확장하더라도 공인된 제주의 배꼽은 이곳이란 소리지요. 부산까지의 거리가 정확히 300km로 떨어진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지극한 보살핌을 받고 온실 속에서 자란 녀석이 지천명이 돼서야 현관 밖으로 발을 걸치려 하는 중입니다. 거실에서 현관까지가 왜 그리 멀게만 느껴졌을까요.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쳤을 뿐인데 세상의 혹독함을 다 거친 것처럼 건방을 떱니다. 난방 중인 실내에 머물지 말고 같이 나가자고,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오히려 한 발 앞서 현관 바깥에 서 있는 동료들에게 독려를 하고 있는 꼴이라니요. 그럼에도 다들 이해해 주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저 먼 광야까지는 아득히 먼 길을 지나야 하지만 5.16 도로의 출발점에 선 각오로 파이팅을 외치는 것이라고만 여겨주시면 고마울 따름이겠습니다.
대학로에선 마음껏 해방감을 느껴봐야 합니다. 젊음의 경험에서 해방감이 부재한다면 미래의 더 크고 기쁜 해방을 감당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 중 누군가 억울해 몸부림칠 때, 길 건너로 횡단보도를 즈려밟고 오시기 바랍니다. 넓지 않은 이 광장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목소리를 합치고 노래를 더합시다. 진정한 해방이란 해방을 위해 값을 치를 때 비로소 찾아오는 열락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친한 친구와 저녁을 먹기로 합니다. 친구가 되묻습니다.
"시청? 네가 웬일로 그쪽엘 가재?"
합이 백 살인 둘이 한 번도 뭉친 적이 없었던 장소로 오라 하니 의아했겠지요. 친구도 저도 지레 젊음의 공간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움츠러들수록 나이 듦을 인정하는 셈인 줄도 모르고 말이죠.
제주시청과 대학로에 대한 글을 쓰는 것에는 큰 장점이 있었습니다. 취재 차 밤에 나올 수밖에 없었고, 시간 관계상 저녁을 이곳에서 해결해야 했으며, 밥만 먹기엔 허전하니 소주 한잔 걸치지 않을 수 없다는 핑계가 정당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투명한 액체를 담은 잔을 부딪히기 전, 친구에게 건배사 대신 당당한 듯이 선언합니다.
"나 술 마시고 싶어서 나온 거 아니다. 글 땜에 온 거야. 적당히 마시자고."
한 잔이 한 병 되고, 한 병이 두 병이 됩니다.
다 글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