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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Oct 27. 2020

39 미소 속에 비친 환상 속의 그대 -신촌과 홍대 앞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약간은 내려놓으며 편하게 긁적이고 싶었습니다. 심오한 사랑의 의미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괜한 훈수를 두었다는 후회 때문일까요. 파주에서 탄 버스는 종점이 꽤 멀기도 합니다. 한참을 버스에 앉아 오랜만에 차창으로 서울구경을 하다가 신촌 부근에서 내렸습니다. 이번 방문에서는 생각지 않았던 곳이지만 언젠가는 신촌과 홍대라는 공간을 다뤄야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고 해서, 보너스의 느낌으로 이 젊음의 거리에 도전장을 내밀고자 했습니다.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온 탓에 친구들과의 약속은 홍익대 부근 아니면 신촌이었습니다. 물론 학교 근처의 길목에도 분식집과 제과점은 있었지만 '버거킹' 같이 갓 들어온 햄버거 프랜차이즈 정도는 가 줘야 적어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고딩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 옛날 모자와 세트를 이뤘던 검정 교복세대까지는 아니지만 시뻘건 넥타이에 감색 정장이 어우러진 '신세대' 교복을 입고 등교를 했습니다. 그 정도면 봐줄 만했다 쳐도 새하얀 운동화와 교복의 콤비네이션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용납되기 힘든 패션이었죠. 이 시뻘건 넥타이 무리들은 홍대와 신촌 일대에서 매일같이 목격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교실에서 그렇게 매를 맞고 혼나도 학교사랑의 덕목은 얼마나 충실했던지요, 타 학교 교복에는 싸늘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동족(?)들을 마주치면 부드러운 눈길을 주고받았던 녀석들이 지금 돌이켜 보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연세대를 나온 것도, 홍익대를 나온 것도 아닙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떡볶이를 먹으러 돌아다니던 장소였을 뿐이고 대학에 가서도 습관적으로 다시 찾아 호프집에 틀어박혀 다 큰 어른 행세를 했던 공간이었을 뿐입니다.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시절 내내 수많은 추억이 있었던 곳이 틀림없을 텐데도 참 이상합니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서 놀고먹기만 했기 때문인지 특별히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것들이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그저 그 거리가 그립고, 친구들이 그리울 뿐이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군요. 철이 일찍 든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적당한 때에 별생각 없이 술을 시작하고, 적당한 시기에 친구가 잡아끄는 미팅도 가 보고,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많은 동년배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이런 사소한 기억들이 뭉뚱그려져 전체의 기억으로 다가오는 것이겠지요. 그렇담 유별나게 입이 떡 벌어질 기억이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역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목격했을 굴다리를 지나 신촌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보행자 천국이라 할 정도로 걷기가 수월합니다. 차량은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매주 금요일 오후 2시부터 일요일 밤 10시까지 '차 없는 거리'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차량 통행을 막은 지 불과 한 시간 후에 이곳을 찾은 셈이었군요. 거리 양 옆으로 늘어선 맛집과 샵들이 무척 세련된 간판을 자랑합니다. 옛날 이 자리에 있었던 커피숍이며 '경양식'집의 구조가 솔솔 떠오르지만 기억을 확인할 만한 자료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휴대전화는 언강생심 삐삐도 없던 시절인 데다 어느 누가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 자리에 나오겠습니까. 수학여행 사진은 남아 있어도 일상의 사진은 찾기 힘든 까닭입니다. 그래서 더 아련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에서 살아온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신촌'은 곧 서대문구에 위치한, 지하철 2호선 신촌역 부근을 의미합니다. 젊음이 넘쳐나고 쇼핑할 것들이 수두룩한 바로 이곳이 '절대적' 신촌인 것이죠. 다른 신촌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전국의 한자어 지명 중 가장 흔한 것이 '신촌(新村)'이었습니다. 2020년 10월을 기준으로 '신촌'이란 지명이 전국적으로 263군데나 있다는 것이죠. 어느 지역이나 가장 최근에 조성된 마을은 있을 테니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의 신촌도 넘쳐나도록 흔할 수밖에 없습니다. 떠올려 보면 친구가 있던 충주로 놀러 갈 때 '신촌'으로 오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번 더 생각하면 그리 놀라지 않아도 됐을 것을 왜 그리 신기하게 받아들였을까요.   

 포털에서 '신촌'을 검색해 봤습니다. 서대문구의 신촌 외에도 서울은 종로구, 강서구, 마포구, 동대문구, 은평구, 강남구, 양천구, 송파구, 성동구..., 즉 거의 모든 구(區)에 신촌으로 불리거나 불렸던 곳이 있고요, 경기도 안산시, 충북 음성군, 강원도 원주, 전남 고흥군, 경남 창원시, 심지어 제주에도 조천읍에 신촌이 있습니다. 아무리 서대문구의 신촌이 유명하기로 소니, 이젠 필요조건이 생략된 '신촌에서 보자'는 약속의 말은 지양해야 마땅하겠습니다. 만나기로 한 거의 모든 친구들의 동네에도 '신촌'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니까요.    


 흔한 지명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얼마 전 국토정보지리원에서 분석한 것들을 더 늘어놓아 볼까 합니다. '신촌'은 한자어 지명 중 가장 흔한 지명이지만 순 우리말로 된 지명으로 보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고유어 중 가장 많이 쓰이는 지명은 '새터'였습니다. 이 역시 어렵지 않게 새로 생긴 마을을 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촌보다 한술 더 떠서 무려 273곳의 '새터'가 있었습니다. 국토 전체가 신시가지라도 되는지요.

 산을 볼까요? 전국적으로 가장 흔한 산의 이름은 '남산'입니다. 101개가 있다는군요. 약간은 의외였던 것이 봉우리의 명칭인데요, '국사봉(國師峰)'이란 이름의 봉우리가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나라의 스승이 임하셨던 봉우리가 그리도 많았는지요, 실제로 자주 들어본 기억이 없는 터라 새삼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옥낭각씨베짜는바위

 

 전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괜히 실망스러운 부문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명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던 이름이었지요. 바로 '옥낭각씨베짜는바위'였습니다. 대구 주암산에 있는 큼지막한 바위인데, 옥낭각시가 이 위에서 베를 짜다가 한 남자에게 쫓겨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지명(地名)에는 도시나 마을뿐 아니라 산과 강, 바위 등 이름이 붙여진 모든 지형지물이 포함되는 것이니 아무리 봐도 훨씬 더 긴 이름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최장의 지명이래 보았자 불과 아홉 글자였던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는데 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전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확연히 다릅니다, 눈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라고 할까요. 단일 지명으로 가장 긴 이름은 Taumatawhakatangihangakoauauotamateaturipukakapikimaungahoronukupokaiwhenuakitanatahu 라고 합니다. 대폭 줄여서 부르면 '타우마타(Taumata)'. 뉴질랜드 북섬에 있는 곳인데요, '타마테아라는 큰 무릎을 가진 등산가가 여행을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피리를 불었던 정상'의 뜻이라고 합니다. 85자의 로마자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말로 발음되는 '타우마타와카탕이항아코아우아우오타마테아투리푸카카피키마웅아호로누쿠포카이웨누아키타나타후'의 글자 수로 치면 45자, 뜻을 번역한 한글로도 39자나 됩니다. 무려 85개의 로마자... 믿기 힘드시면 직접 세 보시던가요.  

 두 번째 긴 이름은 글자 수에서 1등과 꽤 차이가 납니다. 영국의 한 마을이라고 하는데요, Llanfairpwllgwyngyllgogerychwyrndrobwllllantysiliogogogoch입니다. 58개 로마자의 조합입니다. 세 보시던지요. 세계에서 가장 긴 지명과 무려 27자나 차이가 나니 가뿐하지 않겠습니까? '랜바이어푸흘귄기흘고게어어흐윈브로흘랜트실리어고고고흐'라고 경쾌하게 발음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름의 풀이는 '급한 물살 가까이 흰색 개암나무 구덩이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와 붉은 동굴 구덩이에 있는 성 티실리오 교회'라고 하는데요, 이 마을 주민들은 재치가 넘치는 분들입니다. 어이없이 긴 마을의 이름을 관광 상품화하려는 의도로 점점 늘어나는 중국 관광객들을 의식해 중국어로 마을의 별칭을 지었다고 하는데요, 그 이름이 '健肺村(지엔 페이 춘)' 즉 '폐가 건강한 마을'이었습니다. 이 긴 마을 이름을 한 번에 말하려면 폐활량이 상당해야 하니 건강한 폐를 가진 사람들만 살 수 있는 마을이라는 기가 막힌 이름은 지은 것이지요. 주민들의 탁월한 센스가 마을의 위상을 한껏 높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흥미롭지 않으신지요.


 이쯤 되니 아홉 글자가 고작인 우리나라 최장의 지명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세계 기록과는 어림없는 차이가 날 뿐입니다. 그러나 살짝 다른 각도로 관점을 돌려보면 짧은 지명이 오히려 자랑스러워질 수도 있는 일이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이라고 쓰고 발음하는 영단어 'Young'을 볼까요. 우리의 글은 네모난 상자 안에 자음과 모음이 단단하게 묶여 야무지게 '영'이라는 한 글자로 전달됩니다만 이걸 영어로 쓰자면 Y, O, U, N, G 다섯 글자가 옆으로 길게 늘어서야 하는 것이죠. 물론 똑 떨어지게 다른 언어의 발음을 나타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의 한글은 길고 복잡한 각종 외국어의 발음을 과학적이고도 단순하게 표기할 수 있다는 분명한 장점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발음의 단어라도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을 수밖에 없고, 반면 로마자를 사용하는 많은 나라들은 나열을 거듭할 소지가 다분하니 유난히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단어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짧은 지명이면 어떻습니까. 부르기 편하고, 듣기 편하고, 쓰기 편하니 한글의 탁월함을 오히려 증명할 뿐입니다.



 신촌에서 시작해 영국까지 넘어가 버렸습니다. 이처럼 비약이 국제적으로 자꾸 심해지는 것도 다 코로나19 탓입니다.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이 언제쯤 다시 올지요. 젊음이 가득한 거리에서 보는 꽃들은 한층 싱그러워 보입니다. 꽃처럼 활짝 피었던 시간이 그리워지기도 하는군요.


 그리 지척도 아닙니다만 걷기에 아주 멀지도 않습니다. 큰길을 건너 와우산로로 들어서니, 신촌과는 또 다른 홍대 앞의 아우라가 실로 오랜만에 느껴집니다. 발아래 공원을 지나면 대한민국 최강 미술학원들의 위용이 이어집니다.



 홍대 정문을 기준으로 하면, 아래 지하철 2호선 역까지 뻗어있는 내리막길과 더불어 그것과 직각을 이루며 상수동까지 이어지는 와우산로, 이 두 길이 홍대의 핫플레이스 집결지나 다름없습니다. 이 일대의 커피숍과 호프집들은 지금과 다른 분위기로 90년대 청춘들을 불러들이곤 했었죠. 특히 빛나던 젊음의 기억은 음악을 동반하며 더욱 짙어지기 마련인데요, 오르막 내리막길이 반복되는 홍대 앞의 거리와 감수성 짙은 노래들이 오버랩되면서 추억을 단단히 붙들고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A-HA나 듀란듀란 같은 그룹의 앨범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정도로 팝이 청춘의 심장을 강타했던 시기였지만, 90년대가 가까워지면서는 지금도 잊지 못할 극강의 가요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천방지축 돌아친 듯해도 가슴속 깊이 새겨진 그리운 공간들이 8090의 아스라한 가요와 함께 하나둘씩 떠오릅니다. 제목을 언급할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수십 곡이 줄줄이 사탕처럼 연달아 떠오를 테니까요. 음악은 곧 시간의 예술이건만 추억의 공간과 합쳐지니 더 이상 막강한 공감각은 없을 듯합니다. 그래도 몇 가지만 찾아볼까요?



 말해 뭐하겠습니까. 뒤로 끝없이 앨범 사진을 첨부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그저 앨범 재킷 사진만 봐도 '심쿵'함을 느끼신다면 우린 하나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죠. 가만히 더듬어 보면 제 감수성의 대부분은 그 시절의 음악과 공간들로 구성되었던 게 분명합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접한 인연들과 장소들, 노래들은 한 사람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기억을 부여잡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풍경은 달라졌지만 그때의 공간을 다시 찾아 그때의 노래를 얼마든지 다운로드하여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친구들이나 동년배를 모아놓고 추억의 앨범 재킷 사진을 보여 줍니다. 잠시 후 이 앨범을 보고 떠오르는 기억들을 차례로 이야기해보는 거죠. 술자리에서라면 그 이상의 안주가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홍대 정문 앞에서 길 건너를 바라봅니다. 맥주란 것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그곳의 자리를 어림잡아 봅니다. 당연히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건물 2층에 호프집이 있었습니다. 참새 방앗간 들르듯 일주일에 사흘 정도는 가지 않았을까요. 500ml 잔에 담긴 생맥주를 들이켜면서, 이 맛에 어른들이 "캬~~~~" 소리를 연발했구나 깨닫게 된 타락의 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호프집 이름이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 답답합니다. OB계열이었던 듯한데, '베어스 호프'였나요? 아무튼 그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추억의 호프집은 횡단보도 건너서 왼쪽에 있는 5층 정도 높이의 건물 2층이었습니다.


 술만 마신 건 아니었습니다. 80년대 후반부터 하나둘씩 들어선 커피숍들에도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는데요, 극동방송국 쪽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있던 커피숍이 친구들과의 단골 약속 장소였다면, 홍대 정문 앞 놀이터를 지나 언덕배기에 위치한 더 고급스러운 커피숍 - 'SE'라고 기억됩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 에선 몇 차례 미팅을 한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도 미팅인데 500원이라도 비싼 곳으로 가 주는 거죠. 노량진 재수생 신분일 때조차 홍대 앞을 끊지 못했습니다. 김유신 장군처럼 버스를 베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지금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내 구역'이라는 느낌이 워낙 강렬했던 곳이었으니 알차게 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클럽이 드문드문 있는 유명한 주차장 골목엔 90년대 초에도 '락 카페'가 위세를 떨치며 성업 중이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미증유의 인기를 찌를 때와 그 전성시대를 같이 했으니 얼마나 장사가 잘 되었을까요. 나이트클럽처럼 넓은 무대도 없건만 뭐가 그리 신난다고 좁은 테이블 사이사이 공간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광란의 밤을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대여섯 시간을 버텼던 당시의 체력이 믿기질 않습니다. 깊어가는 밤, 지하 깊숙한 곳에서 우리는 <환상 속의 그대> 노래에 맞춰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뿜어냈습니다. 잘 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열정만 뿜었습니다.




 고등학교와 재수생활을 거쳐 대학까지 어렴풋이 세상을 알아가는 단계이기도 했지만, 정해진 틀 안에 갇혀 한계가 명확했던 인간관계가 팝콘이 튀듯 복잡해지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과 학원 친구, 대학의 동기 녀석들과 선후배, 또 그런 관계에서 퍼지는 2중, 3중의 관계망이 용량을 초과하면서 머릿속으로 욱여 들어옵니다. 고3이면 오직 고3들과 하루를 같이 했던 시기를 넘어, 나이도 성별도 한정되지 않는 나만의 울타리가 조금씩 확장되며 사회 속으로 한 발씩 한 발씩 걸어 들어갑니다.

 같은 학번이라도 전국 각지에서 온 사연도 제각각인 동기들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통으로 입학한 친구들 외에도 재수, 삼수, 심지어는 그 이상 개인적인 사정으로 들어온 늦깎이 대학생도 있기 마련이죠. 적당히 나이를 봐가며 호칭을 정리하고 지킬 것은 지키면서 세상 살아가는 기초 스킬을 연마하곤 합니다. 유난히 나이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니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우며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기술입니다. 섣불리 호칭을 자신하다가는 손가락질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라는 밀림으로 들어가면 이런 꽉 막힌 듯한 나이 세기는 그 중요성이 덜해지기는 합니다. 직급이 중요해지고 사용자와 고용자가 정해지며, 직장 선후배라는 관계가 나이의 많고 적음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보통이죠. 언뜻 보면 학년이나 학번으로 고정돼 움직일 수 없는 서열보다 자유로운 듯하나 결코 그렇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인생의 길이와는 상관없는 상하관계의 엄밀성은 차라리 나이로 말투와 예절을 구분했던 시기를 그립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개인적인 인사법이고 대화법이다 하면 할 말 없겠지만, 처음 만나 명함을 교환하자마자 질문이 훅 들어옵니다.


 "몇 학번이세요?"


 대개는 본인이 나이가 더 많을 것 같다고 짐작하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묻곤 하지요. 학번 질문을 받으면 저는 5초 정도 잠자코 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뗍니다.


"전  쉰입니다."


 혹시 이런 첫인사가 습관이 되신 분들이 계신다면 무례를 용서해 주시되, 그래도 비판할 것이 있다고 생각해 왔으니 말씀은 드려야겠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들의 과거를 맞춰보자면 거의 100% 실패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입학한 분들입니다. 한마디로 나이와 학번은 같다고 믿는 분들이죠. 실패 없이 대학입시에 성공한 것은 당연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고, 실제로 가장 많은 신입생은 고3에서 바로 대학에 입성한 학생들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다만 그중 극히 일부가 이런 단순한 환산법을 고집한다는 뜻입니다. 이 분들에게는 20대로 진입하기 전의 실패는 무슨 느낌인지 이해시키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몇 학번이세요?"라는 질문의 장본인은 또한 사회관계망이 그리 다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인맥을 늘려갈 때 대학교의 학번을 제일의 기준으로 삼아 임했을 테니까요. 업무 외에 몸 담고 있는 친구나 지인들 모임의 학력이 대개 같은 수준의 대학 졸업이나 대학원 졸업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의 정원이 그동안 가파르게 늘어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이고, 따라서 모임의 구성도 비슷한 학력의 소유자가 될 소지가 다분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세상을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초졸, 중졸, 고졸의 젊음도 얼마든지 섞여 굴러가는 사회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이런 학번의 질문에 어떤 식으로 대답하면 좋을까요?

 정답을 말하려면 일단 주어진 질문부터 부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학번을 물을 수밖에 없는 대학생 시절을 벗어난 지 한참이 되고서도 "몇 학번이세요?"하고 여전히 물어 버릇한다는 것은, 본인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기준에 걸맞지 않은 상대에 대한 몰염치임에 다름 아닙니다.   




 친구들과 있는 돈을 탈탈 털어봅니다. 넷이 합쳐 만 5천 원 몇 백 원 나오네요, 지금은 타로 샵과 옷가게가 늘어선 골목의 허름한 2층 주점으로 갑니다. 이건 뭐 다락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발을 벗고 올라갑니다. 천장이 낮아 고개를 들 때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 부딪히면 꽤 아프니까요. 작은 테이블 주위로 모여 앉아 가장 싼 안주와 소주를 시키고 다 큰 어른이 된 마냥 잔을 털어 넣으며 사는 이야기를 합니다. 참으로 가소롭군요.    

 예전 떡볶이 가게가 경쟁하며 늘어서 있던 먹자골목엔 이제 세계의 모든 요리가 있는 듯 다양한 맛집들이 깔끔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분식만 팔았던 옛날은 고등학생들이 훨씬 많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혹시 멋지게 차려입은 고등학생들도 이 인파 속에 고루 섞여있을지 모릅니다. 워낙 세련되게 꾸밀 줄 아는 젊음들이 많은 것이 요즘이니까요.


 30에서 40이 되고, 40에서 50으로 앞자리를 바꿔야 하는 충격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10대를 마치고 20대로 들어서는 젊음의 감성은 극히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몸은 클 대로 컸고, 이젠 머리와 가슴이 세상과 만나 여물어질 준비를 하는 과정일 테니까요.

 1990년의 가요로 세심히 주파수를 맞춰봅니다. 또 탄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추억의 전주가 흘러나옵니다. 신승훈과 이승환의 노래입니다. 80년대 후반의 발라드 감성이 잦아들 때쯤 등장한 이 두 형님의 노래는 어찌 그리 매력적이던지요,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라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그때를 깊이 있게 추억할 수 있는 지금의 관조도 그리 나쁘진 않습니다. 형님들의 노래가 깔리지 않는 젊은 날의 회상은 얼마나 밋밋해져 버렸을까요. 좌충우돌하던 어린 날 큰 선물을 주심에 감사드리고, 노익장의 여전한 관록에 찬사를 보냅니다.


 이번엔 음악 이야기가 너무 많았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USB 안에 있는 두 분의 노래들을 소환해야겠네요,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오늘은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승환 형님의 '가을 흔적'이 제격일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 가슴속의 노래는 시간을 넘나들고 공간을 초월합니다.

 젊은 날의 서울에서도 좋았고

 익어버린 타향에서도 좋습니다.



 다시 울고 싶어지면

 나는 그대를 생각하며

 지난 추억에 빠져있네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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