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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Nov 02. 2020

40 할아버지와 냉면 -도봉산

모든 곳의 어떤 것들








 1996년 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셨는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요. 노인이 되면 언제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올지 모른다고는 하지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근래에 자주 뵙진 못했어도 언제든 보러 갈 수 있었던 할아버지인데 이렇듯 장례식장에서 뵙게 되다니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아무리 각별했다 해도 돌아가실 때 펑펑 우는 손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허탈하고 황망한 마음이 크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돌아가실 분들을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라고 부른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인지요.

 제 아들 녀석은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최고의 파트너였습니다. 불효자인 이 아빠의 무뚝뚝함을 상쇄해 주듯 가까이 사는 할아버지의 집에 주말마다 가서 1박 2일 동안 벗이 되어 주더군요. 노트북을 챙겨가 실컷 게임을 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만, 무얼 하든 옆에 있기만 하면 할아버지들은 그저 행복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살갑게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줄도 아는 효손자였으니 할아버지에게 이 녀석의 존재 이상 귀한 보물이 어디 있을는지요. 지금도 가끔 돌아가신 할아버지 보고 싶다는 소리를 하는데 그저 기특하고 고마울 뿐입니다. 이런 아들 녀석도 자기 할아버지의 삼일장(三日葬) 내내 눈물을 쏟아내지는 않았습니다. 슬프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직접적인 비통함 보다는 아련한 부재(不在)의 감정이 더 먹먹해서가 아니었을까요. 부모의 임종 후 당연한 슬픔에 더해 처리하고 정리해야 할 현실적인 일들의 무게가 씌워지는 아들 딸보다는, 손자, 손녀들의 순수한 그리움이 가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더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홉 살 때 정도로 기억됩니다. 당시 시내버스는 이런 모양이었던 걸로 기억하고요, "안 계시면 오라이~~"의 히로인이었던 안내양 누나들이 기운차게 등짝을 밀어주었던 시절이었죠. 아버지 손을 잡고 두어 달에 한 번씩은 가는 할아버지 집이니 몇 번 버스를 타는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명동에서 내려 한번 갈아타야 했고 무려 2시간 이상이 걸린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빠 엄마의 퇴근시간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고, 학교가 파한 토요일 점심이라 충분히 도전해 볼 여지가 있었습니다. 아파트 앞에서 버스를 타고 그간 봐 왔던 대로 명동 차이나타운 앞에서 내립니다. 갈아탈 버스의 번호는 2번이었던 것도 기억납니다. 도봉산행 버스인 것을 확인하고 잽싸게 올라탑니다. 도심을 벗어나고도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버스의 종점이었으니 어디서 내릴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두 다리로 내달릴 일만 남았습니다. 산 쪽으로 5분 정도 힘껏 달리다가 왼쪽으로 난 내리막길을 따라가면 저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우리 할아버지의 집이 있었으니까요. 방안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손자의 기습에 깜짝 놀라시더니 이내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끌어안으십니다. 엄마 아빠는 어디 있냐는 물음에, 혼자 버스 타고 왔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말투로 대답합니다. 자그마한 국민학교 2학년생 꼬마 녀석이 이 먼 거리 올 생각을 어떻게 했냐며 걱정스러운 말씀도 잠시, 눈앞에 서 있는 손자가 마냥 귀엽고 기특하셨던가 봅니다. 웃음을 그칠 줄 모르십니다. 자네 아들 도봉산에 놀러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전화하시는 것을 듣고, 집에 돌아가면 혼 좀 나겠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신났습니다. 할아버지 집에 놀러 온 기쁨에, 혼자 오는 데 성공했다는 성취감이 더해졌습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습관이 됐던 최초의 계기는 바로 그 날 도봉산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 십 년이 지난 투명한 가을날, 할아버지의 공간으로 향했습니다. 옛날과는 다른 경로를 이용했습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도봉산역에서 내렸습니다. 등산복과 배낭을 짊어진 원색의 물결이 평상복을 입은 승객들을 집어삼켰습니다. 도심 한복판과 큰 차이가 없는 대로변을 따라 도봉산 입구로 올라갑니다. 거의 모든 건물의 1층엔 아웃도어 샵이 들어서 있고 아직은 아스팔트 차도변이라 해도 파전을 지지고 있는 간이식당들이 인도에 들어차 있는 모습이, 이곳이 등산로의 초입임을 실감하게 해 주었습니다. 친구와 동행하는 참이었다면 분명 막걸리와 파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을 듯합니다. 코로나19로 오히려 늘어난 산행 인파를 따라 약한 오르막 경사를 올라가는 도중 오른편에 버스 종점이 보입니다.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갈색 건물이 눈에 익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터라 다시 지어졌을지는 몰라도,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느낌상 확실한 그 무엇. 버스에서 내려 쏜살같이 할아버지에게 뛰어가던 그때가 바로 이 공간에서 재연됩니다. 옛날의 그 버스 종점이 틀림없습니다.




 '북한산 국립공원'이라는 표식이 보입니다. 도봉산 등산로 입구는 북한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하나의 '지구(地區)'였습니다. 사람들을 따라 올라갑니다. 복장에서 승패가 결정되는 듯합니다.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은 차림은 시내를 돌아다니기엔 썩 맞춤하지만, 동네 야산과는 비교도 안 되는 도봉산을 감히 그런 복장으로 올라갈 수는 없는 법이었습니다. 복장 불량을 책망이라도 하듯 화려한 등산복의 무리들이 순식간에 저를 앞질러 버립니다. 상관없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댁을 찾아온 거니까요, 조금만 걸아가면 빠지는 길이 나올 테니까요.

 그런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하늘로 가신 후 가끔씩이라도 왔었다면 집과 터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너무 긴 시간이 흐른 뒤 온 것 같습니다. 집이 그대로 있을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으나 집터는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터라 실망스러운 마음 가득했습니다. 여기쯤인가 싶었던 샛길로 빠지면 여지없이 막다른 길이 나오던지 울창한 숲으로 이어지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미션의 실패를 인정하고 터덜터덜 오던 길을 되돌아 내려옵니다. 적어도 기억 속 할아버지의 공간을 더듬어는 봤다는 머쓱한 자기 위로를 하며 파란 물이 떨어질 정도로 쨍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저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명동과 종로의 <한일관>을 가서 물냉면을 먹는 날은 대단히 특별한 날이었지요. 입구를 지나 넓은 식당에 늘어선 테이블만 봐도 침이 고일 정도였으니, 한일관에 가는 날은 그야말로 축제의 날인 셈이었습니다. 이곳이 1939년에 개업한 경성 최고의 불고기, 냉면집이었다는 것은 한참 후에 알게 되었는데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업 중이니 그야말로 서울 냉면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합니다. 물론 가수 존 박 씨처럼 맛집들을 비교하며 열광할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저에게 냉면은 나름의 '소울푸드'였습니다. 소소한 행복의 순간엔 눈 앞에 냉면이 놓여있었고, 간혹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날에는 냉면 한 그릇이 당연한 한 끼 식사메뉴였으니까요. 도봉산을 가면 점심은 예외 없이 3대가 함께 하는 냉면 파티였습니다. 손자가 왔다고 연신 웃음을 지으시면서 젓가락질을 시작하십니다. 3대는 먹는 모습도 똑 닮았습니다. 오늘은 혼자라 냉면을 먹기 싫습니다. 도봉산에서의 냉면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중 적어도 한 분은 곁에 계셔야 먹을 수 있는 메뉴입니다.

  어느 순간 깨달은 것도 있습니다. 냉면은 저만 좋다고 먹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손자가, 아들이 좋아한다고 같이 드신 냉면은 사실 그 두 분의 최애 음식이기도 했던 거지요. 세상이 다 그런 겁니다. 자식들 핑계 대고 부모가 본인들의 식탐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 것 아닙니까.

 언젠가 들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황해도에서 피난 오신 할아버지는 한때 만주 부근에서 냉면 장사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김치보다도 오래된 우리 민족의 음식이 냉면인 데다 1900년대 들어서면서 북쪽 지방에서는 성업을 하는 냉면집이 많았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뜨는'업종을 택하신 셈입니다. 오래 살아계셨다라면 어떻게 한 세상 살아오셨는지 찬찬히 들어봤을 텐데, 그저 장난꾸러기 손자로 머물러 있었던 이유로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없어 안타깝군요. 그러나 냉면으로 생업을 꾸리셨다면 맛을 알아야 했을 테고, 적어도 좋아하는 음식이니 장사를 시작하셨겠죠. 아버지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릴 적 집 근처에서의 주된 외식메뉴 역시 아파트 앞 큰길 건너에 있었던 고깃집에서의 냉면이었습니다. 불고기는 없어도 냉면만큼은 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본인이 냉면에 열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두 분의 이런 과거 행적으로 봤을 때 제가 어찌 냉면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만주시절부터 내재된 한 가문의 냉면 DNA가 제 몸속에 흘렀을 뿐입니다.       




 후배가 점심을 살 일이 있다며 무엇을 먹겠냐고 묻습니다.


 "음.... 한동안 그 집 못 갔네, 나 냉면!"


 간혹 회식 때 찾던 고깃집에 가서 물냉면을 주문합니다. 겉모습은 함흥보다는 평양냉면에 가깝지만 맛 자체는 '간이 더 된 평양냉면' 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슴슴한 매력의 평양냉면은 절대 될 수 없지만 충분히 입맛을 당기는 편이라고는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후배가 알아서 곱빼기를 주문합니다. 제가 돼지로 보였나요?

 많을 것 같은데... 하며 더 이상의 군말 없이 그대로 곱빼기를 받아먹습니다. 전 요즘 돼지 맞습니다. 가을이라 그런지 뭐든 많이 들어가더군요, 큰일입니다. 국수의 양이 많을 뿐 아니라 달걀도 두 개, 정확히 말하면 반쪽이 두 개니 하나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삶은 달걀 한쪽은 후배에게 양보합니다. 옛날 서울과 도봉산에서 먹던 냉면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입니다. 무리한 것 같은 표정으로 배를 두드리지만, 사실 이 정도는 가뿐했습니다.


 우리나라 냉면의 양대산맥, 평양과 함흥 중 요즘엔 함흥식 냉면집이 더 많아진 느낌이지만, 냉면의 유래는 평양이었던 걸로 역사의 기록들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려 중엽, 평양성 바깥 찬샘골이란 마을에 살던 사람이 정정한 백 살의 노인으로부터 메밀수제비국이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이웃이 만들어 준 면 제조 틀에 메밀반죽을 넣어 국수를 만든 것이 냉면의 효시라는 설이 있습니다. 끓는 물에 면을 삶아 찬 물로 헹군 뒤 동치미 국물에 넣어 먹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고 했다니, 오늘날 냉면의 특징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죠. '국수'라는 말도 바로 이때 곡식 곡(穀) 자에, 물에 삶고 헹궜으므로 물 수(水) 자를 더해 만들어진 '곡수'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는군요. 한편, 고려를 찾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남긴 송나라의 서긍은 지금의 냉면으로 여겨지는 고려의 국수에 대한 극찬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래 저래 한국인들에게 냉면은, 만만치 않은 역사 속에서 '민족음식'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고도 남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특히 부러워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들의 나라에 비하면 빛의 속도로 느껴질 법한 인터넷 속도와 IT기술, K-POP으로 대표되는 막강한 연예산업 등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이 한국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단계에서 '깜놀'하게 되는 또 다른 하나는 역시 배달문화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에 살다가 이민이라도 가게 되면, 혹은 외국에 살다가 우리나라로 오게 되면 가장 그립거나 놀라운 것이 배달 시스템일 겁니다. 집 앞까지 오지 못할 아이템이 없고요, 문 앞까지 오지 못할 시간대도 없습니다. 이제는 세계로 수출까지 되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 배달문화의 선구자들이 누구였는지 혹시 생각해 본 적 있으신지요. 대략 100년 전, 평양과 경성을 곡예에 가까운 솜씨로 누비고 다니던 냉면 배달부들이었습니다.


나혜석의 그림(오른쪽) <전동식당에서> 냉면 배달부의 모습, 1930년대


 100년 전, 이미 국민 배달음식으로 자리를 잡은 당당한 메뉴가 냉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이 시대에 많은 냉면 마니아가 있음에도 그 위상이 과거에 비해 낮아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상징성은 역사의 깊이만큼이나 진득해지는 것이겠지요. 잘 아시는 것처럼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남과 북을 이어준 음식도 다름 아닌 옥류관의 평양냉면이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남북이 화합하는 자리에 '어렵사리' 재료와 요리사를 동시에 대동하고 왔다는 사실 자체가, 멀고 먼 남과 북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냉면 한 그릇의 위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멀다고 하면 안되갔구나...'


 도봉산 할아버지 집을 떠올리면 마당에 있던 수동펌프도 그려집니다. 도무지 그것을 부르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포털에서 찾아보니 '작두펌프'라고 검색되더군요. 분명히 '펌프'라고 밋밋하게 불렀을 리는 없고요, '뽐뿌'였던 것도 같지만 또 다른 이름이 확실히 있었습니다. 아... 기억 세포들이 서서히 손상되는지 아무리 눈을 감고 끄집어내려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기억 나시죠? 어린 시절 온몸으로 내리눌러야 2초쯤 후 물이 쏟아져 나왔던 이 신기한 물건 말입니다.




 할아버지의 집이 그리웠던 것은, 그곳에 가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물은 무조건 내 담당이라며 펌프질을 연신 해 대기도 하고, 가을이면 할아버지와 산으로 올라가 그야말로 '천지 빼까리'였던 알밤을 주워 오곤 했습니다. 굳이 나뭇가지를 건드려 무시무시한 밤송이를 떨어뜨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익을 대로 익어 땅에 누워있는 밤들이 지천이었으니까요. 돌로 치고 발로 밤송이를 벌리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 안에는 윤기가 흐르는 탐스런 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도봉산에 계셨기에 가능한 추억들이겠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뭔가 이상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연로하시긴 했지만 돌아가실 정도로 숙환이 심하셨던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경찰서를 다녀오시며 정신이 없는 표정이었습니다. 병원과 연결된 장례식장도 도봉산 근처가 아닌 여의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여러 정황을 맞추어 짐작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머리를 비우면서 아무 상상도 하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시간이 흘러 약간의 실마리를 던지며 할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에도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집중해서 파헤치고 나면 할아버지가 더 불쌍할 것 같았고, 아버지가 더 안쓰러워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내 할아버지는 그냥 어쩌다 돌아가신 거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들로서 할아버지를 잘 보내드린 것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젠 두 분이 하늘나라에서 같이 계실 공산이 크니 자세한 이야기들 나누시겠지요. 전 그저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냉면이나 먹으면서 두 분의 상봉을 축하하려 합니다.


  30여 년 전 도봉산에서 3대의 모습


 선주후면(先酒後麵), 해장으로 냉면을 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전 제가 한동안 특이한 부류인 줄 알았습니다. 회식 다음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해장국집으로 달려가는 동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숙취해소엔 역시 '얼큰함'을 찾는 분들이 더 많은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저는... 물냉면입니다. 시원한 육수를 들이켜야 몸속에 있는 알코올의 찌꺼기들이 확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반전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주된 해장법은 이미 4자성어화 되어 버린 '선주후면'에 나와 있었던 거죠, 저는 뼛속까지 한국인이 맞았던 겁니다. 적어도 해장음식으로서의 냉면은 그 정통성이 입증이 된 셈입니다.


 저의 아버지를 좋아했던 아들과 고기를 먹으러 갑니다. 후식으로 어김없이 냉면을 주문하는 저와 달리 이 녀석은 밥에 찌개를 더 즐겨 찾습니다. 유구한 DNA에 드디어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걸까요. 뭐 이젠 바뀔 때도 된 것 같습니다. 대를 이어 냉면을 좋아해야만 하는 숙명이 있다면 그것도 무조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닐 테니까요. 게다가 요즘 MSG로 범벅된 냉면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들 녀석은 얼마 전부터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많습니다. 한창 여드름도 올라올 나이인 데다, 귀여웠던 얼굴이 뼈가 자라고 체구가 커지면서 부자연스럽게 변하는 시기입니다. 공부에 집중하느라 외모에 신경을 못쓰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요.(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남자는 고등학생 시절이 일생 중 가장 못생길 개연성이 높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뒤적이면 보이는 못난이 녀석들을 말이죠. 물론 예외인 친구들도 있습니다. 언제나 꽃미남인 나쁜 녀석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이 녀석 밥을 먹다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누나는 예쁜데 난 왜 이렇지? 난 내 얼굴에 불만이 많아."


 아무 말 않고 지켜봅니다.


 "여드름도 나고 눈도 작고 코도 펑퍼짐하게 크잖아, 콧등까지 낮아. 난 왜 이래?"


 연속으로 불만이 이어지면 대꾸를 하고 위로를 해 줘야 합니다.


 "야, 남자애들은 원래 고등학생 때가 제일 못생기게 돼 있어, 네가 어른으로 크는 과정이라 그래. 조금 더 나이 들면 피부도 좋아지고 멋도 부릴 줄 알게 되니까 얼굴 달라져, 걱정하지 마."


  "그래도 난 왜 이렇게 못생겼지? 짜증 나게."


  "어허 참, 조금만 더 크면 멋있어진다니까. 걱정하지 마, 아빠가 겪어봐서 다 알잖아."

 

 누그러진 녀석을 보고 미소가 나옵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흐뭇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계산을 하려 방을 나가는 순간, 고깃집 도우미 아주머니가 테이블을 정리하러 들어오십니다.

 아들 녀석을 보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 마디를 날립니다.




" 어머, 아빠랑 똑같이 생겼네."




 이런


 누가 누굴 위로한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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