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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Oct 21. 2020

38 묏버들 가려 꺾어 - 파주 홍랑과 최경창의 묘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이 세상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아니고 이 나라에 어떤 보탬이 된 적도 없습니다. 다만 내 욕심대로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을 뿐인데 이토록 후세에까지 제 이야기가 전해지는 걸 보면, 참으로 괴이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 고개가 숙여지네요. 

 당신은 한 사람을 사랑했거나 혹은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 사랑한다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진대, 이렇듯 다른 이들로 하여금 칭송을 자아내게 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당신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남들에게 알려진다면 오히려 부끄럽거나 도망치고 싶어지지 않으실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끄럽기만 한 애정사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 들통 나 버린 판국이라 그저 붙잡아둔다고 될 일은 아닐 듯합니다. 어쩔 수 없겠네요. 찾기 수월치 않은 저와 낭군님의 묘소까지 힘들게 오서서 부탁을 하시니 어찌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을까요. 낭군님과의 첫 만남부터 죄다 듣고 싶으신 겁니까? 가슴과 내장에 깃들어 있는 모든 사연을 털어놓기엔 억겁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 오늘은 그저 간략하게만 듣고 돌아가시는 게 좋으실 것입니다. 바삐 돌아다니셔야 한다면서요. 그럼 그 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잘 따라오셔요.




 조선시대 3대 명기(名妓) 중 일인이라 절 칭하시더이다. 그런 자격이 있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봐도, 황진이, 매창과 저를 한데 묶어주시니 죽어서도 감개가 무량수일 수밖에요. 혹 기생이라고 절 부르시기가 미안하신지요? 저의 자랑스러운 업(業)이었으니 심려 말고 그리 부르셔도 좋겠습니다. 

 저는 어릴 적 진즉에 부모님을 여의고 혈혈단신의 신세가 되었지만 홍원 고을에서 의원을 하시는 양부모님이 미천한 저를 거두어 주셔서 한량없는 사랑을 받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죄도 없는 두 분의 울타리 안에서 평생 짐이 되기는 싫었던 데다, 뜻한 바 있어 관기(官妓)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었지요.


 그분을 만난 건 1573년 봄이니 선조께서 왕위에 계실 때였지요, 열일곱의 나이였더랬습니다. 첫 만남에 어찌 한 사람의 속속들이까지 알 수 있겠습니까만 운명적인 인연들이 그러하듯이 심장에 뇌성이 몰아치는 느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열일곱이면 풋사랑이라고 하시려 했는지요? 그럴 수도 있겠으나 당신이 사는 시대의 열일곱과 제가 살던 시대의 열일곱 나이는 그 연륜(年輪)이 천양지차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450년 전 그 나이는 풍류를 벗 삼을 줄 알며 수차례 정분쯤은 이미 과거의 추억이 되었을 법한 나이였으니까요.  

 키도 훤칠한 그분은 저 먼 한양에서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부임하러 온 분이라 했습니다. 경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시 쉬어갈 참으로 홍원 객관(客館)으로 오시었고, 저는 마침 그날 손님을 모실 차례였던 것이었습니다.

 당신도 혹시 느낀 적 있으신지요. 통성명도 하기 전에 이 사람과는 함께 갈 것 같다는 이상한 끌림을 말입니다. 그것도 순탄한 사랑이 아닌, 숱한 아픔을 견뎌야 지켜질 법한 그런 사랑의 예감을 말입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를 읊고 거문고 연주를 하였습니다. 그분은 듣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시(詩), 서(書), 화(畵)를 더불어 논하며 일천한 저를 일깨워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경(三更)이 되어서야 그분이 북도평사(北道評事) - 북쪽 국경지대의 방위를 담당하는 무관(武官)의 직책 - 로 부임하실 것이란 걸 알게 되었지요. 더 놀랐던 건 뭔지 아시겠습니까? 눈앞에 있는 그분이 바로,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삼당시인(三唐詩人)이자 팔대문장(八大文章)으로 명성이 자자한 고죽(孤竹) 최경창 나리였던 것입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 순간이 여즉 당혹스럽긴 해도, 낭군님 역시 그때 저에게 흠뻑 취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고백을 그렇게도 하시니 외사랑으로 시작한 건 아닌 듯도 하였습니다.

 내리는 비를 핑계로 고죽 나리는 예정보다 하루를 더 묵으시고 경성으로 떠났습니다. 홍원의 사또에게 저를 관기에서 놓아주라는 부탁과 함께 말입니다. 관(官)에 속한 기생은 고을 사또의 허락 없이는 이동조차 할 수 없는 연유로, 저를 경성으로 데리고 오겠다는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족쇄부터 풀어야 했으니까요.

 하룻밤의 풋사랑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그렇게 여기셔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관기로 살아오며 그 어느 고관대작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던 저 홍랑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미칠 것 같은,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목놓아 외칠 수밖에 없는 평생의 한 순간이 저에게 왔던 것이죠.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꿈속에서나 생시에서나, 달을 바라보고 별을 바라보고 님의 기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도 남자들은 일 핑계로 여자를 소홀히 한다고들 하지요? 얼마나 일이 중하기에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지금 돌아보니 남자보다 몇 배나 업에 충실한 여자들도 많더이다. 나도 성심을 다해 사는 것만큼은 자신 있으니 사실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훨씬 좋았을 거라 싶기도 하였습니다. 허나 지금 세상이었다면 이렇듯 한 남자만을 위해 죽지 못해 살아갈 수 있었을지는, 저도 사람인지라 자신이 없어지는군요.


 1년의 추상같은 기다림이 지나고 어느 날 경성에서 사람들이 왔더랬습니다. 북도평사께서 친히 아씨를 호위해 모시고 오라는 명을 내리셨다고 하면서 말이죠. 험한 산길을 넘고 넘는 길이었지만 추호도 고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분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숱한 여진족의 침입으로 나라의 위협이 되는 지경이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커다란 전투에서 오랑캐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 이제서야 저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고요.   

 사실 경성에서의 동거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이미 혼인을 한 신분이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익히 들어서 아시지 않습니까, 고관일 수록 본처 외에 후처, 첩(妾)을 두는 것은 손가락질을 받을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몇 백 년이 지난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세상이 그랬던 것을... 

 막상 힘들었던 것은 낭군님의 직책이 변방을 지키는 평사였다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오랑캐가 물러나 평안한 시간이 계속되었다고 해도, 막사에서 첩을 데리고 국경을 지키는 수장을 군졸들이 달갑게 바라볼 리 만무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어쩌겠는지요, 이젠 낭군님이 저를 더 사모하는 듯했습니다.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었고 서로의 몸짓과 말투, 버릇과 심상이 하나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당신도 사랑에 빠져 정신없을 때 되레 불안함을 느낀 적은 없었는지요? 이 행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꺾일 것 같지 않은 사랑의 농도가 꺾이는 순간이 다가오는 건지, 그런 불안 말입니다. 우주의 섭리는 좋은 것은 언젠가 끊어버리고 나쁜 일도 마침내 베어버린다 했습니다. 예외가 있을는지요, 평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절도사의 모의로 우리 최평사께서 한양 내직으로 발령이 나 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 길 만 길이라도 따라가면 될 일이었습니다만, 모함에 의한 한양행이라 어떤 고초를 겪게 될지 모른다며 곧 한양으로 부를 테니 홍원으로 돌아가 있으라 하시더군요. 참으로 막막하더이다. 쉽지 않은 고행이 될 거라 내 진즉 감내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해도, 기녀의 삶이 이토록 뼈를 짓누르는 고통이 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사랑이 눈앞에 있는데 망설이시는지요. 여러 핑계를 대면서 먼저 다가서지 못하는 건 아닐는지요.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둘 사이의 장애물을 힘써 밀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으시는지요. 저, 홍랑에게는 절대로 와 닿지 않는 어리광일 뿐이라는 걸 왜 모르십니까? 무엇이 두려운지요?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은 잠깐입니다. 사랑을 알아차렸으면 달려가면 될 입니다. 함경도 경성과 한양까지 산 넘고 물 건너는 고행과 신분제도가 세워놓은 철의 장막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모와 연정의 시(詩)를 읊을 수밖에 없었던 그때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사랑하기 좋은 날들인가요. 그대가 주변 사람들에게 다시 전하세요. 후회하지 말라고, 놓치지 말라고, 지금은 그래도 될 때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남 탓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아무리 극복이 힘든 벽이 있다 할지라도 온 몸으로 들이받아 금이라도 가게 해야 할 것인데, 경성으로, 한양으로 두 번이나 떠난 님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 당신에게 뭐라 훈수를 둘 자격이 있을 리 만무하네요. 금세 꼬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한번 시야에서 벗어나 본즉, 님과 해후한다는 것이 얼마나 요원한 것인지 실감을 하였기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모양입니다.

 평사님의 한양 가는 길을 며칠간 따라가며 배웅하다가 결국 평사님의 간곡한 만류로 쌍성이란 곳에서 방향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이 떠나가는 별사(別事)도 구슬픈 일인데, 길 위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헤어지는 일은 참으로 먹먹함이 그지없더군요. 먼저 말머리를 돌려 가라고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서방님께서 먼저 떠나시고 저는 그 뒷모습이나마 기억 속에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기약할 수 없는 헤어짐을 예감하면서도 공연히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서로를 보낼 때가 있지요,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걸 쿨하다고 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글쎄요, 가슴속으로 꾹 참아가며 무심한 듯 보내는 게 쿨한 거라면 저는 이 세상에서 도저히 쿨한 사람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홍원으로 산길을 건너오는데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입술을 깨무니 소리는 내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놈의 눈물은 어찌나 쉬지 않고 흘러나오던지요, 내 눈 속에 그리 많은 홍루(紅淚)가 담겨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말에서 내려 걷는데 얼굴에 무언가 스치더군요, 버드나무 가지였습니다.

기가 막히지요. 버드나무 가지 하나 조차 꺾어 보내지 못하는 원통함이 사무치더이다. 오늘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1년이 되고, 1년이 평생이 되어도 그리움과 애절함은 잦아들지 않을 거라는 고통이 가슴속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가슴에 구멍이 난 듯 아팠습니다. 닿지도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시 한 수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아시겠는지요.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이별의 장면은 순간 정지된 화면처럼 영원히 그 형상이 남아 있는 법입니다. 그 형상은 제게 이 시(詩)와 함께 떠오르곤 한답니다. 그동안 비통으로 토해냈던 시들을 묶어 파발마를 통해 서방님이 계신 한양으로 보냈습니다. 받아보셨는지는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 마음속을 들추어 보내드리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했으니까요. 규원(閨怨)이 지나쳐 저주가 되었던 것이었던지요, 어느 날 한양에서 온 서방님의 답신엔 제가 보낸 시를 한역(漢譯) 한 번방곡(翻方曲) 한 수와 함께, 신체가 쇠하여 자리에 누워만 있다는 비보가 적혀 있었습니다.



 折楊柳奇與千里    人爲試向庭前種  ( 절양류기여천리   인위시향정전종 )


 須知一夜生新葉    憔悴愁眉是妾身  ( 수지일야생신엽   초췌수미시첩신 )


   버들가지 꺾어 님에게 보내오니   바깥을 바라보는 창 앞에 심어 두고 보소서

   행여 간밤에 새 잎이라도 돋아나거든 초췌하고 근심 어린 나인가도 여기소서



 어찌 팔문장가인 님이 스스로 시작(詩作)을 하지 않고 이 몸이 보낸 시를 한역해서 돌려보낸 것인가 원망도 했었습니다만, 눌러쓴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어 서방님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으니 왜 감동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이제는 몸이 상해 누워만 있다는 소식에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옥을 거쳐서라도 아니 갈 수 없었습니다. 다만 급히 한양으로 가는 길에 가마꾼이나 시종을 구할 수도 없는 터라 오직 제 스스로 위험을 헤쳐 나가야 했지요. 일부러 산발을 하고 얼굴을 더럽힌 뒤 남장을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일 년 같은 하루하루를 헤치고, 열이레가 걸려서야 한양 도성 입구에 도착을 하였답니다. 지금은 엄두도 나지 않는 고행길이 아닐 수 없었지요. 두 번 다시는 하지 못할 짓이었습니다. 

 산 넘어 산이었습니다. 당시엔 양계 - 함경도와 평안도 - 주민들의 한양 출입이 허용되지 않아 님이 계신 곳에 다 왔음에도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주위를 수소문한 끝에 몇 다리를 건너 연락이 닿아 서방님의 집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먼 길을 오가기가 수월해지면서 이 시대에도 장거리 연애를 하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리도 바삐 살아가는 탓에 어쩌다 한번 얼굴을 보게 되면 얼마나 반갑고 설렐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을 때마다 보지 못하는 게 한으로 남기도 하겠지만, 마치 사랑을 약조한 뒤 처음 만나는 자리처럼 두근거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확실히 볼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가끔 서로를 보는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야 그 만남이 보장될 리가 없었으니 애를 태웠던 것이었지요. 그나저나 수척해진 서방님의 모습을 보니 왜 그리 안쓰럽고도 낯설었던지 모릅니다. 하긴 남장을 한 제 모습을 보고 그분은 어떠셨을까 생각하면 제 서먹함은 문제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시대도, 국적도 다른 연인의 모습이군요, 저 홍랑과 고죽 선생님과의 애정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구절엔 제가 뼈저리게 느꼈던 감정 그대로가 담겨 있는데, 요즘 사람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니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흐뭇해집니다. 이렇듯 사랑이라는 놈은 언제 어디서고 백성들 마음속으로 파고들며 살고 있으니 내 어찌 당신과 대화가 안 통할 수 있을는지요. 그러니 사랑으로 아파 올 때에는 하늘을 향해 이 홍랑을 불러보십시오. 내 부족하더라도 기꺼이 도와 드릴 테니까요.


 사달은 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헤어짐이 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대비였던 인순왕후의 승하로 국상(國喪) 시국이 되자마자, '고죽이 첩을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던 것입니다. 국상 중엔 첩을 추가로 들일 수가 없었던 마당에, 게다가 그 첩이 양계 출신이니 그 소문의 파괴력이 오죽했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으실 겁니다. 결국 서방님은 면직을 당하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신세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분이 아니라 제가 곁을 떠날 결심을 했던 것이죠. 저는 그분 주위에 있어선 결코 안 되는 악귀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서방님의 몸이 쇠한 것도, 온갖 수모를 받고 면직을 당한 것도 모두 제 탓이었으니까요. 잡아채는 손을 뿌리치고 저는 다시 홍원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괴이한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을 망친다면 떠나는 것만이 정답이었습니다. 제가 먼 길을 떠나는 날, 세 번째 이별을 하던 바로 그 날, 그분은 증별(贈別)의 시를 선사해 주셨습니다.



  相看脉脉贈幽蘭    此去天涯幾日還  ( 상간맥맥증유란  차거천애기일환 )


  莫唱咸關舊時曲     至今雲雨暗靑山  ( 막창함관구시곡  지금운우암청산 )


   아쉬워 보고 또 본 그대에게 난초를 드리오니  이제 저 먼 곳으로 가면 어느 날에나 돌아올까

   함관령의 옛 노래는 부르지 마오  지금은 궂은비 내려 청산을 드리우네


 1576년 여름에 다시 천추의 헤어짐을 겪었으니 1년에 한 번씩 이별을 마주한 셈인지요. 그래도 이번엔 증별 시와 함께 님의 시축(詩軸-시를 적은 두루마리)을 선물 받아 몸에 지니고 있음에 한결 위로가 되었다 하겠습니다. 당신도 정인(情人)이 아끼던 물건을 갖고 계신지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들도 특별한 사람이 간직하고 있었다면 곧 그의 분신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의 소유욕을 일절 가져본 적이 없으나 사랑하는 님이 지은 시들을 품에 지니고 있으니 이만한 소유의 기쁨이 또 어디 있을는지요.

 

 삼당시인에 팔문장가로 명성이 높은 분이라 세세한 소문 조차도 이 벽지까지 흘러 들어오더군요. 경성에서 북도평사로 계실 때 오랑캐를 섬멸한 공이 뒤늦게나마 인정되어서, 서방님이 당신의 고향과 지척인 전라도 영광의 군수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하고 게다가 다시 관직에 오르신 것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습니까만, 이 첩과의 거리는 오히려 더 멀어졌으니 마냥 웃음 지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혼자 시축에 기대어 그리움을 견딘 지 어느덧 7년이란 시간이 흘렀더이다. 곁에 없는 연인에게 집중하며 보내는 7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긴 지 짐작하시겠습니까? 첩으로서의 매정한 운명이야말로 조선이란 곳에 태어난 것이 한이 되었던 가장 큰 까닭이었습니다.

 

 관직운이 갈수록 들어올 운명이었는지요, 말씀드린 대로 본디 무관(武官)이셨지만 시와 문장으로도 당대 최고로 이름을 날리던 서방님의 능력을 이번엔 성균관에서 알아차리고, 백관들을 가르치는 '학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고향에 더 기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더라도 나라의 영광스러운 부름을 어찌 물릴 수 있을까요. 교지가 내려온 다음날, 그분은 일행들과 함께 짐을 꾸려 한양길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고일까요. 왕십리에 도착해 장안으로 들어가기 꼭 하루 전, 그분은 정체불명의 자객에게 객관에서 살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파싸움에 희생되신 건지 도성 사람들의 낭설이 난무했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습니다. 차라리 날이 갈수록 쇠하여 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시지 하필 변사라니요. 내 님이 그렇게 떠나가실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마흔다섯의 나이는 그 시대에도 너무 이른 죽음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양아버지의 허락을 받자마자 한양으로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 얼른 가서 서방님의 죽음이 거짓이었음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봉두난발의 거지 꼴을 하고 해주 최 씨의 본가인 파주에 당도했습니다. 이미 서늘한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버린 고죽 서방님을 다시 살릴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지요. 도리어 담담해지더군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갈 핑곗거리가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이었습니다. 죽은 님의 흔적이 있는 바로 그곳이, 살아있으되 만나지 못하는 천리 길 바깥보다 저에게 더 위로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눈물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낭군님이 계신 곳 바로 아래 초막을 지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혹시나 수묘(守墓)에 방해가 될까 주운 돌로 얼굴을 찧었습니다. 이젠 기생 홍랑이 아니라 걸인 홍랑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지요. 길 가던 사람이 저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피하는 것이 신기하더군요. 쓰다듬어줄 손길도 없는 이 하찮은 겉 거죽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덕분에 이후의 수묘살이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9년간의 수묘생활을 두고 후세의 많은 분들이 놀라워하시는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봤습니다. 처음에도 말씀 드렸듯이 저는 세상에 도움을 준 것도 아니고 유교사회의 예를 충실히 지키려 했던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생각과 똑같을 뿐이었습니다. 가장 그리운 사람이 잠든 곳에서 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갈 곳 없는 제 처지에 그 이상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평생을, 잠든 그분의 곁에서 그분이 남긴 시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기에 그 길을 택한 것이란 말입니다. 결코 힘들지 않은 9년의 시간을 벗어났던 것도 제 뜻이 아닌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낭군님이 남긴 것들을 빼앗길까 봐 그게 두려워 피했던 것이죠.  

 난이 끝나고 저는 그분이 남긴 시축을 들고 다시 파주를 찾았습니다. 해주 최 씨 가문의 모든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없었던 시축을 전해드렸습니다, 혹여 제가 혼자 떠돌다 그마저도 잃게 되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태산이었으니까요. 그분의 가문에서 소중히 후대에 전달하시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이 독이 되었을지, 저도 마흔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생각지도 않았던 축복이 사후에 주어지더이다. 해주 최 씨 가문의 어르신들이 저의 보잘것없는 일편단심을 거룩하게 여기셔서, 낭군님이 잠드신 곳 바로 아래에 저의 영원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게다가 때맞춰 오셔서 예를 갖춰 주시더군요. 이런 영광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기쁨을 넘어서 내 사랑하는 사람의 지척에서 영겁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릴없이 고마울 따름인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지내냐고요? 말도 마세요, 생전에 고생을 하도 시켰던 것이 걸리셨던지 저에게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지질 않습니다. 천하의 고죽 선생이 마누라 곁에만 붙어있으면 어찌할 것이냐, 팔문장가 어르신들 만나서 사후 회포라도 푸시라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정도니까요. 이렇게 찰거머리처럼 제 곁에 붙어 있을 걸 진즉에 알았다면, 그토록 애달프게 사랑은 하지 않았어야 하나... 하고 고민할 정도라면 믿으실는지요.

 어쩌겠습니까. 함께 하지 못해 한이 된 우리 두 사람이니 지겨워도 붙어 있을 작정입니다. 이렇게 천상에서 지내다가 염라대왕이 지옥으로 보내더라도 둘이 한 몸이 되어 기꺼이 갈 생각입니다.  


 님과의 연(緣)을 풀어놓자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길어졌군요,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옛사랑 이야기를 당신이 해 달라고 했어도 이리 지루하게 제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어 공연히 낯이 붉어집니다. 대신 제가 선물 하나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겠습니다. 저 역시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기생을 일컫는 '해어화(解語花)'라는 말이 있지요.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애초 당나라의 양귀비를 지칭하는 별칭이랍니다. 하늘에서 신문물을 다 들여다보고 살다 보니 영화란 것에 깜짝 놀라기도 했는데, 마침 <해어화>란 제목의 영화가 있더이다. 조선의 끝무렵에 살았던 한 기생의 삶을 그렸다고 하니, 바로 제 후배의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 영화에서 흐르던 음악을 하나 드릴 참입니다. '사랑 거즛말이'라는 제목이 맞겠지요? 그리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함에, 뜬구름 잡거나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껍질을 사랑하는 건 거짓 사랑이라 부를 수 았겠습니다. 약해 빠지지 않고 지독하고 지극하게 간절한 것이 진짜배기 사랑이 아닐는지요. 당신도 거짓 사랑을 넘어 영혼을 담아 부딪힐 수 있는 진짜배기 사랑을 하시라는 경계의 뜻으로 한 곡 띄워드리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무탈하시고 안빈하시며, 행복하시길 빕니다. 즐거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ywjyhG5XbM





  

 


  

 딱 예상했던 만큼 헤맸습니다. 파주에 있는 최경창과 홍랑의 묘 위치를 검색해 보면 많은 분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알려주시는 정보들이 있는데 하루가 다르게 변하기는 이곳 파주도 마찬가지라 영 들어맞지가 않습니다. 발품을 꽤 들이고서야 찾아낼 수 있었는데요, 여러 블로그에서 기준으로 삼는 교하면 청석초등학교보다는 지역난방공사를 제대로 찾는 편이 훨씬 수월할 듯합니다. 난방공사 바로 앞의 삼거리에서 자유로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오른쪽 야트막한 산 위에 해주 최 씨의 묘역이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도움을 주신 '희맘'블로거님께 진심을 담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홍랑의 가비와 고죽의 시비가 있는 해주 최 씨의 묘역


 이 무덤들은 원래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차를 타고 20여분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이 그곳에 주둔하게 되어 부대 내로 땅이 편입되는 바람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언덕 위 묘역으로 올라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명확한 진입로가 없는 데다, 무성히 자란 잡풀에 묘지 앞 민가에서 재배하는 것으로 보이는 채소밭이 깔려있어 헤치고 피하며 걸어 올라가기가 수월치 않았는데요, 결국 묘지 앞에 있는 가정집의 벽을 따라 돌아서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통(嫡統)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유교적 사회에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해주 최 씨 가문이 그녀의 공을 높이 사 고죽 산생의 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묘를 조성했다고 하니 그것만 해도 고맙고 놀라운 일인가 싶었는데, 봉분의 규모와 비석의 상태 등을 보면 낭군인 최경창의 묘역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성을 들여 다듬어진 공간이었습니다. 하긴 최 씨 후손들이 홍랑 할머니에게도 오래전부터 직계 선조와 마찬가지로 예를 올리고 있으니 마땅한 대접이라 하겠습니다.


 홍랑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온 까닭인지, 남편 고죽의 무덤을 초췌한 행색으로 지키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9년간의 초막 시절 그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지만 그 마음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님이 묻힌 곳을 지키며 뼛속 깊은 고통만 느꼈을까요, 이제는 헤어지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오히려 그녀의 힘든 시간을 잊게 만들었을까요. 물어보는 걸 깜빡했지만 아마도 홍랑 할머니는 "내가 좋아서 있었던 거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어." 하고 답하지 않았을까요.


 어느 날 TV에서 후배 아나운서가 한 말이 심장을 쿵 때립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사랑하는 거래요."

 

 남녀관계를 두루뭉술하게 봤을 때 이보다 더 훌륭한 분석이 있을까요? 사랑의 차원이 다릅니다. 님이 죽고 없어도 연인이 품고 있었던 사랑만 믿으면 되었기에 변할 리가 없습니다. 홍랑 역시 '남자'라는 형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남자가 여자라는 실물의 대상을 사랑의 목적격으로 삼는 것에는 죄가 없으나, 이왕이면 한 차원 올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서로의 사랑을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분명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범우주적인 사랑도 가능할 테니까요.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에 집을 바짝 끼고돌아야 해 허락을 받으려 기웃거려 봤습니다만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내려오는 길에 집에서 어르신이 나오시더군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올라갔다 왔습니다. 죄송해요 어르신."


 가끔 찾아오는 객들을 겪으셨는지요, "으응~~" 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십니다. 무성히 자란 푸성귀들을 둘러보시는 어르신의 모습에서, 사랑의 성지(聖地)를 지키는 수호자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우리의 곁에도 사랑의 수호자가 하나씩 붙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르신께서도 건강 잘 살피셔서 무심히 그 자리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안타까운 사랑으로 통증이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좀체 오지 않는 사랑에 불안하신지요. 철학자 김진영 선생님은 '내가 그것이 꼭 있었으면 하는 그때에는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좀체 다가오지 않다가도 불쑥 내 곁으로 들이닥치는 것은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렇게 맞닥뜨린 사랑이 시공간을 초월하기 위해선 사랑한다는 감정을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당신의 사랑에게 망설이지 말고 온 몸을 던져 보세요. 영원으로 갈 수 있도록 말이죠.



 사랑합니다.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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