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tal Eclipse Aug 27. 2020

23 Walk Affair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모든 곳의 어떤 것들








 미국의 저술가이자 비평가, 여권운동가인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세계적으로 팬덤이 두텁습니다. 감정과 신념을 말과 글로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해 그야말로 '선수들이 존경하는 선수'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공간과 인상의 어울림을 찾아보려 애를 쓰는 저는 그녀의 저서 <걷기의 인문학>을 통해 걷기 위한 걸음이 아닌 '보기' 위한 걸음에 대해 한 수 배울 수 있었습니다. 도착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더 큰 가치를 얻을 수 있고, 내가 걷는 모든 길들이 나에게 하고 있는 말은 다 다르다는 것이죠. 덕분에 앞으로 떠나게 될 여행길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보일 것 같은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리베카 솔닛이 미국의 대도시 L.A.와 뉴욕을 비교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시작부터 오해였습니다. 걷기와 자연탐색 예찬자의 글이니 햇살 가득한 캘리포니아의 뻥 뚫린 도시, L.A.를 찬양하는 반면 욕망과 비정함이 한데 섞여있는 마천루의 도시, 뉴욕을 폄하하는 글이겠거니 짐작한 것이죠. 반대였습니다. 적어도 '걷기'의 덕목에 있어서는 뉴욕의 완승도 아닌 K.O.승이었습니다.


 

           L.A.(좌)와 뉴욕(우)의 다운타운 진입로


 화자나 작가가 제시하는 자료에는 이미 그 속에 편견이 깔려있는지 의심해 봐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 객관적인 증거인 것처럼 문장을 툭 던져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장을 펼쳐 나간다면 여지없이 말려들게 될 수 있는 노릇이니까요. 이 사진들 역시 말하고자 하는 생각이 깔린 상태에서 고른 것이기에 의도적인 선택이었다고 미리 실토하려 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모른 척 속아주시면 감사할 따름이겠습니다.


 약간은 과장해서 말해보려 합니다.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는 천사들의 도시 L.A.는 다운타운과 베드타운이 뚜렷이 구분된 곳입니다. 주거지와 일터가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각각의 공간은 바다 위의 섬처럼 둥둥 떠 있습니다. 그 공간을 이어주는 곳은 바닷길, 즉 '항로'의 역할을 하는 널찍한 도로, 그것도 '차도'입니다. 집에서 일터 사이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휑한 풍경이 전부입니다. 지하철 역과 역 사이의 의미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의 가치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랄까요. 도심 내에는 물론 사람들로 붐비는 휴게공간도 존재하겠습니다만 역시 넓은 차도로 구획된 곳이 대부분입니다. 캘리포니아의 여유와는 어딘가 어긋나 보이지 않는지요. 일은 일이고 집은 집, 칼로 베어낸 듯 그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있다면 아스팔트의 연속이겠지요.   

 공항에서 뉴욕 맨해튼으로 들어갈 경우도 물론 섬에서 섬으로의 이동이라 할 수 있겠지만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의 구역 안으로 들어가면 그 순간부터의 이동은 L.A.의 그것과 사뭇 다릅니다. 자동차는 운전하기가 오히려 성가실뿐더러 일터 근처에 주차하기도 여간 까다롭고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죠. 어쩔 수 없이 이용하는 지하철 메트로는 지저분한 것은 물론이고 사람 간 거리두기도 전혀 지켜질 리가 없는 교통수단임에도, 도심 곳곳을 커버하는 막강한 장점으로 뉴요커들의 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 넓지 않은 차도가 교차하는 도심의 거리는 일터로 혹은 집으로 가는 익숙한 보행들의 집합과 친구와의 식사 약속, 연인과의 설레는 데이트 장소로 향하는 경쾌한 발걸음 소리로 가득합니다. 사람이 인도에 가득하니 레스토랑 주인은 보행자들을 향해 노출된 가게 유리창에 먹음직스럽게 육즙을 머금은 스테이크 사진을 붙여놓을 것이고, 장식용품을 파는 샵들은 핼러윈데이 특수를 고대하며 올해의 기발한 신상들을 전면에 디스플레이해 놓을 것입니다. 5번가를 제외한다면 뉴욕시내의 차도라야 길 건너편은 훌쩍 넘어갈 수 있는 거리여서 신박한 무언가가 보인다면 바로 순간 이동이 가능합니다. 자칫 삭막해 보일 맨해튼 한복판은 계절과 유행을 한껏 만끽하며 걷는 뉴요커들로 생기 넘치고 아름답게 물들어 갑니다.


 지형의 차이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새롭게 만들어지는 계획도시는 불온한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유럽의 수많은 도시와 뉴욕의 공통점이라면 사람들이 걸어서 마주치고, 그래서 모여들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 아닐까요. Plaza, Forum, Square, Platz 라 불리는 곳들이겠습니다. 좁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등장하는 '광장'이죠. 사람들은 한데 모일 수 있는 공간의 등장으로 개방감을 느끼며 열린 마음으로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기꺼이 나눌 수 있습니다. 신변잡기로 시작해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여론도 생산됩니다. 심지어 수많은 집회의 근원지는 광장이었음을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공간을 회피할까요. 절대군주가 존재하기 힘든 근대 이후 여론의 형성이 두려운 쪽은 권력을 가진 사회 지도층이었고, 자연히 도시계획에서 소소한 만남의 광장은 뒷전이 되어 버립니다. 규모의 경제를 주장하며 거대한 시설과 빌딩을 지어놓고 이동을 위한 널따란 차도를 만들어 쾌적한 운전환경을 보장합니다. 걸어서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려면 8차선이 연속된 블록을 가로질러 가야 합니다. 위험할뿐더러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주민들은 일터에 고립되고 멀리 떨어진 택지에 자리 잡은 가정으로 자가용을 몰고 귀가합니다. 소란스럽기도 하지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할 수 있었던 소통의 공간이 사라진 도심, 여론의 집중과 비판이 생성되기 힘든 도시구조는 곧 권력을 가진 자의 유토피아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꾸 캘리포니아의 환경에 더 마음이 쏠리는 게 사실입니다. 메가시티의 소란스러움을 싫어하는 개인적 성향도 더해져서 말이죠. 땅이 넓어서 거대한 건물과 광활한 도로를 만들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온화하고 쾌청한 날씨와 함께 아기자기하게 걷고 싶은 공간까지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요. 그러니 '뉴욕과 같이 걷고 싶은 도심지를 가진 공기 좋은 L.A'가 이상적이겠군요, 참 욕심도 많습니다. 이래저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도시계획 단계에서 시민들의 참여와 제어가 조건인 듯합니다. 권력층의 의도가 도시계획 패러다임에 반영된다면 그 도시는 곧 극히 일부만을 위한 공간이 되어버릴 테니까요.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권력의 제어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영화음악 이야기를 또 해야겠습니다. 여행하며 느낀 특별한 감성보다는 저에겐 영화의 배경으로 더 기억되는 곳이 뉴욕이니까요.

 그렇게 영화음악 앨범을 사 모은 덕인지, 입사 3년 차 정도에 선배가 진행하는 FM 프로그램에서 영화음악 코너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그토록 공유를 원했던 영화음악을 방송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머리와 마음속에만 있던 영화와 음악들을 풀어놓으려니 15분 남짓의 시간이 왜 그리 짧던지요, 코너 준비를 위해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앨범들을 쭉 늘어놓아 보았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작품이 가장 많았던 것. 뭐 그건 늘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토록 헤어 나오기 힘든 곡들로 장식된 다수의 영화들이 하필 '뉴욕'을 배경으로 선택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걷고 싶고, 걸을 수밖에 없어서 관계와 인연이 만들어지기 쉬운 공간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공간을 축소시켜 보자면 뉴욕 안에서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의 씬이 스토리의 굴절이 되는 작품들이 꽤 있었습니다. 언제 적 엠파이어 스테이트입니까. 세계 최고층 빌딩의 지위는 넘겨준 지 한참이고 이름을 말하는 것 자체가 왠지 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구시대적 랜드마크가 돼 버린 건물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잡고 습득해야 할 정보도 무한한 이 시대에 미국의 과거를 대변하는 빌딩의 내력까지 꼭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어차피 과거를 감싸 안기 위한 것이니 바다 건너 그들의 입장에서 건물을 바라볼까 합니다. 지금의 건축기술을 총동원한다 해도 가공할 만한 속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29년 기공식을 하고 1930년 초에 착공해 이듬해인 1931년에 완공되었으니 불과 13개월이라는 공사기간 만으로 400미터가 넘는, 오랜 기간 세계 최고층의 지위를 획득한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움인 것입니다. 뉴욕주의 별명인 'Empire State'의 이름을 그대로 전승한 이 마천루는 미국의 자존심이자 현대 자본주의 메카의 상징이었던 것이죠. 착공과 준공연도를 떠 올려 봅니다. 그렇습니다, 전 세계 경제를 붕괴시켰던 파도의 시발점, 미국 대공황이 시작되고 번져 나간 시기와 일치합니다. 미국 내 노동자의 4분의 1이 실직하고 전 세계 무역의 총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진 암흑의 시간에 쌓아 올려진 건물이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과 실망이 사회 전반을 무겁게 짓누르고 그동안 쌓아온 세계 최강국의 자부심은 한낱 모래성이 되어버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럼에도 우뚝 솟아올라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순한 물리적 구성체가 아닌 유일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죠. 구름을 관통할 듯한 꼭대기를 바라보면서 최고의 자리로 복귀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오롯이 받아낸 미국인들의 신전이자 오벨리스크였습니다. 

 시대를 건너뛰며 미국인의 좌절과 부흥을 온몸으로 목격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그 자체가 미국이었습니다. 좌절과 희망, 그리고 낭만을 빌딩에 쏘아 올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과거를 비춰볼 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많은 영화에 배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의아할 일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떠들어댔어도 남녀의 사랑이 주제가 되는 영화에선 세세한 분석이 부질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유일하게 광활한 전망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사랑을 선사하고 받아들일 가장 순수한 상태의 심성이 만들어질 장소가 이 높은 빌딩 외에 또 어디 있었을는지요. 요즘도 고층건물의 전망대에는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로 가득합니다. 비싼 입장료는 사랑의 확신을 위한 대가이니 선뜻 지불이 가능합니다. 타이타닉의 뱃머리에서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난간에서도 조망과 사랑은 하나가 됩니다. 로맨스 영화에 등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 인류의 걸작을 비웃기라도 하듯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기어 오른 킹콩은 최고의 전망을 내려다보며 사랑하는 인간과 조우합니다. 빌딩 숲으로 가득한 맨해튼일지라도 저 높은 곳은 지평선으로 붉게 내려앉는 노을을 조망할 수 있는 로맨틱한 장소일 테니까요. 

 킹콩이 부럽습니다. 영화 후반부로만 보자면  <킹콩>은 분명 '로맨스' 장르입니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mMp_yTi8g30-gzHJmZtrAz9jgiTX45W08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mSDrGCK6sUWzENpLOQl_WUyeNQk3u8wTw


 엔니오 모리꼬네의 개인기가 관객을 무장해제시키는 <Love Affair>와는 달리 <Sleepless in Seattle> O.S.T.는 루이 암스트롱, 냇 킹 콜, 해리 코닉 주니어, 그리고 타이틀 곡인 'When I Fall in Love'를 부른 셀린 디온과 클리브 그리핀 등 당시 역대급 음악인들이 각자 능력을 발휘한, 그야말로 'Various Artists'들의 작품입니다. <러브 어페어>에서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전망대가 재회의 약속이 지켜지지 못한 슬픔의 장소였다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의 전망대는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인연임을 증명해 주는 약속의 공간이었습니다.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두 영화지만 O.S.T.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영화처럼 여러 감정들이 톡톡 튀어나오는 '노래' 음반인 반면, <러브 어페어>는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한 서정적인 '연주곡' 위주로 채워진 앨범이기 때문일 텐데요, 감성의 차이가 있는 음반이라서 옆에 놓을수록 개성은 도드라집니다. 다만 시애틀이 주 무대가 되었어야 할 <Sleepless in Seatle>에서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인상이 먼저 떠오르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러브 어페어>에서의 전망대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의 전망대, 사뭇 다른 공간입니다.

 

 그런 상상 해본 적 없으신지요, 영화에서처럼 내 삶에서도 인상적인 순간에 배경음악이 흐르면 어떨까 하는. 절망에 빠지고 도전에 실패했을 때는 '띠로리~~~'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가 깔리고, 서로 주위를 서성이다가 결국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연인들을 향해서는 러브 어페어 O.S.T.중 <For Annette & Warren>이 하늘을 스피커 삼아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터무니없는 공상이지만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인생의 한 순간 한 순간을 꼭꼭 씹으며 느끼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긴, 여기저기서 각종 장르의 음악소리가 들려 정신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슬픔은 아예 확실하게, 행복은 더할 나위 없이'. 결코 이뤄지지 않을 이런 상상이 영화에선 현실이 됩니다. 장면에 들어맞는 선율이 능력 있는 음악감독님들 덕분에 영화 속 곳곳에 배치됩니다.


 일상에서도 심미적 가치는 넘쳐납니다. 예술이란 것이 숨겨진 가치를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감추어져 있는 가치를 통찰할 수 있는 영혼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예술가로 남게 되는 것이겠죠. 

 모든 사람이 공감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심미적 기준으로 예술과 예술가를 판단하면 될 일입니다. 누군가에겐 추억의 앨범과 흔적들이, 또 누군가에겐 언젠가 함께 했던 추억의 공간이, 또 다른 이들에겐 소중한 감정들이 최대치일 때 접했던 영화와 음악들이 곧 진정한 예술이자 예술가가 되어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페더럴웨이에서 같은 과의 동생들과 거나하게 한 잔 걸친 후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새벽 2시쯤으로 기억됩니다. 갑자기 순찰차가 스텔스처럼 스르륵 다가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What are you doing here at this time?"


  "........ 뭐래?......  Going home. Is that a problem?"


 황당했습니다. '2시가 그리 늦은 시간인 건지, 아니 늦고 말고를 떠나서 내 발로 내가 걸어가는데 경찰이 뭐하느냐고 묻다니, 걸아가고 있는 거 안 보이나?'

 주택가로 둘러싸인 지역인데도 늦은 밤이라 인적이 뜸한 이 거리는 걸어가면 '안 되는', 적어도 걸어가면 '의심받아 마땅한'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밤거리의 공포를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주민들은 알아서 칩거하고 있을 뿐이고, 두려움을 모르거나 현지 사정을 모르는 답답한 인간들이나 이런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그런 인간들에게 당당히 왜 걸어 다니는 거냐 하고 물어볼 수 있고, 적절한 답을 듣지 못하면 취조를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도심과는 섬과 섬처럼 동떨어진 이런 택지에서는 보행이 곧 범죄의 의심행동이 될 수 있다는 뜻이죠. 명백해졌습니다, 너무 밝아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밤거리가 보행환경은 훨씬 낫다는 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지만 단시간에 효력이 멈춰버립니다. 비록 청정한 한라산의 기슭이 아닌 도심의 일터 주변일지라도 리베카 솔닛의 지혜처럼 눈에 담기는 모든 것들을 느끼면서 걷게 되면 힐링의 지속시간이 꽤 늘어나지 않을까요. 풍경과 마주치고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들이 모여 보행자의 정서를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사랑과 인연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무대에선 '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재회를 기다리며 걷고, 쓰디쓴 상처를 가진 채 걷고, 내일에 대한 설렘을 담고 걷는 모든 이들이 교차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채워진 곳이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22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브루클린  -Dumb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