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의 어떤 것들
이번에도 한겨울이었습니다. 그나마 2년 전 그날보다는 추위가 덜했기에 마음도 덜 무거웠다는 변명이 먹힐 수 있었을까요. 근처 슈퍼에 들러 그때와 마찬가지로 핫팩 10여 개와 내복을 구입했습니다. 제주도청 일대는 도의회, 교육청 등의 관공서와 공기업이 몰려 있어 주차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10여 분을 뺑뺑 돌고 돈 끝에 겨우 자리 하나를 차지해 놓고 도청 정문 앞에 있을 그분을 만나러 걸음을 재촉합니다.
2년 전엔 제주도교육청 앞길의 텐트 안이었는데, 이번엔 길 건너 도청 앞 노상에 뻣뻣하게 앉아 계셨습니다. 두 눈은 초점을 잃었습니다. 피부는 전보다 훨씬 검어진 듯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표현 자체가 역설일 테지만 누구라도 단식이란 것을 '밥 먹듯' 하면 그 정도는 약과일 것입니다. 진즉에 병원신세를 지고 있거나, 병원 바깥에 있더라도 장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소화불량과 면역기능의 약화로 병약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고집은 여전했습니다. 세종시에 있는 환경부 청사 앞에서 단식을 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뿐인데 또 곡기를 끊고 혼자 저렇듯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이 꼭 다섯 번째군요. 김경배 씨는 제주 제2공항 건설 반대를 주장하며 2017년 10월에 42일, 2018년 12월부터 38일간, 2019년 12월에는 열흘, 2020년 9월엔 19일간, 그리고 이번에 또 단식에 돌입한 것입니다. 한 번 한 번의 단식이 얼마나 큰 장기의 손상을 가져오는지 의사에게서 설명을 들었기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경배 씨를 다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건강에 대한 걱정보다 더 두려운 것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2공항 반대에 대한 그의 단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마땅히 그가 행해야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나태함이었습니다. 김경배 씨를 만나러 가고, 만나고 나오는 제 발걸음부터도 진정한 무거움이라곤 전혀 녹아들지 않았으니까요.
2년 전 겨울, <우영팟>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돌아볼수록 자랑스러운 패널들과 함께 단식 중이던 김경배 씨를 만나러 도청 건너편의 천막으로 향했습니다. 도내의 극심한 갈등 이슈들로 당시 이곳은 일부 정당과 시민, 사회단체의 천막이 어깨동무를 하며 길게 이어져 있을 때였지요. 단식의 심정을 물으려는 방송사의 취재진과 뉴스를 보고 응원차 달려온 도민들로 천막은 제법 열기가 후끈했습니다. 인터뷰 당일에도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질문에, 안 그래도 찾아오는 손님 많고 허기가 극에 달한 분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것 같아 마음이 영 편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럴 필요 없었습니다. 남아있는 기력은 내뱉는 말의 분량과 정확히 반비례할 것이라는 쓸데없이 산술적인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의 편이든 아니든을 떠나서 - 물론 대부분은 김경배 씨를 응원하는 분들이었지만 - 제주에 들어선다고 하는 두 번째 공항을 왜 반대하느냐, 이렇게 목숨을 걸고 단식까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고 묻는 방문자들의 질문에 맘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을 할 수 있던 순간이 차라리 행복했던 것입니다. 엔도르핀이 온몸에 퍼지는 느낌을 받으셨을까요? 자꾸 찾아가서 괴롭히는 것이 오히려 단식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관심이었습니다. 누가 어떤 이유로든 양심의 당위성만을 무기로 싸우고 버티고 있을 때, 그가 진실로 확인한 주변의 관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투지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꼬치꼬치 묻고 더 오래 붙잡고 늘어졌어야 했습니다.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응원하고 동감하는 사안으로 누군가 시위를 하고 있던가 단식을 하고 있다면 묻고 또 물으십시오. 기운을 전달하는 방법 중 더 이상의 것은 없습니다.
제주도의 미래가 어떤 물길을 만들며 나아갈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경배 씨, 이전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캐묻지 않는 것은, 이젠 거의 모든 제주도민들이 진지하게 2공항 문제를 깊이 알아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신기하게도 시민의 선택이 늘 옳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 억울하고 괴로운 마음 잠시 내려놓고 기운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운 차린 뒤 또 단식을 결심하면, 또 찾아갈 테니까요.
진지하기 그지없는 토론부터 흔하게 볼 수 있는 지역 매거진 프로그램, 무려 10년 전 아빠들이 제주 요리를 만들어 봤던 먹방의 탄생기 프로그램과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미팅을 주선해 줬던 예능 프로그램까지, 해보고 싶은 방송 못해봤다는 투정을 부린 것이 무색하게도, 뒤돌아보니 소중한 경험들을 다 챙겨 온 것 같습니다. 가장 최근에 진행을 맡았던 프로그램이 바로 <우영팟>이라는, 제주분들 외엔 고개가 갸우뚱해질 제목의 시사토크쇼였습니다. 제주에 대해 알 만큼 다 알았겠지 하는 건방을 산산조각 내주는 동시에 출연진과 스태프들의 환상적인 티키타카로 잊지 못할 시간을 선사해 준 방송이었습니다. 설마 혼자만 이렇듯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넥타이로 목둘레를 단단히 감은 상태에서, 정색하고 찬, 반 주장을 정리하며 중재했던 토론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향이 그렇다는 배부른 변명도 있었지만 어차피 속에 들어차 있는 고갱이를 맘 놓고 내뱉을 수 없는 토론 방송의 쓸모에 회의를 느낀 것도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어쩔 수없이 뻔한 제작환경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겠지요. 양측의 발언에 시간을 비슷하게 배분하도록 유도해야 하고, 흥분의 도가 높아진다 싶으면 UFC의 심판처럼 중간에서 제지를 해야 합니다. 답답해 미치겠는 MC는 자기주장을 맘껏 터뜨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큰일입니다. 방송의 공정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오해의 손가락질과 더불어 중징계는 덤입니다.
<우영팟>은 달랐습니다. 성숙된 사회 분위기와 언론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 것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겠지만 한없이 강조하고 싶을 땐 시간 충분히 소진하면서 열변을 토해도, 패널들의 의견을 듣고 참았던 말을 MC가 쏟아내도 다 좋았습니다. 패널 간 배분이 지나치게 불균형하거나 의견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물론 '편집'이라는 막강한 사후 안전장치가 기능을 발휘해야 했지만, 출연진의 의지에 큰 흠집이 잡히지 않을 정도의 편집이었기에 모두에게 설득 가능한 과정이었습니다.
매주 주제를 받아보면 제목의 무겁기는 제주판 100분 토론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거기에 개발 이슈와 갈등 요소들이 수없이 고개를 들고 일어섰던 제주였으니 방송을 준비하는 시간 역시 경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강정 해군기지 관함식', '제2공항 갈등', '비자림로 개발', '제주 4.3의 해결' 등 다룰 수밖에 없는 납덩이는 끊임없이 굴러 내렸습니다만 어떤 숙제가 던져져도 성심을 다해 프로그램에 헌신했던 패널들의 변론은 그 자체만으로도 환하게 빛났습니다. 정확한 시간 배분과 제지가 필요 없었던 것이 오히려 한 사람의 주장을 마침표가 찍히는 그 순간까지 침착하게 들을 수 있게 했습니다. 반론이 있으면 차분히, 또박또박, 지저분한 방해공작을 걱정하지 않고 나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비슷한 형식의 캐주얼 토론 프로그램이 여기저기서 흥행을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포커스를 좁혀 제주만을 위한 신심을 다한 고민으로 모두가 집중했었던 날들이었습니다.
3명으로 출발한 패널은 든든한 형님이 중반에 합류해 4명이 되었고, 총선으로 인한 이유 등으로 <우영팟>은 시즌2로 이어져 새로운 패널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영팟>과 함께 하며, 다시금 운명적으로 던져진 진행자라는 본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능력 있고 성공적인 진행자란 누구인가 같은 고민은, 화면으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진행자를 지켜보며 시청자들이 판단할 몫이겠으니 정의를 내리느라 고심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단지 아직도 헷갈리는 것은 앞뒤가 다르고 양면성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진행자의 본질입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모든 수단 중에 '말'이 가장 무능하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끌어안을 수 있으며 곁에 두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을 '사랑해'라는, 세상 누구나 쓰는 말 한마디로 넉넉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그 대상을 향해 투시되는 진실한 '눈빛'에 훨씬 충실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저 멀리 장쾌하게 시야에 들어온 알프스의 만년설을 바라보는 여행자는 표정만으로 충분합니다. "끝내준다"는 말 한마디는 되레 순간의 감동을 파괴하기까지 하니까요.
방송의 진행자는 안타깝게도 이렇듯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표현 수단인 '말'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양면성 중 첫 번째 얼굴은 이와 관련이 있겠습니다.
경험이 쌓여가는 MC와 아나운서는 추구해야 할 덕목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후배들은 점점 늘어나고, 어쩌다 신입 아나운서 채용과정에서 마주치는 젊은 도전자들을 보면 기가 죽을 때가 많습니다. 전문적이고도 집중적인 훈련을 이겨 낸 지원자가 태반이라 한국어 문법엔 도사들이 되어 있고 딕션도 훌륭해 당장 방송에 투입돼도 무리가 없을 정도니까요. 그렇다고 신입이 갖지 못한 경험과 농익은 입담을 내세우려니 예능을 휘어잡고 있는 전문 방송인들을 따라갈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젊음도, 화려한 입담도 가지지 못했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바로 '듣는 능력'입니다. 경외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명 진행자들을 보면 듣기의 중요성은 더욱 확실해집니다.
괜한 말이 아닙니다. 물론 듣고만 있어선 안됩니다, 직업이 그러니까요. 가슴을 열고 진심으로 듣되, 적절한 반응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분명한 진행자의 능력입니다. 시청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진행자들은 대화의 분량이 많지 않아도 적절한 대답과 반응, 때로는 촌철살인의 짧은 문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뭉근히 드러내곤 합니다.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는 듯한 이 경지는 도달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부럽지만 흉내를 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TV나 라디오에서 진행자가 "애청자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가끔 보고 듣습니다. 라디오는 그야말로 듣기만 하는 것이니 그렇다 쳐도 TV를 보는 열렬한 시청자에게도 '애시청자', 혹은 '애시자' 하지 않고 '애청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왜일까요?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애시청자'라고 해야 될 일이겠습니다만,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TV를 쳐다보고 있다 해도 결국 대화의 내용을 '듣는' 행위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청각 장애인들에게는 수어 통역의 분주한 손놀림이나 친절한 자막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애청자로서의 듣는 행위가 되겠지요. 눈을 감고 방송을 듣기만 해 보면 멘트의 빈도가 잦은 진행자보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 재치 있는 문장으로 반응하거나 답하는 진행자의 능력은 더욱 돋보입니다. 톡 쏘는 듯한 설득만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가슴을 열어놓고 진심으로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어디 흔할 리 있을까요. 친절한 대중의 상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진행자의 숙명이라면, 그들이 추구해야 할 궁극의 덕목은 바로 '청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본질에 내재한 양면성 중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어떻게든 멋지고 세련되거나, 투박하면서도 재치 있는 말을 쏟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 벌이를 하는 집단으로서 아나운서와 MC는, 때로는 그야말로 '원맨쇼'를 해야만 하는 자리도 있기 때문이지요. 지나치게 과묵해 인터뷰를 끌어내기 곤란한 대상에게도 일단 참을성 있게 들어보자는 덕목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의견이 분분한 장르는 음악 청취를 주목적으로 하는 FM 라디오일 것입니다. 진행자의 스탠스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심지어 자질 논란이 불거지기도 합니다. 방송을 업으로 하고 있는 저 때문인지, 제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끔 방송이 화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구 만날 때 일 얘기하는 거 아니라는데 녀석들은 눈치도 참 없습니다. 몇 번을 듣고만 있다가 결국 톡 쏘아붙이고 화제를 돌려버립니다. 알고 보면 친구들 하나하나 귀한 청취자인데 건방을 떤 것도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난 말이야 FM 듣는데 진행자가 자꾸 중간에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기막힌 음악을 듣고 나서 꼭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음악 들으려고 주파수 맞춘 건데... 난 그냥 음악만 계속 흘러나왔으면 좋겠어."
그런 말 많이 들어봤다는 투로 저는 카운터를 날립니다.
"음악만 들을 거면 음원을 다운받아서 그냥 틀어놔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
표정은 평온하지만 가시 돋친 반격입니다. 받아쳐 놓고 시간이 갈수록 미안해지는,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후회되는 반격 말입니다. 이내 차분하고도 친절하게 생각을 풀어놓습니다.
"나도 곡이 끝나기도 전에 무심히 툭 치고 들어와서 신경 거슬리게 하는 진행자는 딱 질색이야. 그런데 말이야, 클래식이나 국악 FM 진행자는 곡에 맞는 해설도 해야 하고, 눈에 보이는 것처럼 곡들을 엮어서 스토리를 만들 필요가 있지 않겠어? 조금 길게 느껴지더라도 조곤조곤한 멘트는 있어야 할 거 같거든. 가요 진행자들은 또 어때, 추억의 가요 틀어주면서 공감이 가는 수다를 떨지 않으면 오히려 아무 노래나 내보낸다는 느낌이 들 거 같은데? 진행자의 매력이 필요 없으면 시리나 아리, 알렉사가 진행하라고 하지 뭐. <컬투쇼> 같은 예능FM이야 당연히 멘트의 비중이 대부분이겠지만, 평범한 가요나 팝 FM도 진행자의 재치 있는 멘트가 중간중간에 참견해야 매력이 살아나는 거 아니겠냐?"
장르에 따라서는 이렇듯 구수하고 때로는 화려한 진행자의 멘트 분량이 확보돼야 책임 있는 방송이 될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의 진행을 배제하고 오롯이 음악만 24시간 깔리는 채널이 있다면 그것 역시 대환영입니다, 확실한 목적이 있는 채널이니까요. 오로지 음악을 통한 치유가 목적인 분들에겐 그 이상 멋진 방송은 없겠지요. 다만 진행자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논하는 FM방송의 기능에 대해 말하자면, 전 여전히 매력적인 '멘트'가 음악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한편으론 최대한 '듣는' 덕목에 집중해 적절하고 장황하지 않은 반응을 보여야 하고, 장르에 따라서는 수다쟁이까지는 아니어도 프로페셔널하고도 일방적인 말하기의 달인이 되어야 합니다. 참 아이러니한 노릇이죠. 이렇듯 쉽지 않은 직종임을 자꾸 강조하는 까닭은, 누구나 부러워할 경지에 올라가 보지 못한 제 자신을 변호하려는 마음이 굴뚝같아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알 것도 같습니다. 누군가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진심으로 들어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상대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적절하고도 감동적인 대답 역시 멋지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러니해 보이는 진행자의 양면성은 결국엔 접으면 곱게 겹쳐질 대칭의 무늬와도 같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단은 겹쳐질 대칭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게 먼저입니다. 오늘도 무늬 하나씩을 새겨 놓아야겠습니다.
카페 '제대 가는 길' 진입로와 입구
자갈이 깔린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판석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세심하게 관리된 정원을 지나면 아늑함이 극대화될 듯한 포근한 공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대 가는 길'은 카페의 이름입니다. 앞에서 보였던 <우영팟> 시즌1의 녹화장소였습니다. 모든 병역의무자들이 설레었을 '제대(除隊)'는 아니고 제주대학교의 줄임말인 '제대(濟大)'입니다. 전국에서 <벚꽃엔딩> 노래의 배경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한 벚꽃 감상의 성지 제주대학로에서 길 안쪽으로 들어서 있는 공간입니다. 이곳 외에도 녹화가 진행된 멋진 카페가 또 있었고 시즌2에서는 또 다른 분위기의 카페를 무대로 빌리기도 헸지만, 가장 많은 회차의 녹화를 진행한 곳이라 기억에 특별히 남아있는 장소입니다.
실내에서 진행되는 대담 프로그램을 보면 물이나 음료수가 무대 세트의 일부로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그야말로 시각적 효과로만 기능할 때가 많습니다. 출연자가 갑자기 목이 메일 경우엔 즉각적인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녹화나 생방송이 끝나도 수면이 방송 시작할 때와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영팟>의 녹화 장소는 제대로 된 커피가 놓이는 카페입니다. 보통 3시간이 넘어가는 전체 녹화 중 테이프를 교체하기 위해 한 번의 쉼이 주어지는데, 이때가 커피 리필의 기회입니다. 진행자와 패널들 모두 한 입으로 바쁘게 떠들기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커피도 즐겼던 것입니다. 무언가 내용물이 남아있는 잔이란 없습니다. 다량으로 섭취하면 유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페인의 위력이란 대단했습니다. 방송이란 느낌보다는 사적으로 대화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효과라고 할까요. 아마 그래서 생산성 있는 대화들이 오고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방송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점점 의존도가 높아지는 검은 유혹입니다. 대체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녹화하는 짧지 않았던 시간, 카운터 뒤쪽에서 코로나 이전부터 자가격리(?) 당하셨던 마음 좋은 카페지기 부부이십니다. 오랜만에 찾아갔음에도, 아니 오랜만에 찾게 된 이유로 더욱 반가웠고 반가워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포근하게 많은 이야기들 나눌 수 있었습니다. 커피 한 잔 주문해 놓고 몇 시간을 글 쓰느라 버티게 될 것이 죄송해서 못 가고 있는데 조만간 철가면을 덮어쓰고 들이닥칠 생각입니다. 분명 만류하시겠지만 두 잔은 시켜야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정의와 공정의 대부, 마이클 센델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만이다."
굳어버린 뇌를 죽비로 얻어맞는 듯했습니다. 선입견의 무서움을 설파했다고 해도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문장의 충분한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선입견을 깨고 말해보자는 전제를 깔아도, 특정한 주제가 정해진 순간 그 역시 선입견이 이미 놓인 조건이 아닐까 싶었으니까요. 뉴스에서 그렇게 나왔으니까, 다들 그렇다고 이야기하니까, 역사를 되돌아볼 때 그게 답인 것이 분명하니까, 모두가 콘크리트를 부어놓아 탄탄히 굳어버린 기초 위에 둘러앉아 논의를 시작합니다. 과연 이 콘크리트는 제대로 깔린 것일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정작 뜯고 확인해 봐야 할 것은 이 아래에 묻혀 있는데 콘크리트 바닥의 존재를 의심치 않고 머리를 맞댄다 한들, 무슨 원초적 해답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토론을 나누는 방송뿐만이 아닙니다. 나와 내 주위를 감싼 작은 사회들의 집합, 그 위에 겹쳐질 보다 포괄적인 우리 지역과 나라의 현안들, 바닥부터 순순히 인정해야 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삶도 방송도 뿌리 깊어진 선입견은 배제해야 하는 법입니다. 어떤 것도 긍정이나 부정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위의 평가는 던져버린 후 첫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그게 마이클 센델이 말하는 기만에서 벗어나는 길이겠지요.
덜 떨어진 MC와 함께 해 주었던 과거의 모든 스태프들께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시즌 1, 2의 주인공들이었던 패널들께도 존경한다는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칼은 칼집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정의에 대한 자신감으로 두려움에 맞서며 당당한 자기주장을 펼쳤던 모든 분들, 그 주장이 어떤 것이었든 용기 있게 쏟아낸 모든 말들은 관우의 청룡언월도였으며 아더왕의 엑스칼리버였습니다. 다이아몬드보다 날카로웠던 칼날로 인해 당신의 칼집은 얼마나 헤지고 아팠을까요, 약자들 편에 섰던 강인한 내면은 얼마나 큰 외로움으로 상처로 채워져 있을까요.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궁금하셨을 수도 있는데 두 가지를 깜빡할 뻔했습니다.
먼저 프로그램의 타이틀 <우영팟>은 '텃밭'의 제주어입니다. 짙푸른 하늘 아래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제주 우영팟의 송키(푸성귀)들은 얼마나 기특하고 예쁜지 모릅니다. 화려하고 달콤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쓰고 매운맛이 날 수도 있습니다. 고급스러운 음식의 주 재료는 아닐지라도 건강과 영양을 인간에게 끊임없이 선사하는 고맙기 그지없는 생명체들입니다. 그런 생명들이 모여 사는 우영팟은 얼마나 복된 공간일까요. 제작진의 작명 센스에 감탄하는 동시에, 실로 도민들에게 <우영팟>이 우영팟의 역할을 했던 프로그램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이번 글의 제목입니다. 질량은 곧 에너지라는 공식입니다. 특정 질량에 빛의 속도가 더해지면 그 제곱에 비례해 상상하기 힘든 에너지가 폭발한다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이지요.
E = mc²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있게 한, 즉 인류에게 세상과 우주의 이치를 알게 한 축복의 공식이자 맨해튼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게 한 공식으로서 원자폭탄의 지옥을 인류에게 보여 주었던 재앙의 방정식입니다.
이 글의 제목은 E = (MC)²입니다. '방송의 상대성 이론'이라고 어설프게 불러볼까요? 프로그램에서 MC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무려 제곱의 효과로 전체 에너지에 비례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공식에서는 좌변인 E의 역할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MC 역량의 제곱을 해야 따라갈 수 있는 것, 그것은 출연자들의 날것이 드러나는 순수함과 속마음을 드러내는 진실함, 작은 힘이지만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어보려는 당당함이 아닐까요. 살짝궁 내용을 정리하고 냉정한 듯 다음 순서를 진행하지만 이 멋진 패널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감추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에너지는 MC를 세제곱 해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슬레이트를 치겠습니다.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