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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May 27. 2021

20 한 잔만 하고 헤어질까요? -제주맥주 양조장

모든 곳의 어떤 것들







 

 그렇게까지 심각해질 필요가 없었는데,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공간을 찬미하자마자 현실의 무게가 덧대어져 버렸습니다. 음식으로 치자면 국립공원 초입에서 맛볼 수 있는 담백한 산채비빔밥을 내놓고자 했건만 맵고 짜고 달고 쓴 재료들을 욕심껏 버무린 결과 칼로리 폭탄의 괴 코스요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제주의 인상들을 추적하는 마지막 길, 그래서 맥주 한잔 하며 마무리하는 것도 그간의 미련함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는 방법이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술의 원료인 제주의 물이야 청정하기로 소문이 나 있으니 심지어 상쾌한 끝맺음이 아닐까요. 삼다수가 땅 아래 흐르고 있는 제주니 두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한라산 소주의 순수함과 제주막걸리의 중독성은 분명한 제주의 자랑입니다. 맥주 이야기를 하기 전에 막걸리에 관해 팁 하나 드려 볼까요? 우도 땅콩이나 감귤 성분이 첨가된 막걸리가 아닌, 백색 통의 전통 제주막걸리 말입니다. 제주의 식당에서 주문하시거나 마트에서 구매하실 때 주의 깊게 살펴보시면 막걸리의 뚜껑이 흰색과 초록색, 두 종류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흰색의 뚜껑을 보실 확률이 더 많겠지만요. 결론은 단순합니다. 흰색 뚜껑의 막걸리는 원료가 수입쌀, 초록색 뚜껑은 국내산 쌀을 원료로 한다는 것이죠. 제주도민들에게는 상식과도 같습니다만 이 사실을 아는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둔감한 맛 감별력을 갖고 있는 저로서는 그게 그거라는 걸 실토해야 하겠습니다, 둘 다 맛만 좋았으니까요. 그러나 혀 끝을 휘감아도는 알싸한 풍미에 온 신경이 집중 가능한 고품격 주당 앞에서는 뚜껑 선택에 절대 온건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제주막걸리는 무조건 초록색이라는 자존심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은 곧 단단히 구축된 탐라 애주가의 철옹성을 무너뜨리려는 도전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한림읍에 위치한 제주맥주 양조장


 환희의 순간에도 상실의 시간에도 한잔 털어 넣어야 할 소주는 양 극단에 있는 감정을 모두 어루만질 수 있는 저력이 있습니다. 기뻐서 마셔야 하고 슬퍼서 넘겨야 하는 축하와 위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변색된 나무 기둥처럼 진한 삶의 기억들을 몸속으로 흡수시키는 데에는 막걸리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그 역할이 가장 변하게 된 것 역시 막걸리가 아닐까요. 고되고 궁색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한 묘약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소믈리에 못지않은 비장함으로 무장한 '막걸리어'들을 유혹하는, 상찬의 대상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그에 비해 맥주는 일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퇴근 후 동료들과 잔을 부딪히며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뒷담화와 함께 그럼에도 살 만한 우리의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습니다. 그저 그런 보통의 날들이나 이만하면 괜찮은 날들 정도가 맥주를 들이켜기에 어울립니다. 지나치게 아픈 상처를 지닌 채 생맥주 잔을 집어 드는 것은 이상합니다. 적당히, 무탈한 하루의 마무리는 그래서 맥주가 무리 없이 선택되는 것이겠습니다. 잔 속 토네이도의 신비를 머금은 폭탄주는 그렇다면 언제 등장해야 하는 것일까요. 탄생 자체가 섞임에서 비롯되었으니, 보다 격렬한 아픔이나 한껏 중첩된 기쁨 등 종잡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소주와 맥주의 비율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지도 모르겠군요.      


 제주 서쪽 한림읍 금능 농공단지에 양조장이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수없이 마주친 하늘색 캔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배우기보다는 마시기에 전념하고픈 마음이 우선이지만, 제대로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 밀워키에서 밀러(Miller) 맥주공장 투어를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한가로운 관광객의 견학 이상은 아니었기에 학구열에 가득 찬 연구원의 자세로 양조장의 문을 열어젖히고 투어에 합류합니다. 



 보리와 홉, 물과 효모. 맥주 제조에 필요한 네 가지 필수 요소에 대한 설명에 이어 양조장 내부를 제조공정 순으로 돌아봅니다. 알기 쉽게 안내하는 가이드의 역량에 맥주의 정석 기본편 쯤은 떼고 들어온 듯한 참가자들의 해박함으로 투어의 효율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입니다. 특히 발효의 방식으로 인한 맥주의 종류를 구분해 설명할 때면 맥주 애호가들의 눈빛은 그 이상 반짝거릴 수 없습니다.


 맥주를 가장 단순하게 둘로 나누자면 당연히 에일(Ale)과 라거(Lager)로 양분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각각 '상면 발효'와 '하면 발효'라는 발효 방식의 차이로 기억해 두면 될 일입니다만 조금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상면 발효 맥주는 거품과 함께 위로 떠오르는 성질을 갖고 있는 효모를 이용해 만들어지는 맥주로, 비교적 짙은 색에 과일향 등의 풍미가 진한 편입니다. 씁쓸하고 무거운 맛을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고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숙성돼 알코올 도수도 높은 편입니다. 흔히 에일이라고 부르는 맥주를 상면 발효식 맥주라고 이해하면 되겠고, 술의 역사에서 먼저 주인공이 된 방식의 맥주입니다. 맥아를 볶는 기술이 섬세하지 않았던 시절, 검게 태워진 맥주보리로 생산된 것이 짙은 갈색의 포터(Porter)였고, 볶는 방식의 개발로 한층 옅어진 페일 에일(Pale Ale)이 등장했으니 포터는 에일의 원조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식민지 개척 시대 영국에서 인도로 보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IPA(India Pale Ale)와 미국에서 생산된 아메리칸 페일 에일, APA(American Pale Ale)가 표시된 맥주들과 밀맥주인 바이젠(Weizen), 스타우트(Stout), 알려진 상표로는 호가든과 기네스 그리고 대부분의 수제 맥주, 즉 크래프트 비어 업체에서 생산된 맥주가 상면발효의 결과물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하면 발효는 당연히 반대겠지요. 아래로 가라앉는 효모를 이용해 술이 만들어지는 방식입니다. 상면 발효식에 비해 낮은 온도에서 숙성돼 청량감이 더할뿐더러 알코올 함량도 낮아 부담 없이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확연히 밝은 색으로 황금색을 띠고 있습니다. 라거 맥주가 대표적인 하면 발효 방식의 술이라 할 수 있는데요, 에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맥주, 우리나라의 카스와 하이트를 비롯해 칭다오, 버드와이저, 하이네켄, 칼스버그 등 전체 맥주 시장에서 70퍼센트 이상을 하면 발효방식인 라거 맥주가 차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보다 대중적인 맛에 보관이 용이한 장점으로 이렇듯 라거가 급속히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만 다시 무게의 추는 소규모 에일맥주로 조금씩 옮겨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꽃이나 과일 향 등을 개성 있게 첨가하기 쉬워 나만을 위한 맥주를 원하는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라거와 에일이라는 단순한 구분의 하위에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가지가 뻗어나갑니다. 라거만 해도 체코에서 탄생한 필스너를 비롯해 페일 라거, 라이트 라거 등이 있고 에일의 종류로는 벨지안 에일, 프렌치 에일, 윗 비어, 포터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맥주들이 개성을 자랑하며 애주가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맥주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이처럼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맥주들 중 내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르는 과정 자체가 행복입니다. 오죽하면 '세계맥주' 전문점까지 있을까요. 카테고리화 된 특성의 구분은 두근거리는 선택의 기쁨을 한층 배가시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공룡에 열광합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똑같습니다. 수십 년 전이나 지금도 티라노 사우르스는 그 흉포함에도 불구하고 왕좌의 지위는 변함없지요. 그러나 이에 도전하는 수많은 공룡들이 있습니다. 초식공룡임에도 브라키오 사우르스는 그 엄청난 덩치로 팬덤을 형성하고 있고, 트리케라톱스는 단단하고 야무져 보이는 외양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익룡은 또 어떻습니까, 프테라노돈의 위엄 있는 비행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지요. 가장 흔한 분류방식인 육식과 초식으로의 나눔을 비롯해 골반의 생김새에 따라 구분되는 용반목과 조반목, 용반목의 하위분류항목인 용각류와 수각류, 조반류의 항목인 각룡류, 검룡류, 곡룡류, 조각류 등으로의 카테고리화는 복잡할수록 흥미진진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 카테고리 안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공룡을 찾아내고 다른 종류와 비교해 가며 나만의 공룡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곤 합니다. 이처럼 호감을 갖는 주제가 개성에 따라 종류별로 구분되어 있다면 그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충성도는 한껏 높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제주에서 수제 맥주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공정을 다시 거쳐야 하겠습니다만 청정한 지하수가 땅 속에 흐르고 있는 데다 봄을 완성시키는 청보리밭에서 수확해 싹을 내어 만든 맥아는 천상의 맛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지요. 물과 맥아가 마련되어 있으니 홉과 효모만 첨가하면 될 뿐입니다. 많은 양조업체들이 제주로 몰려드는 건 그래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제주의 맥주산업을 위해서라면 아예 제주도가 발 벗고 나서는 건 어떨까요. '제주'의 이름을 달고 나올 수많은 맥주들에 일정 수준의 품질을 유지하도록 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행정의 '간섭'이 아닌 '관리'는 세계적인 브랜드를 키울 수 있는 요건이기도 합니다. 기네스 맥주의 상징인 황금색 하프는 아일랜드의 국가문양이지요, 품질이 뛰어난 맥주를 생산해야 한다는 조건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국가와 양조업체가 손잡고 나아갈 것을 결정한 뒤 기네스는 끝을 모르고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덴마크의 대표 맥주, 칼스버그는 또 어떻습니까, 1904년 왕관 문양의 사용을 허가받으며 왕실의 공식 맥주로 선정된 후 매출은 급상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양조업체가 맥주산업의 본거지로 제주를 선택했다면 청청 이미지에 걸맞은 품질을 갖춰야 하고, 도는 관심을 갖고 확실한 지원사격을 해 주면 될 일이겠습니다. 



 무려 기원전 4000년 수메르인에 의해 걸쭉한 맥주가 발견되었지만 결국 켈트, 게르만족이 발전시킨 양조기술이니 맥주에 관해서만큼은 유럽을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맥주의 양조기술이야 후발주자라 해도 얼마든지 추월할 수도 있을 터라 그리 부럽지 않다고 해도, 맥주를 마시는 '공간'만큼은 눈을 흘기게 될 정도로 탐이 나는 게 사실입니다. 독일의 비어가르텐(Biergarten)은 그야말로 비어가든입니다. 야외에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퇴근길의 독일 국민들을 맞이합니다. 겨울철엔 물론 실내에서만 운영하고, 간판만 비어가르텐일 뿐 야외매장이 없는 곳도 있으나 봄부터 가을까지의 비어가르텐은 단순히 맥주를 마시기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무뚝뚝한 독일 사람들이 수다쟁이로 변신하는 무대이고 국민의 여론이 결정되는 장소인 것입니다. 제일가는 맥주의 도시 뮌헨의 호프브로이하우스 만한 예가 또 있을까요. 국영 양조장이었던 호프브로이하우스는 19세기 초 시민들에게도 개방되면서 뮌헨 시민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모차르트와 레닌도 단골이었다고 하고요, 무엇보다 아돌프 히틀러가 기회가 될 때마다 대중을 상대로 선동을 한 역사적인 비어가르텐입니다. 3천 명에 가까운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규모라고 하니 그 이상 가는 선전전 무대가 또 있었을까요. 연거푸 들이켠 맥주로 알딸딸해진 국민들을 상대로 한 연설이었으니 공격적인 주장의 전달 효과는 한층 높았을 것입니다. 하필 히틀러를 언급하는 바람에 비어가르텐의 인상이 부정적으로 비친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만큼 독일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민심이 형성되는 곳이 비어가르텐이란 소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떠들썩하게 여름밤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독일의 비어가르텐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선 어울리지 않는 공간입니다. 싸늘하고 안개와 비가 잦은 섬나라에선 축구경기가 중계되는 어두침침한 펍이 제격입니다. 제임스 왓슨이 DNA의 나선형 구조의 비밀을 찾았다며 처음 환호했던 장소도 펍이었고,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대문호들이 작품을 집필한 곳도 펍이었습니다. 물론 비어가르텐과 마찬가지로 여론이 형성되는 사회적 공간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왔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모든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삶의 의욕이 샘솟습니다. 그곳이 비어가르텐이고 펍인 것입니다.      



 굳이 많은 돈을 들여 빛나는 외관을 갖추어놓지 않아도 좋습니다 제주의 넘실대는 청보리를 멀리서나마 조망할 수 있으면서도 중산간 전통의 초가를 기본으로 한 제주만의 비어가든, 제주만의 펍이 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노을이 짙어지는 저녁 무렵, 돌담으로 둘러진 입구 너머의 마당에선 한 손엔 제주보리로 만든 청정 맥주를 들고 전통 윷놀이인 넉동배기에 푹 빠져있는 어르신들이 보이고요, 안으로 들어가니 서울에서 온 듯한 관광객들이 감귤껍질을 넣어 제조한 만다린에일을 마시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하나 둘 생긴 제주만의 맥줏집 사장님들은 한데 모여, 아예 전통적이자 세계적인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맥주 품질의 균일화를 약속한 뒤 제주의 공동체 정신을 담은 이 멋진 공간의 이름을 지어봅니다. '지꺼진(기쁜) 마당'이 좋다. 아니다, '청보리 드르(들판)'가 낫다는 의견이 팽팽합니다. 새로운 제주의 맥줏집 이름은 아무래도 한 차례 모임을 더 가진 뒤에야 결정될 것 같습니다. 좀 늦어지면 어떻습니까, 이젠 '펍'에 갈 필요도 '비어가든'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제주어로 불리게 될 퇴근길 쉼터가 생긴다는 소식에 직장인의 마음은 두근거리기까지 합니다.



 제주맥주의 견학을 마치고 서귀포시의 한 수제 맥주 전문점으로 향합니다. 라거와 에일 중 오늘은 에일을 집중적으로 탐하는 날이 되었군요. 수제 맥주를 뜻하는 '크래프트(Craft) 비어'의 제조공정을 돌아보며 제주맥주의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었으나 이대로 생산량이 계속 증가한다면 크래프트라는 단어를 더 이상 쓸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조바심도 듭니다. 판매량을 늘려 인지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갈지, 인기와 상관없이 제한된 수량만을 유지해 영원히 수제 맥주로 남을지는 전적으로 업체의 결정인 것이겠지요. 아무쪼록 제주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명품 맥주를 만들어 주시기만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출근길 환승역을 바쁘게 걸어가는 수많은 인파 중 하나가 되기 싫었습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마천루의 한 복판에서 마주오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걷기 싫었습니다. 대도시의 부속품, 군중 속 일부가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유독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저 견디지 못할 뿐입니다. 물론 도시라는 공간이 각자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공간 속의 내가 중요할 따름이겠지요. 넓은 가슴의 소유자에게 공간의 크기와 밀집도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뿌리 굳건한 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도시의 수호자들이 위대해 보이는 것입니다. 거칠게 단련되지 못해 도심 한복판에서 관계의 잔뿌리를 뻗어낼 능력이 없는 제 자신이 한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제주라는 고마운 섬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왔지만 오히려 실례가 된 부분은 없었는지 걱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이 땅에 서린 기운을 제대로 느끼고 이해했는지, 삭힌 맛을 내지 못하고 겉절이로만 상을 차린 것은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언제였는지요, 아는 것이 코끝에 걸리지 않고 내부에서 안정되기를 바란다는 박완서 님의 문장에 심장을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얕고 허약해 단단하고 깊은 뿌리내림을 간절히 원하는 가련한 인간에게 그 이상의 잠언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눈이 시린 청보리밭을 전경으로, 더 이상 고울 수 없는 바다의 노을을 배경으로 제주만의 맥줏집이 들어선다면, 첫 잔을 들고 소원부터 빌 생각입니다. 


 제주의 모든 기억과 기운이 나의 내부에 온전히 들어와 나 자신과 하나가 되기를.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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