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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Feb 15. 2021

43 전통을 걸으니 젊음이 되었다 -전주 한옥마을

모든 곳의 어떤 것들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성당을 찾게 되면 멀리서 파사드를 바라볼 때부터 흥분이 고조됩니다. 유서 깊은 사찰을 오르는 길에서는 일주문의 등장과 함께 마음가짐마저 달라집니다. 너무 성스러운 공간들인가요? 제주의 한적한 마을을 탐방할 때면 마을길에서 각각의 집으로 발걸음을 인도해 주는 올레에 접어드는 순간, 미묘한 안정감이 공기에 뒤섞입니다. 하물며 민속촌 입구에 서 있는 장승들은 쳐다보기만 해도 푸근함이 느껴집니다.

 특정한 장소와 경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 앞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감정의 변화를 감지하게 됩니다. 국도를 따라가다 만난 작은 도시들은 풍경의 연속이 자연스럽게 이끈 모습으로 첫 대면이 이뤄지기 때문에 낯선 곳이라 해도 정감이 가기 마련이지요. 논밭과 전원의 풍경이 이어지다가, 건물의 수가 차츰 늘어나고 오가는 차량들과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곳부터가 새롭게 접하게 되는 마을인 것입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 엔진만큼의 중요성을 지닌 오늘날엔 고속도로가 마치 동네의 도로처럼 친근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먼 곳 어디를 입력해도 최단시간의 경로가 번개처럼 빠르게 안내되고, 꼬불꼬불한 국도나 지방도보다는 그야말로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최적의 루트를 택할 것을 운전자들은 알게 모르게 강요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치를 감상할 여유와 고속도로의 긴장감을 맞바꾼 대가로 우리는 목적지에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지만, 여정의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톨게이트에서 하이패스로 요금이 빠져나간 후 얼마 동안 뿐입니다.


 톨게이트에 꼭 가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래서 퍽이나 흔치 않은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름난 성당의 파사드나 사찰의 일주문을 영접할 때의 설렘, 바로 그런 느낌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도시 속으로 체험의 촉각을 들여놓기 전, 모든 신경의 초점은 이 도시의 톨게이트 현판에 쏠려 있었습니다.   


 전주 진입 톨게이트와 현판


 전통과 한옥의 도시답게 멋스러운 톨게이트가 방문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세만큼이나 따뜻한 의미를 품고 있는 현판의 글씨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이 군더더기 없는 매력의 글씨는 존경스러운 한글 서예의 대가, 효봉(曉峰) 여태명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진안 출신의 문자 예술가로 한글의 조형미를 특유의 필체로 아름답게 표현하면서 모든 획마다 의미를 담는 것으로 알려진 대가이시죠. 톨게이트 현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여태명 선생님의 다른 작품들을 먼저 둘러볼까요?




 네, 이 모두가 여태명 선생님의 글씨입니다. 2018년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기념식수 표지석의 '평화와 번영을 심다'의 글씨와 양 정상의 이름과 날짜 등에는'민체'와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서체'가 각각 쓰였다고 하고요, 모두가 익숙한 KBS의 1박2일과 YTN의 돌발영상의 천진하게까지 보이는 글씨체는 여태명 선생님이 직접 개발한 '효봉 개똥이체'라고 합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소박한 글씨체의 이름이지요. 꼭 소주의 이름이 아니었어도 좋았을 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의 필체가 떠오릅니다. 두 분의 주된 글씨체는 장엄과 절도를 강조하면서 범접하기 힘들게 만드는 형태가 아닌, 강인함을 뽐내야 할 직선이 커브를 그리며 무게를 내려놓은 듯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획이 굴절되는 부분의 각도를 달리 처리해서 대중적이면서도 산뜻한 분위기까지 자아내고 있으니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매력을 가지게 된 것이겠지요.


  전주 톨게이트를 통과하면서 부스 안의 요금을 받는 직원 분에게 카드를 내밀며 물어봅니다.


 "기 갓길에 잠깐 세우고 현판 사진 좀 찍고 가도 되겠죠?"


 현판의 유명세 탓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않겠나 싶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예? 현판 사진요?...  네, 뭐 그러세요."


 의아하다는 듯 절 한번 더 쳐다보시고는 카드를 돌려주십니다. 톨게이트 주변의 도로 폭이 워낙 넓어 안전할 것임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려, 톨게이트 기준 양쪽 방향의 현판을 감상하는 동시에 사진을 찍어댑니다.

 위의 사진은 다른 지역에서 전주로 들어올 때 보이는 현판의 모습입니다. 현판의 바탕과 색의 대비를 이루며'전주' 두 글자가 깔끔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번엔 반대편, 그러니까 전주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본 현판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눈에 힘을 주고 잠시만 쳐다보면 다른 글씨의 모양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주로 들어오는 쪽 현판에 새겨진 '전주'는 두 개의 자음 'ㅈ'이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반면에 전주에서 나가는 쪽의 글씨는 자음이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태명 선생님의 솜씨이니까요.

 전주로 들어올 때 자음보다 모음이 강조되는 것은 고향을 찾아 내려오는 자식의 입장이라고 합니다. 타향에서 앞만 보고 달리며 살아가다 한없이 소홀해져 버린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고향이 지척인 톨게이트 앞에서야 크고 진하게 확장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강조된 모음(母音)은 곧 어머니, 혹은 부모님의 존재이겠습니다.

 전주에서 나갈 때의 편액은 그렇다면 눈치채셨을 겁니다. 자음인 'ㅈ'이 아래까지 길게 뻗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다시 거친 세상인 타향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저 무슨 일이든 자식이 잘 되길 바라마지 않는 부모의 입장에서 쓴 글씨인 것이죠. 자음(子音)의 크기는 자식사랑의 크기인 것입니다.

 전주 분들은 다 아실 상식을 굳이 밝힙니다. 우리나라 톨게이트의 수준은 이 정도다! 자부심이 넘쳤던 탓에 상식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글을 사랑하시는 여태명 선생님께는 '톨게이트'라는 단어를 썼다는 사실마저 죄스럽습니다만 '나들목'이란 우리말엔 요금을 '징수'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아 부득이하게 선택한 용어였다고 변명을 해 봅니다.


 몇 차례 찾았던 도시지만 그 유명하다는 한옥마을에 가지 못했던 것이 늘 숙제처럼 남아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상업화된 공간이라며 가보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받아들이기엔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포기할 수 없는 곳들이 너무도 많았으니까요. 한동안 즐길 수 없었던 '걷기'의 열락을 다시 느껴봐야 할 터입니다. 한옥마을 근처로 잡은 숙소에 차를 세워놓은 뒤, 이 동네 다 걸어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걸음을 내딛습니다.



 한옥마을의 초입에 위치한 경기전(慶基殿)입니다. 날이 풀려 전내를 둘러보기에 무리가 없지만 얼마 전 내린 눈이, 올라간 기온에 땅으로 스며들면서 녹아 질퍽거리는 곳이 많습니다. 그래도 안 추운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전주의 주민들에게만 칭송받기에는 경기전의 역사 기여도가 워낙 심대해 무궁화 대훈장 급입니다. 경기전이 없었더라면,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기전을 지켜낸 전주의 군민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역사의 상당 부분이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것도 선사이래 길고 긴 역사 중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의 스토리가 송두리째 사라질 뻔했으니 그간 전주를 와서 경기전을 찾지 못한 것은 분명 책잡힐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좌) 전주사고(史庫)와 (우) 어진(御眞)박물관 내부




 세종 때 춘추관과 충주사고, 전주사고와 성주사고 총 네 곳에 보관했던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주사고 분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실록이 소실되었습니다. 전주에 있던 실록은 전란을 피해 내장산으로 옮겨져 무사하게 됐고, 이후 조정에서 전주사고의 실록을 원본으로 삼아 태백산과 마니산, 오대산 등으로 판본을 확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경기전 내 어진박물관에서 모사본으로 볼 수 있는 조선 태조의 어진 역시 실록과 더불어 내장산으로 옮겨져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전주라는 도시에 어찌 감사해하지 않을 수 있을는지요.

 궁(宮)과 전(殿) 특유의 미세한 자갈이 깔린 흙길은 신발 안쪽의 발바닥에 기분 좋은 압력과 긴장감을 전해줍니다. 절대 빨리 걸어선 안될 전내를 둘러보면 화려한 한복으로 커플룩을 자랑하는 선남선녀들이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호젓한 분위기와, 넓진 않지만 촬영 명소가 된 대숲길이 싱그러운 젊음을 꾸준히 끌어들이고 있군요. 역사의 지킴이 역할과 함께 낭만적인 공간도 제공해 주는 경기전입니다.


 한옥마을길로 나와 오목대 방면으로 잘 정비된 길을 걷고 있는데 전북의 확진자 발생을 알리는 문자메시지와 회사 동료가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알람이 연이어 뜹니다. 답신을 보내니 곧 상대방이 읽었다는 표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요즘 스마트폰이 말썽입니다. 인터넷 접속뿐 아니라 건물의 내, 외부를 가리지 않고 통화 송, 수신마저도 원활치 않아 짜증이 날 정도니까요. 서비스센터에 맡기라는 소리를 수없이 듣고도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새로 나온 스마트폰의 가격이 좀 더 떨어질 때까지 버텨본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얼 바꾸는 것을 지독하게도 귀찮아하는 성격 탓에, 필요한 연락을 받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그냥 들고 다닌다는 편이 맞다고 해야겠습니다. 얼리 어댑터는 부지런해야 획득할 수 있는 호칭입니다. 저에겐 세상의 저쪽 끝에 있을 법한, 가상의 인간상에 다름 아닙니다.

 스마트폰의 고장이나 이상 외에 통신이 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장소 자체에 있을 것입니다. 이젠 국토 구석구석 통신의 전파가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지만 아직도 고립된 산속 깊은 곳에선 통화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을 테고요, 해외에 나가게 되면 고립무원의 자연 속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접속이나 통화에 장애를 겪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나라보다 통신의 속도가 빠른 나라는 찾기 힘드니까요. 만약 이런 '장소'의 이유로 스마트폰이 제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면 별로 불쾌한 일이 아닙니다. 통화가 잘 되지 않아도, 여행할 곳의 인터넷 검색이 원활치 않더라도, 오히려 낯설고 외진 이국적인 공간에 내가 존재한다는 쾌감이 불편을 압도합니다. 그러니 문제 있는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언젠가 이동이 자유로워져 다시 마주하게 될 낯선 곳의 느림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너끈히 감수할 수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인터넷도 통화도 불편하기 그지없는 어딘가에 떨어질 그 날이 간절하게 기다려지는군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장거리 여행을 앞두고는 챙길 약들이 있습니다. 렌즈를 오랜 시간 착용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여행지의 체류니 혹시 모를 눈 다래끼 약도 필요하고요, 급격한 기온 변화일 때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동반되는 비염을 가라앉히는 약도 준비해 놓습니다. 두통이나 치통을 대비한 진통제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늘 짐의 총량만 조금씩 늘렸을 뿐, 챙겨간 그대로 다시 가져오게 됩니다. 돌이켜 보니 이방인이 되어서는 단 한 번도 몸에 탈이 났던 적이 없더군요. 체질이 그러한 것인가, 역마살을 거꾸로 이용하면 오히려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한옥마을에서는 평소 탈이 많은 스마트폰이 조화를 부립니다. SNS의 송, 수신은 물론이고 인터넷 검색도 거침이 없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것에 감사해하는 미덕을 체감하면서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한 마디 건넵니다.   


" 너도 날 닮는구나. 싸돌아 다니면 건강해지는 거 보니까."


 이 녀석과 저는 그렇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목대


 

 경기전에서 시작해 한옥마을길을 쭉 걸어가면 점차 오르막길로 이어집니다. 정면으로 넓은 차도가 교차하면서 오르막이 절정에 달할 때쯤 오른편에 언덕 위로 향하는 계단이 보입니다. 오동나무가 주변에 많았다고 해 정상에 있는 유적엔 오목대(梧木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지요. 봄철이면 만발하는 꽃들로 한옥마을을 내려다보는 정취가 보통이 아니라고 합니다만, 한겨울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정경은 꽤나 먹먹한 감정을 전해주는 듯합니다.


 오목대는 고려 우왕 때 훗날 조선 태조가 되는 이성계가 황산벌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잠시 들러 전주의 종친들과 함께 승전 축하연을 열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시조(始祖) 이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穆祖) 때까지 살아온 곳이니 축하의 잔치를 열어야 마땅한 장소라고 믿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는 이곳에서 발밑으로 펼쳐진 전주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한나라의 유방이 읊었던 대풍가를 호탕하게 불렀다고 합니다. 유방이 천하를 토벌하고 고향인 패현으로 돌아와 승리감에 도취되어 불렀던 노래가 대풍가였으니, 유방 못지않은 이성계의 야심이 그대로 담긴 노래였던 것입니다. 이를 듣고 이성계의 야심을 눈치챈 정몽주는 축하연에서 빠져나와 만경대의 바윗길을 오르며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는 시를 썼다고 하지요. 그의 우국시(憂國詩)는 지금도 전주 남고산성 만경대 정상 부근의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방원과 정몽주가 하여가와 단심가를 주고받은 것도 이성계와 정몽주가 바로 이곳 전주에서 송도로 돌아간 직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대풍가와 우국시에 이은 하여가와 단심가, 왕조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인간의 야심과 충절이 엇갈린 시대의 티키타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한고조 유방이 돌아와 대풍가를 불렀던 고향이 지금의 장쑤성인 '패'현 '풍'읍이라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전주에는 풍(豊)이나 패(沛)가 들어간 지명이 유독 많이 보입니다. 보물로 지정된 풍패지관이 그렇고 풍남문,패서문이 그렇습니다. 심지어 초코파이로 유명한 빵집의 이름도 '풍'년입니다. 이래저래 유방과 이성계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고장, 전주입니다.


 10년도 훌쩍 넘은 일입니다만 그날의 당황스러움은 지금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가까운 형님이 자신의 각별한 친구라며 서울에서 오신 또 다른 형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말씀도 청산유수인 데다 흥까지 겸비하셔서 어렵지 않게 각별한 동생이 될 수 있었지요. 그날도 이 형님은 회사 앞 식당으로 오시겠다며 얼굴을 보자고 하셨습니다. 정오뉴스가 끝나고 일식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음식 주문도 잊어버린 채 한바탕 수다를 늘어놓았습니다. 다다미가 깔린 좌식이니 한쪽 무릎은 올리고 두 팔은 몸 뒤쪽 바닥을 지탱하며 지극히 편한 자세로 벌써 물어봤어야 했을 질문을 뒤늦게 던집니다.


 "상협이 형, 그런데 이번엔 왜 내려오셨어요?"

 

 "응? 아, 별 건 아니고. 만나서 격려 좀 해드릴 분들이 있어서 온 거야. 안 그래도 내가 그분들 여기로 오시라고 했거든, 잠깐이면 되니까 만나면 인사나 드려."


 "예? 아, 예..."    


 잠시 후 미닫이 문이 열리더니 등 뒤로 예닐곱 명 되는 어르신들이 들어오셨습니다. 족히 모두 일흔은 넘어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요. 더 경악할 만한 일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좁은 방 안 일렬횡대로 늘어선 어르신들은 저와 마주 보고 있는 형을 향해 큰 절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하, 인사 올리겠사옵니다."


  '이.... 무슨....'


 몇 초간의 황당함 후에 어르신들의 큰 절을 앉아있는 등으로 받아선 안 되겠다는 직감이 불현듯 떠올라 황급히 어르신들 틈에 끼여 형님에게 큰 절을 올립니다. 이것도 순발력이 좋았다고 평해야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엎드린 상태에서도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마주 보고 껄껄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던 형님께 갑자기 큰 절을 올리고 있는 나라니... 상황을 다시 그려보면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은 절을 끝낸 후 무릎을 꿇고 앉아계셨고, 물론 저도 그랬어야 했습니다만, 상협이 형님은 입을 열었습니다.


 "자, 편히들 앉으시고요. 제주지원에서 의미 있는 사업들을 잘 펼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수고가 많으신 듯해 감사한 마음 전할 겸 뵙자고 했습니다. 직접 뵈니 든든합니다."


 잊었습니다, 형은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총재였다는 것을. 설명드리기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만, 조선 및 대한제국의 문화재와 황실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설립한 법인의 대표, 즉 조선의 왕조가 존속되었다면 '왕'으로 추대되었을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이죠. 상협이 형은 고종 황제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 9남의 손자이니, 쉽게 말해 고종의 증손자였습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둘째 아들인 이구 황세손이 일본에서 사망한 뒤 종약원으로부터 그 뒤를 이을 후계자로 지목이 된 것이었습니다. 영조의 휘는 이금(李衿), 정조는 이산(李祘)이듯, 상협이 형은 '이원(李源)'이란 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한 케이블 방송에서 프로듀서로 활동을 하다 한국으로 귀국해 홍보회사, 방송사를 거쳐 홈쇼핑 회사의 방송본부장으로 근무하던 중 대동종약원의 부름을 받고 하루아침에 운명이 달라졌으니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었던 것이죠. '조선', '황실'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동반될 수도 있는 '고루하다'는 부정적인 인상은 상협이 형에게선 일절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문화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듣고 있노라면, 황사손이라는 권위를 누리려는 의지가 아닌 황실의 문화를 자산으로 K-culture의 틈새 부분을 공략해 보자는 비즈니스 사업가의 면모가 한층 부각되었으니까요. 그저 엉뚱한 상상으로, 입헌군주제로 운영되는 국가체제에서 살고 있다면 이 형님은 어떤 군주가 되어있을지 그려보게 되기도 합니다.


   대한제국 황사손 이원 그리고 상협이 형님


 후삼국 통합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는 전국의 유력한 지방세력들에게 본관과 성씨를 부여했습니다. 해당 영역의 통치권을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는데요, 뿔뿔이 흩어져 있던 지역민들이 부계 중심 '본관제'의 시행으로 같은 성을 구성하며 타 본관과 성씨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각각 분투를 해 온 것이 고려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본관'이란 부계 시조의 거주지나 근거지였던 곳을 뜻하므로 곧 '장소'의 의미였던 것이죠. 김해나 전주, 안동이나 밀양 등 조상들이 어디서 활동했는지가 나의 정체성이 되었고, 그 공간에 대한 소속감으로 인해 폐쇄적이기보다는 개방적으로 외연을 넓혀 세를 확산시켜 온 것입니다. 구별과 차별의 요소로 기능하기도 했던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 속 '본관'에는 장소나 공간이 인간에 미치는 의미 역시 담겨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가문과 본관이라는 이야기만 나와도 몸이 움츠러드는 게 사실입니다. 옛날 사람 취급받을 것이 가장 두려울 인생의 단계이기도 하고요, 세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듯한 오해를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길을 걷다 어디 무슨 성씨의 <종친회 사무실>이라고 걸려 있는 목재 현판만 봐도 곰팡이 냄새가 나는 듯한 착후(錯嗅)효과를 저부터 느끼곤 하니까요. 그러나 어차피 구시대로 돌아갈 걱정이 없는 21세기의 오늘에서는 상협이 형님의 주장처럼 간직하고 이어갈 가치가 있는 구시대의 문화가 있다면 그것들을 십분 활용해서 우리의 경쟁력으로 삼아버리면 될 일입니다. 세계의 왕실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글로벌 축제가 만들어질지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그 전통을 온전히 지켜내 온 이곳 전주가 그 축제의 무대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합니다.


 일제에 의해 맥이 잘린 오목대와 목조의 출생지 이목대 사이에는 이제 넓은 차도가 놓여있고 그 사이를 구름다리가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이목대 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자만 벽화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데 제법 다리가 아파옵니다. 걷기 좋은 한옥마을 일대라 더 신이 나서 쉼 없이 걸었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뒤에서 한 아주머니가 절 급히 불러 세우십니다.


 "학생! 돈 떨어졌어."


 전 돈을 흘리지 않았으니 다른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지폐인 듯했습니다.  


 "아. 제 돈이 아닌데요.."


 떨어진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쉼 없는 도보의 피로가 씻은 듯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둘러맨 가방, 그리고 감사하게도 얼굴의 절대면적을 은폐시켜 준 마스크, 두 가지 아이템 덕분이었습니다. 학생이라뇨.

 두 다리엔 다시 에너지가 공급됐고 마스크 속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주운 돈의 처리를 두고 아주머니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결국 모금하는 곳이 보이면 기부를 하는 것으로 결론짓고 5천 원권 한 장과 천 원권 한 장을 제 지갑에 집어넣었습니다.


 다시 채워진 기운으로 자만 벽화마을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넙니다. 한결 상쾌해진 기분 덕에, 주운 6천 원에 4천 원을 더해서 기부함에 넣으리라 마음먹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너끈할 '학생'이 되었으니 그 정도는 보태야 마땅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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