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설쳤습니다. 그것도 좀 심한 편이었던가요. 새벽 2시에 눈이 뜨여 온갖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머리와 가슴속을 수없이 왕복하는 것 같았습니다. 잠이 부족해 겪는 피로함이라기보다는 온몸을 얻어맞은 듯 파김치가 된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뉴스는 엉망이었고 오후엔 괜히 후배에게 희끄무레한 눈빛을 쏘며 짜증을 내고 말았습니다.
전날 저녁에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았습니다. 그저 오래된 한 편의 영화일 뿐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인물들과 대사들, 익숙한 공간과 기억의 버무림으로 더 채워 넣을 심장이 없었습니다. 실제와 무던히도 이어지는 무수한 끈들의 집합,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를 파편들이 각자 비명을 지르면서 숙면으로 가는 철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는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괜히 보았습니다.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명백한 차별을 받은 뒤의 귀향은 이해하기 쉽다고 말합니다. 반면 아무 차별도 당한 적 없이 즐겁게 청춘을 보낸 많은 젊음들이 세월이 지나 결국 돌아오게 되는 귀향은 곧 '타자성' 혹은 '타자화'의 그늘을 상실시키지 못한 결말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귀향(歸鄕)'의 향(鄕)은 고향이겠지요. 특정한 지역에서 태어나 어느 정도 성장만 거쳤다면 이후의 거처에 상관없이 처음 그곳이 곧 고향일 겁니다.
때로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는 잦은 이동으로 고향의 정체성이 불분명한 사람들도 있고,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 지리적 고향이 있음에도 스스로를 일체화시킬 수 있는 별개의 공간을 일컬어 '제2의 고향'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전에도 그리 되어 있더군요, 고향이란 태어나 자라난 곳 혹은 늘 마음으로 그리워하거나 정답게 느끼는 곳이라고 말이죠. 여러분의 진정한 고향은 어디신지요. 그곳이 꼭 하나뿐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KBS강릉방송국
주말근무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라디오 뉴스를 끝내고 바깥공기를 쐬러 사진에서 보이는 정문 너머 기둥 네 개가 떠받치고 있는 현관으로 나왔습니다.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소심한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 바로 앞에 자그마한 몸집의 누군가가 서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녀 역시 종이컵을 입에 대고 차분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스태프 여러 명과 함께 있는 모습만 보았을 뿐인데 지금 바로, 여기서, 혼자, 믹스커피 한 잔으로 고요한 쉼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다음 슛을 위한 귀하디 귀한 충전시간을 방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 발 뒤로 물러서 일부러 거리를 더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즉각 사무실로 후퇴해 버리면 괜히 민망하기도 할 것 같고 불편한 느낌을 줄 것도 같았으니까요. 대신 조심스럽게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커피를 홀짝입니다. 그런데 이게 커피인지, 맹물인지, 소주인지 분간이 가질 않습니다. 용기를 내서 옆얼굴을 쳐다봅니다. 셔츠에 면바지 차림이 수수합니다. 그저 같이 일하는 동료라 해도 어색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영화배우 이영애 씨였습니다.
방송국 왼쪽 약한 경사로를 올라가면 영화에서 상우(유지태扮)가 은수(이영애扮)와의 재회를 기다리며 서 있었던 구멍가게가 나옵니다. 건물은 변함이 없는데 이제는 굳게 문이 닫혀있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빨간 우체통이 사라진 것이 못내 서운했습니다. 이곳에서 은수가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상우는 목격하게 되지요. 정도와 강도는 천지차이겠지만 은수의 부재와 우체통의 부재는 같은 부류의 감정에 속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목격이란 단어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냥 바라봄'이 아닌 '격발'의 충격이 가득합니다. 바라보는 그 순간 방아쇠를 때리는 충격이 가해지는 것이 목격입니다. 산뜻한 자극이 없을지라도 그저 평상시처럼 순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유명인 팔이가 도를 지나친 것 같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느껴지니까요. 하는 수 없습니다. 뒤집힌 장갑 속 두툼한 털실들 마냥 잠복한 공간을 떠올리면 그 공간과 달라붙어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인물들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먼 과거의 연이 현재까지 이어졌던지, 일을 통해 연을 만들었던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간 바람 같은 편린 속 인연이 되었던지, 한 인간의 영혼 속에 들어와 잊을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준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려 태조 때 지은 83칸의 임영관은 객사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전주에 이어 또 객사의 등장이군요. 중창, 중수를 거쳐 지금은 '삼문(三門)'이라고 불리는 임영관의 정문만 남아있는데요, 고려시대 건물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국내 다섯 채 중 한 채라고 합니다. 무려 국보로까지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니 강릉에서의 출근길은 '역사를 걷는 발길'이었을 텐데 예전엔 큰 의미를 새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판석이 깔려 걷기 좋은 길이 되었지만 한때는 아스팔트 도로일 뿐이었습니다. 유지태 씨가 구멍가게를 가는 씬을 위해 갤로퍼 차량을 타고 이 길을 오르락내리락했던 것이 생생하군요.
방송국 주변을 둘러본 뒤 시내를 걷습니다. 다행히도 방향감각은 남아있었습니다. 교동 쪽의 신시가지 일대로 개발이 집중됐던 까닭일까요, 커다란 건물이 들어선 것도 보이지만 기억을 전복시킬 만한 급격한 변화는 없어 보이는 것이 꽤나 흐뭇합니다. 눈에 익은 장소가 나타나면 그 시절을 함께 한 인연들이 옆에서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즐겁기만 했고, 어떤 것이든 자신이 있었던 우리였습니다. 뻔해서 슬픈 표현일지라도 순식간에 지금의 위치로 와 버렸군요. 가끔은 뒤도 돌아보면서 다들 잔잔히 살아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작정을 하고 산책을 하다 보면 낯선 이들의 행복한 모습과도 마주칩니다. 흐뭇하지요, 그래서 사람 구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동반자가 있는 걸음과는 달리 혼자 걷는 길에는 모든 것들이 또렷해집니다. 사물과 나무의 형태도 의미를 담고 시야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마주치는 행인들의 걸음걸이만으로도 그가 발산하고 있는 감정을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거리낌 없이 얼굴을 드러내 놓았던 지난날에 비해 이런 류의 초능력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야 함을 실감합니다. 모두의 얼굴이 마스크로 반 이상 차단된 이 기막힌 현실에선 눈웃음이 확실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얼굴로 감정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기에 오직 몸짓과 걸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럴 리 없을 거라 믿어보려 해도, 앞으로도 마스크를 계속 써야 하는 상황 역시 그려보게 됩니다. 곧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하는 희망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모두는 마스크를 얼굴의 일부로 인식할 듯합니다. 무표정은 당연한 인간의 인상이 되겠지요. 옛 연인을 꼭 닮은 사람을 마주쳐 심쿵함을 경험하는 일도, 어디선가 봤음직한 사람인데 누굴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순간들도, 시장에서 마주친 푸근한 인상의 어르신에게서 느껴졌던 넉넉함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 묻혀버릴 것입니다. 오직 드러내 놓은 눈들만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 모두가 비슷한 '호모 사피엔스'의 한 개체로서만 기능할 것 같습니다. 언제인지 모를 미래에 인류가 몰개성의 안드로이드화(化) 하는 세상이 온다면 그 기원이 코로나19 때 마스크 쓰기였다고 하지는 않을지, 쓸데없는 섬찟함이 소름으로 전해집니다.
오버를 하면서 앞날 비관을 했으니 마스크의 유용성도 반대편 저울에 올려놓아야겠습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언뜻만 대면해도 감정을 들키기 쉬운 분들에게 마스크는 훌륭한 방어막이 되어 줍니다. 편한 자리보다는 흥정을 하는 자리나 계약을 하는 자리, 아니면 서로의 주장이 맞다고 설전을 벌이는 현장에서는 표정을 쉽게 읽히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 될 소지가 있는데 마스크는 이를 훌륭히 차단해 주는 것이죠. 또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타인과의 일대일 대화에 자신이 떨어지는 분들에게는 마스크가 두려움을 걸러주는 기능을 훌륭히 수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참 전부터 비염 증상이 나타날 때 마스크를 쓰곤 했는데요, 콧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아 버리고 마스크만 쓰면 한결 편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코를 자주 훔치지 않아도 될뿐더러 남들도 다 쓰고 있는 게 마스크니 몸이 안 좋아 고생하고 있다는 티도 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쏠쏠한 장점들입니까. 곧 벗어버릴 수 있을 마스크, 반드시 써야만 할 시기라면 장점만 최대한으로 누리시면서 착용하고 다니시면 될 일이겠습니다.
O.S.T. 속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를 들으며 남쪽으로, 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갑니다. 한적한 정동진에 내려 바다와 평행선을 이루고 있는 철길에 또 하나의 평행선을 그리며 걸어봅니다. 언제나 찾는 사람 없는 공간과는 사뭇 다른 장소입니다. 인적이 없어도 슬프지 않은 공간은 텅 빈 그 자체가 '없음'입니다, 애초부터 적막한 공간이었으니까요. 정동진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를 반복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고요함은 '없음'이 아닌 '부재(不在)'일 따름입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이자 언젠가 무엇으로든 채워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역동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은 지금 정동진인가요?
정동진 바닷가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7번 국도는 부산에서 무려 함경북도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동쪽 끝 커다란 줄기입니다. 통일이 된다면 러시아, 중국을 거쳐 유럽까지 내달릴 수 있는 인터콘티넨털 익스프레스의 극동 출발점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강릉에서 동해와 삼척은 그저 길이 놓인 방향을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경로이기 때문에 내비게이션을 잠시 끄고 항구와 해수욕장을 끼고도는 샛길로 빠집니다. 내비게이션을 끄지 않으면 경로를 어긋났다는 가시 돋친 음성을 반복해 들어야 하기 때문에 동해안의 호젓함을 오롯이 누리는데 여간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매력적인 헌화로는 운치가 그득합니다. 파도가 거센 날이 많아 달리는 바닷물이 차를 덮치는 일이 흔한 곳인데 오늘은 오랜만에 온 객을 환대해 주는 것일까요, 잔잔한 수면이 동해 특유의 해안 풍경과 담백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강릉시 강동면 헌화로
강원도의 바다는 제주의 바다와 딴판입니다. 바다뿐일까요, 지형 자체가 다릅니다. 생성된 원인부터가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상처 받은 나그네의 심장은 따뜻한 엄마의 가슴과 같은 제주의 오름에 숨고 비현실적으로 이국적인 제주 바다에 담기는 순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자신의 품 속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비극에도 아랑곳 않고, 제주라는 땅은 아픈 영혼들에게 눈물이 나올 정도로 섬세한 안식을 선사합니다. 장쾌한 강원의 산과 바다는 아버지와도 같습니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듯하다가도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감격을 전합니다. 억센 풍경과 검푸른 바다의 출렁임은 나그네의 상처를 대놓고 공격합니다. 아파야 할 때를 놓치지 말고 실컷 아파야 온전한 회복도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일까요. 흘릴 눈물이 몸 안에 있다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도록 철저히 사무쳐 파고들어오는 것이 강원도라는 땅입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경으로 등장한 곳 중 하나는 은수의 아파트입니다.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되어버린 은수의 바로 그 대사, "라면 먹을래요?" - 라면 먹고 '갈래요?'가 아닙니다 - 가 탄생한 공간이지요. 다시 내비게이션을 켜고 길을 재촉합니다. 은수의 집은 강릉이 아닌 동해시 묵호동의 언덕에 위치해 탁월한 전망을 자랑하는 조용한 아파트 단지였습니다.
사랑이 시작될 땐 대화 한 구절, 단어 하나가 꼭꼭 눌러쓴 글씨처럼 터질 듯한 의미로 가득합니다. 상대가 전한 단어에 숨겨진 뜻이 무언지 순간순간 파악하기 바쁘고, 변화무쌍하게 오르내리는 질문과 대답에서 그와 그녀의 심리를 포착하기 위한 단서를 찾으려 집중력은 최대치로 높아집니다.
사랑의 기쁨을 묘사하기에 이만한 생활공간이 없습니다. 상우의 집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자체가 이미 낭만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술에 취한 상우는 택시기사인 친구를 설득해 한달음에 강릉으로 내달립니다. 동이 트는 이른 시각임에도 은수는 아파트 밖까지 나와 상우를 기다립니다. 장거리 연애 중인 커플은 얼싸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은수는 심지어 상우에게 말합니다.
"술 취하니까 멋있다."
맞습니다. 그 지경이 돼야 사랑하는 겁니다.
<봄날은 간다> 은수의 집 앞, "라면 먹을래요"의 현장입니다.
은수와 상우가 소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강원도 곳곳의 풍경에서는 사랑과 이별의 '분위기'가 깔려 있습니다. 이곳 은수의 아파트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의 점증과 쇠락이 고스란히 행동과 대화로 발가벗듯 드러나 버립니다. 우리가 나눴던 속삭임들과 둘 중 내가 더 사랑한다는 자신감, 억누르다 결국 쏟아내 버린 상대에 대한 서운함, 마음이 멀어진 것을 눈치채고도 자신을 속이며 나누는 처절한 대화, 마침내 우리 둘 중 누군가는 꺼내야 했던 가슴 미어지는 이별의 선고까지... 은수와 상우는 곧 지난날의 우리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그들의 감정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은수의 아파트는 그래서 절대 분리되지 못할 영화 속 공간인 것입니다.
상우가 택시에서 내려 은수를 만나 포옹한 현장입니다. 당시엔 없던 건물도 들어섰지만 바다가 보이는 그 길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있을 리 만무한 동해시의 한 거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역사의 현장을 알현하는 것과도 같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공간에 대한 의미부여는 그래서 매력적이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심리 기능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종종 소개되는 다방면의 덕후들을 보고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남 얘기만은 아닌 것인지요. 강원도, 그리고 <봄날은 간다>에 한정하자면 저 역시 준(準) 덕후 정도로는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성지를 찾아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전설의 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의 현장입니다. 동과 동 사잇길의 끝은 뻥 뚫린 바다 조망입니다. 탁 트인 동해의 풍경처럼 사랑도 속시원히 나아가야 하는데 또 이렇듯 난국을 만나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라면을 먹고 가자는 감각적인 청유의 공간과는 불과 십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상우와 은수가 멀어지는 과정은 이와 비슷한 이별을 겪지 않았을 사람이라도 지극히 현실적이라 느낄 법한 일상 속 각각의 에피소드로 드러납니다. 상우의 무너지는 마음은 영화의 마무리까지 이어질뿐더러 친절하게까지 묘사됩니다. 할머니의 어깨에 기대 울어버리기도 하고 은수의 새 차에 흠집을 내기도 하면서, 사랑의 부재는 상우의 몸을 빌려 여러 유아적 행동으로 튀어나와 스스로의 빈 곳을 채우려 합니다. '나는 사랑을 잃었소'하는 아우라를 보란 듯이 뿜어내며 괴로운 모습으로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 오직 스스로 아플 뿐, 오직 스스로 힘들 뿐임을 뼈저리게 겪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속 은수는 자칫 사랑을 가지고 장난치는 캐릭터로 오해받을 소지가 많습니다. 라면 먹자는 말도, 지쳤다는 표현과 헤어지자는 통고도, 다시 사랑을 이어보자는 제안도 모두 그녀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던 게 사실이니까요. 그녀의 입장이 되어보고 싶었습니다. 은수는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감정의 흐름에만 충실했던 연애계의 빌런이었던 걸까요? 이미 사랑의 실패를 경험했던 은수는 두 번 다시 사회적 결속으로까지 이어지는 연애를 좇으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터미널에서의 첫 만남처럼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시크함은 스스로에게 장막을 둘러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 이별의 과정에서 겪었을 관계의 덧없음이 감정의 긴장을 풀어놓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그 무엇이라도 무의미로 둔갑시킬 각오가 되어 있었던 듯합니다. 돌이 되고자 한 사람은 서서히 흐르는 물에 떠밀려가는 법일까요, 강해지리라 마음먹은 심장은 순수함에 굴복하고 맙니다. 사랑의 절대성을 믿고 있는 소년의 순수함은 은수의 장벽을 녹여냅니다. 서툰 사랑은 일상과 무미건조함을 이겨내고 승리의 라면을 쟁취합니다.
은수의 변심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언제까지고 응답해 줄 수 없는 상우의 순수함이 도를 넘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속된 사랑의 굴곡을 롤러코스터처럼 겪고 난 은수에겐, 꼬마 바이킹 한 번 탄 적 없는 상우의 손을 잡고 또다시 출발점에 선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거라 상상해 봅니다. 버스에서 내려 헤어지자고 말하는 은수의 마음은 그래서 보기와는 달리 갈기갈기 찢어져 있지 않았을까요. 상우가 느껴야 할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이미 알고 있을 은수이기에, 이별의 통보는 절대 만만한 과업이 아니었을 겁니다.
방송의 게스트인 선글라스 맨과의 연애가 그리 오래가지 않았을 거란 예상은 그래서 오히려 쉽습니다. 초보자와 롤러코스터를 타는 일도 불안한 일이지만 능숙한 상대와 만나 지긋지긋한 커브와 반전을 거듭하는 것은 너무도 지겹고 역겨운 일일 테니까 말이죠.
삼척 맹방해수욕장
합이 현란합니다. 무술 고수들의 경연과도 같습니다. 이 세상은 '넌 뚫는 기술이 있지, 난 막는 기술이 있어'라는 자신감을 반복하며 사랑의 우위를 겨루는 전장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달콤한 단어의 현실도 이렇듯 승패로 가늠되는 각축전의 한 과정일 뿐인지요.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상처 받았던 모든 아픔과, 진심만으로는 이루어내지 못해 겪은 좌절은 동해의 숨 막히는 야성 정도는 되어야 도포될 수 있습니다. 상처 위로 바르는 빨간약의 쓰라림이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졸음방지 껌의 플라보노이드가 눈 코 입을 거쳐 뇌 속까지 거침없이 관통하는 느낌입니다. 치유해 줄 바엔 꾸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꾸짖음의 효과는 상당합니다. 언젠가 사랑에 성숙해질 상우에게는 맹방 바다에서 담은 거친 파도소리가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일갈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동해의 힘은 그렇습니다.
맹방해수욕장에서 지근거리에는 영화 속 가장 낭만적인 소리가 채집된 공간들이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잎들의 소리, 그리고 눈과 함께 겨울밤 허공을 가르는 풍경소리는 삼척 신흥사(新興寺)와 부근의 자연이 만들어낸 천상의 속삭임입니다. 바다와 멀지 않은 태백산맥의 아랫목에 사찰은 놓여 있습니다. 누각을 통과하면 설선당(設禪堂)과 심검당(尋劍堂)을 좌우에 둔 대웅전이 보입니다. 이 정도로 아름다운 사찰일 줄은 몰랐습니다. 눈부신 하늘빛의 조화 덕분이기도 하지만 작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주는 아취가 한껏 차오릅니다. 기분 좋게 부는 춥지 않은 겨울바람은 풍경(風磬)을 성대 삼아 낯선 이를 위한 환영가를 불러주고 있었습니다.
신흥사 대웅전(좌), 대웅전에서 바라본 경내(우)
상우와 은수의 영화 속 모습을 그려보기도 전에 발걸음은 흔들리는 풍경 아래로 홀리듯 이끌립니다. 처마의 양 끝에 매달린 풍경이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두 풍경의 소리가 동시에 들리지 않습니다. 왼쪽 풍경이 울리면
오른쪽 풍경은 미동도 하지 않고, 오른쪽이 소리를 내면 왼쪽 풍경은 묵묵부답입니다. 섞이지 않는 순도 100퍼센트의 개성을 각자 들려줄 참인지요. 예민한 귀는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쪽의 풍경은 테너의 음성과 같고 오른쪽의 풍경소리는 소프라노의 그것과 같습니다.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판단을 위해서 10분 이상을 대웅전 앞에 서 있어보지만 느낌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갑니다. 이런 꿈같은 풍경소리는 들어본 적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우와 은수는 이 소리를 간직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강원도의 산과 하늘, 멀지 않은 곳에서 전해지는 바다의 기운과 함께 신흥사의 풍경(風景)과 풍경(風磬)은 분리할 수 없는 일체가 되어 나그네의 숨 속으로 파고듭니다.
대웅전의 처마와 풍경
풍경이 매달린 위치보다 바깥으로 뻗어 덧대어 있는 서까래를 부연(附椽)이라고 한다지요. 홑처마의 구조보다 처마를 허공으로 더 내밀게 되니 건물 아래쪽의 목재가 비와 습기로 인해 썩어가는 것을 방지해 줍니다. 건축물 전체의 내구성 강화에 반드시 필요한 부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상우와 상우 같은 우리는 튼튼하고 오래가는 것들을 위해 본능적으로 부연을 덧대는 것을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비바람의 기미가 보이면 행여 흠뻑 젖어버릴까 처마를 길게 빼는데 집중합니다. 더 안전하고 더 굳건한 사랑의 건물을 짓고 있을 뿐인데 무엇하러 그렇게까지 꼼꼼할 필요가 있냐는 핀잔을 듣고, 정석만이 답이 아니라는 충고를 듣곤 합니다.
은수와 은수 같은 우리는 이미 곰팡이가 슬어가는 기둥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삭아가는 내 모습도 나의 일부니 굳이 가릴 필요도 없으니까요. 부연을 덧댄다 해도 사랑은 영원해지지 않습니다. 뻔한 공식을 적용하느니 눈앞의 사랑에만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랑의 농도도 변화할 뿐이라는 건데 왜 노력을 이어가지 않느냐는 원망을 듣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는 꾸지람을 듣곤 합니다.
심장의 풍경 너머로 덧댄 부연은 누구에게는 견고한 사랑의 보호막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그야말로 사랑의 부연(敷衍) 일뿐입니다.
"여기선 아나운서가 피디 일도 하고 그래요."
지역 방송국의 현실을 정확히 전달한 은수의 대사입니다, 허진호 감독님의 꼼꼼함이 돋보이는 대목이지요.
다시 강릉의 방송국 사무실 안으로 돌아옵니다.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고, 상우 - 정확히 말하면 상우 할머니 -의 민간요법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은수의 모습입니다. 관계의 힘은 끈질깁니다. 그 관계가 한때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다면 서로의 흔적은 삶 여기저기에 매복해 있다가 무심결에 튀어나와 버립니다. 불법주차 딱지처럼 단단히 들러붙어 있어 떼어내기란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사무실 은수의 등 뒤로 보이는 곳이 저의 자리였습니다. 이 장면을 찍을 때 은수의 책상 위에 아나운서 관련 책들이 너무 없다고 해서 제 책상에 있던 책 대여섯 권을 옮겨 두고 카메라의 사각지대로 빠졌더랬습니다. 도대체 무슨 장면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 대사도 없이 한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씬이라니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모든 것이 연결되었습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의 의미를 규정하고, 사소해 보였던 하나하나의 부분들은 놓칠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는 작은 전체였습니다.
'영화 제작에 도움 주신 분들' 스크롤에 절대 포함되지 못할 극미한 도움이었어도 현장에 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왜 정문에서 커피를 마시던 은수에게 수고하신다는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을까요.
아직도 창창한 앞날입니다. 다음 기회를 노리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글모음이 결실을 맺을 때쯤이면 제주를 떠나 다시 사진 속 자리에 앉아있을 것 같습니다. 한때 노후된 청사의 신축 계획이 있었지만 무산된 바 있는데요,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고생하시는 직원분들께는 이기적이고도 죄송하기 그지없는 발언이겠으나 강릉국 청사는 지금 이대로 그 자리에 있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했던 젊음의 기억을 품고 있는 공간을 잃는다는 것이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아서 그렇고, 아무리 쾌적한 새 건물로 옮기게 된다 한들, 낯선 공간 속에서 상실감만 갖게 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피식하고 쓴웃음이 나오는군요. 고루해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스스로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허진호 감독님이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으로 꼽았던 순간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던, 즉흥적으로 택시를 타고 은수를 찾아온 장면이지요. 기가 막힌 명연기라던지 영원히 회자될 명대사가 나와서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밤공기가 그렇게 부드러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강행군을 하고 있는 모든 스태프들을 깊숙이 위로할 만큼 넉넉하고 운치 있던 그날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공기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컷을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상우와 은수는 더 이상 가공의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카메라 감독님들은 밤공기만큼 달콤한 두 사람의 결합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시선을 렌즈에 담았을 뿐이고, 오디오 감독님들은 그리움과 설렘이 담긴 숨소리 하나조차 놓치지 않고 우리를 대신해 귀를 쫑긋 세웠을 뿐입니다. 상우는 그저 은수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었을 뿐이고, 은수는 택시에서 내리는 상우가 미치도록 그리웠을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그들뿐이었습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날 그 공간에서는.
광장이나 결혼식장에서, 혹은 장례식장이나 경기장처럼 다수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또한 세상 그 누구와도 겹치지 않을 자신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간직한 공간들도 존재합니다. 성장기의 튼살처럼 가슴속에 남은 수많은 흔적들은 결국 특별한 방법으로 버무려진 공간들의 기억이 아닐까요. 특정한 공간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사람을 기억하고 관계를 되짚으며, 추억을 회상하고 사랑과 이별을 다시 현실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며 기뻐하고 상대의 심상 속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살아갈 많은 날들, 어떤 공간과 감성을 연결시키게 될지 두근거리게 되기도 합니다.
한없이 벅차오르는 감동도,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 법한 지독한 슬픔도 밋밋하게 다림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억 속 파노라마로 지나가는 공간들과 그 공간에 담긴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간직하려 합니다.
모든 곳의 소중한 어떤 것들이 잘 감추어져 있는 한 봄날은 떠나가지 않습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대는 포근한 봄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