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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어머니의 도시락

사랑을 담아 주셨던 어머니의 도시락

by 자화상

1983년 무렵이다. 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었고 3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군인이셨다. 경기도 동두천 은근의 군부대에서 근무하셨고 우리 가족은 부대 인근 마을의 장교용 관사(官舍)에 살았다. 관사에 사는 군인 가족, 특히 장교의 가족들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 대접(?)을 받는 편이었다. 마을과 학교의 대부분 행사나 농번기의 농사일 등에 군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러 가게나 음식점 등의 주요 고객이 군인들이라서 더더욱 그 마을에서는 군인 가족들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학교 친구들도 우리를 친절히 대해주어서 나름 재미있게 생활했었다.


그런데, 6학년 1학기 말 즈음, 아버지께 서울의 육군본부로 부임 발령이 나셨다. 주로 전방 지역에서 대대장으로 군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곧 서울로 전근을 가게 되신 것이다. 문제는 내가 중학교를 서울에서 배정받아야 하는데 그 당시 중학교 입학제도로는 서울의 중학교에 배정받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서울의 경우, 학교 수에 비하여 너무나 많았던 학생 수 때문에 지방에서 오는 학생들의 전학을 제한하는 제도가 있었다. 지방 학생보다는 서울지역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학생들을 우선하여 진학시키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요컨대, 서울의 중학교에 배정받기 위해서는 6학년 2학기에 서울의 초등학교에 재학해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발령은 겨울이 되어야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아버지를 제외한 나와 동생,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서울로 먼저 이사를 해야 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 또는 기러기(?)가족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군용 관사에서만 살아서 소유한 집도 없었다. 게다가 군인 월급으로 서울의 비싼 집값을 감당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우리는 일단 서울 북부의 ‘정릉동’에 있는 조그만 단칸방에 자리를 잡았다. 후에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경이 되었던 동네이다. 영화를 보았을 때 너무나 반가웠다. 정릉동은 ‘서울 속의 시골’이라 여겨질 만큼 도무지 도심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집의 가격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많이 싼 편이어서 서민들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어머니께서 어떻게 이곳을 아셨는지 우리 가족은 이사를 왔고, 주말이면 아버지가 계시는 동두천에 가서 머물다가 월요일 새벽에 서울로 돌아왔다. 흩어진 가족의 애환은 눈물이 나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서로를 그리워하며 화장실도 없는 재래식 주택에서 추운 손을 비비며 지내야 했다.

당시는 학교에서 급식이 이루어지기 훨씬 이전이다. 우리나라에서 학생을 자식으로 둔 어머니들의 고민은 자식들의 도시락을 싸는 일이었다. 아이가 여러 명이면 여러 개의 도시락을 싸야 했다. 그런데 매일 도시락 반찬을 준비하는 일은 보통 고달픈 일이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없는 살림으로 반찬을 매일매일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지금처럼 가공된 반찬을 그냥 사기만 하면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재료를 직접 구매하시고 그것으로 일일이 반찬을 만들어야 하셨다.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도 스트레스였다. 점심시간이 되어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을 때면 몇몇이 함께 둘러앉는다. 그 상태에서 각자의 도시락과 반찬 뚜껑을 열게 되는데 이때마다 반찬이 공개된다. 그 당시 최악의 반찬은 김치였다. 지금은 오히려 김치가 가장 비싸고 인기 있는 반찬이지만, 그 당시는 김치가 가장 인기 없는 반찬이었다. ‘김치하고 밥만 먹는다’는 말의 뜻은 먹을만한 반찬이 없이 밥을 먹는다는 관용어로 쓰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인기 있는 좋은 반찬은 소시지 부침. 기름을 두르고 소금을 뿌린 김. 계란말이. 햄 등이었다. 그런 반찬을 가져온 학생은 그야말로 득의양양(得意揚揚)했다. 친구들에게도 반찬을 나눠주며 잘난 체까지 해댔다. 소심한 성격의 나는 김치를 싸간 날이면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친구들한테 핀잔은 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어린 마음과 도시락을 싸주신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치를 반찬으로 싸간 날, 다른 친구가 내 김치를 가져가서 먹으면 기분이 좋았다. 어쩌다 어머니께서 정릉 시장에서 사 오신 건어물조림 같은 반찬이 들어있는 날은 왠지 모르게 하루 종일 기분 좋았다. 다른 아이들이 반찬을 하나씩 들고 가는 통에 많이 먹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일 년 내내 김치 한 가지만 반찬으로 싸 오는 친구도 여럿 있었다. 내 옆자리의 ‘인성’이가 그런 아이였다. 반찬통을 열 때면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나도 격려하는 마음으로 그 친구의 김치를 일부러 먹어준 적도 많았다.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에 교사가 된 지금, 학생들을 데리고 현장학습을 갈 때면 난 일부러 그들의 도시락 음식을 한 번씩 다 먹어준다. “이거 정말 맛있네”라는 말, “어머니께서 정말 음식을 잘하시네”라는 칭찬의 말을 거듭하면서……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인성이의 반찬이 바뀌었다. 그날은 생김치가 아닌 김치찌개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당시 귀했던 돼지고기는 들어가지 않았을 테다. 그냥 걸쭉한, 글자 그대로 김치찌개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그 김치찌개가 맛이 있었다. 그날, 인성이는 우리 반 최고의 인기인이 되었다. 반 학생들이 인성이의, 아니 인성이 어머니의 김치찌개를 먹으려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인성이는 처음으로 점심시간을 기죽지 않고 지냈다. 그 밝은 표정과 들뜬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어느 날 점심시간, 반찬통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김을 싸주셨다. 아무것도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생(生)김이다. 지금은 김에 소금과 참기름을 바른 상태로 팔지만, 당시는 김에 들기름을 직접 바르고 그 위에 소금을 뿌리고 다시 불에 살짝 구워 가위로 먹기 좋게 잘라야 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다. 손이 너무 많이 간다. 어머니께서는 그냥 생(生)김을 자르기만 하시고 김치와 함께 반찬통에 넣어주셨다. 가위로 자르시지도 않으시고 그냥 손으로 찢으신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김칫국물이 옆에 있는 김에 번져서 그나마 있는 생김의 절반 정도가 김칫국물에 붉게 물들어버렸다. 너무 창피했다. 다른 친구들 보기가 너무 싫었다. 반찬 뚜껑을 닫고 화장실에 가서 울었다. 어머니가 싫거나 원망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창피한 상황이 싫었다. 돈이 없는 가난이 싫었다. 그래도 어머니께는 도시락에 대하여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힘들게 사시는 어머니께 걱정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학생은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나처럼 달동네 공립학교를 나온 돈 없고 힘없는 부모를 둔 가난한 학생과 인근의 사립학교를 나온 소수의 부유하고 부모의 배경도 좋은 학생들이었다. 그냥 겉으로만 봐도 바로 표시가 난다. 도시락 반찬도 차원이 다르다. 태어나서 본적도 없는 반찬을 가져와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먹는다. 시험 기간이면 어디서 났는지 전년도 기출문제와 같은 최신 정보를 공유하며 학급의 상위석차들을 독차지한다.

그 아이들이 싫었다. 나처럼 도시락 반찬으로 스트레스도 받지 않을 테고 헌책방을 종일 뒤져서 참고서를 살 필요도 없을 테니까. 여하튼 그 녀석들을 이기고자 악착같이 공부했고 졸업식 때는 그들보다 한참 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했다. 뿌듯했다.

도시락 하나에 어린 시절 애환이 다 녹아있다. 어려운 생활 여건에도 나를 위해 차디찬 부엌에서 힘들게 반찬을 만들어 주셨던 고마우신 내 어머니, 하루하루 도시락 반찬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던 소심한 그때의 나,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님께서 하시는 대로 말없이 따라주었던 내 동생……

지금은 사라진 어머니의 도시락이지만 나에겐 이토록 특별한 의미가 있다. 대학에 입학해서 가장 좋았던 일은 바로 도시락을 싸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도 그 말씀을 자주 하셨다.

“네가 대학에 가니 이제 도시락 안 싸서 좋다.”

그만큼 어머니께서도 힘드신 일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똑같은 밥과 반찬을 주는 요즘의 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은 도시락에 담겨 있는 애환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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