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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백마고지와 영화 「고지전」

살아서, 집에 가자!

by 자화상

경원선(京元線)의 최북단(最北端)인 백마고지역(白馬高地驛), 연천역을 지나 경원선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마지막 역이 백마고지역이다.

백마고지역 인근에는 백마고지 전적비가 있다. 실제 백마고지는 현재 접근을 할 수는 없다. 이곳에서 망원경으로 볼 수만 있다. 전적비임을 알리는 표지판의 문구를 읽자마자 눈시울이 순식간에 뜨거워져 버린다.

“백마고지는 6·25동란 당시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약 30만 발의 포탄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고지의 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다. 격렬했던 전투 끝에 남은 흙먼지와 시체가 뒤섞여 악취가 산을 덮을 정도였고, 서로의 포격에 의해 고지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는데 마치 백마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며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거대한 전적비와 기념관, 대형 태극기가 자리한다.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는 바라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두가 같은 기분일 것이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았다. 백마고지는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대표적인 전적지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열흘 사이에 대한민국 국군 제9보병사단이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을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서북방 395고지(백마고지)에서 격파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양측 합해 24)번이나 바뀌었고 1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국전쟁의 초반은 한반도의 너른 지역을 영토로 갖고자 서로가 밀고 밀리는 국지전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38선 부근에 전선이 형성된 이후로는 거의 2년 동안 조그만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어찌 보면 큰 의미 없이 소중한 목숨만 앗아가는 비극적인 소모전이 되었다. 물론 비극이 아닌 전쟁은 없겠지만.

영화 「고지전」(The Front Line, 2011)은 바로 이때의 전투를 모티브로 하였다. 실제 영화에서도 야트막한 야산을 뛰어오르며 고지의 정상을 빼앗거나 지키려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실감 나게 묘사되고 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중화기를 사용하는 전투가 아니라 적군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며 서로 죽이는 ‘백병전’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을 죽여야만 하는 비극적인 전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죽이는 적군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일은 영화 속, 성식(이다윗 扮)의 이야기처럼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영화 「고지전」은 백마고지 전투를 참고하여 제작되었다. 2004년 개봉되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형제인 두 인물을 축으로 전쟁의 비극과 가족의 소중함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고지전」은 친구지만 상반된 유형의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쟁의 고통을 다루는 이야기이다.

휴전을 10여 시간 남긴 마지막 전투. 남북한의 병사들은 짙은 안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함께 ‘전선야곡(戰線夜曲)’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오래전, 필자의 아버지께서 술 한잔하셨을 때 흥얼거리며 부르셨던 노래라 더 반가우면서도 애절하게 다가왔다.

‘정안수 떠다 놓고 이 아들의 명(命) 비는 어머니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라며 목 놓아 노래 부르는 남북한의 병사들……, 흐느끼는 목소리로 부르는 그들의 노랫가락은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 살아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 애절함. 그리고 부모님과 가족들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을 대변한다. 의미 없는 전쟁의 마지막 끝자락, 이번 전투에서만 죽지 않으면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간절함과 두려움이 화면 밖으로까지 진하게 묻어나는 압도적인 장면이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심지어 아군을 희생시키고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전쟁광(戰爭狂)’의 냉혈함을 가진 수혁(고 수 扮). 그와 반대로 지적이며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전쟁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은표(신하균 扮).

어린 소년병의 죽음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관계는 최고의 긴장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수혁은 인민군의 총탄에 맞아 죽음을 맞는다. 수혁은 은표에게 죽기 직전에 힘없이 말한다.

“그렇게 많이 죽여댔으니까 당연히 지옥에 가야 하는데,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없어서 그냥 여기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계속 서로 죽이면서…… ”

휴전을 목전에 둔 마지막 전투. 안개가 걷히고 이젠 정말 싸워야 하는 시간, 중대장(이제훈 扮)은 자신을 바라보는 중대원들에게 목 놓아 외친다.

“12시간만 버텨라. 살아서, 집에 가자!”

그렇다. 이 젊은 친구들의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살아서 집에 가는 것! 이념의 장벽과 위정자의 그릇된 판단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 발발하였다. 왜 이런 전쟁을 하는지, 왜 같은 민족이 서로 죽여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채 듣기 전에 그들은 나라를 지켜야 했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야 했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수십만 명이다. 비극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몇 년 전 뉴스에서 백마고지에서의 유해 발굴 모습을 보았다. 엎드린 자세로 총을 든 채 적진을 응시하면서 전사(戰死), 60년을 넘게 같은 자세로 묻혀있던 국군의 유해였다. 총구는 그때까지도 북쪽을 계속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쟁은 아직 진행 중이다. 젊은이들이여! 잊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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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전 #백마고지 #소년병 #전적비 #유해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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