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너의 의미
임원이 되니 다른 임원들이나 학급 아이들과도 어울릴 기회가 많아졌다. 물론 여학생들과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여학생들과 학급 일도 의논하고 다른 이야기도 자주 나누었다.
어느 날, 우리 반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여학생들의 수군거리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야! 누가 원(源)이 좋아한대”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의 주인공은 M이라는 여학생이었다. M은 단발머리에 피부가 하얗고 여리여리한 아이였다. 양쪽 볼에는 주근깨가 살짝 피어있었다. 조그마한 눈이 예뻤다. 얌전한 성격에 머리도 영리하여 공부도 곧잘 했다. 차분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 소문을 들은 후부터는 이상하게도 그 아이가 자꾸 나를 쳐다보는 착각이 들었다. 내가 교실 뒤편에서 다른 남학생, 여학생과 함께 재미있게 공기놀이하는 모습을 곁에 와서 부러운 듯 쳐다보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 여학생은 훗날 연천군청에서 일하게 된다. 서른 살 무렵, 동창 찾기 사이트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공부도 곧잘 했으니 군청 공무원이 된 것이었다.
누군가를 혼자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도 행복하지만,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마음에 두고 바라보는 것을 느끼는 일도 좋다. 게다가, 한 번도 여학생들에게 관심받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느낌이 더욱 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내 맘속엔 다른 여학생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 반의 여자 부반장이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당시 전곡 국민학교의 선생님이셨다. 가끔 복도를 지나다가 그 선생님을 뵌 적이 있다. 아이들이 S의 아빠시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아빠가 같은 학교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고 좋아 보였다.
S는 까만 피부를 가졌다. 여리여리한 모습보다는 건강미가 넘쳤다. 달리기도 잘했다. 난 S를 좋아했다. 다른 남학생이 S와 이야기를 나누면 신경이 쓰였다.
어느 날이었다. 우리 반 반장 아이가 나한테 함께 모여서 학급신문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S를 포함한 여학생 둘과 남학생 네 명이 함께 방과후에 남아서 학급신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난 당연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흥미로웠다. 가뜩이나 S와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이런 기회가 있으니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어서 좋았지만, S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가질 수 있어서 더 기대했다.
그렇게 우리는 학급 임원으로서 함께 학급을 이끌었고 그러면서 더 친해졌다. 학급신문을 만드는 일을 마치면 우리는 학교 앞 철길 건널목 옆의 자그만 포장마차 떡볶이집으로 들어가 함께 떡볶이를 먹었다. 그러고는 큰길에서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전곡은 북쪽 지방이라 겨울이면 날씨가 매서울 만치 추웠다. 그렇게 추운 겨울날, 여느 때처럼 학급신문을 만들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큰길가에서 서로 작별 인사를 하려던 차였다. S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원(源)이 추워서 집까지 어떻게 가자? 집이 먼데…”
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녀에게 대답했다.
“괜찮아, 갈 수 있어!”
S의 음성은 나에게는 어떤 누구의 말보다 정겹고 따스하게 들려왔다. 여러 차례 말했지만, 여학생으로부터 나를 걱정해 주는 말을 들은 적이 처음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나 보다. 물론 S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성격이기 때문에 큰 생각 없이 그렇게 인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너무나 좋은 기억이었다.
그녀의 걱정 어린 나지막한 음성은 어떤 누구의 달콤한 말보다도 더 정겹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은 이후 꿈속에 영화 장면처럼 나타나서 초콜릿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내 마음을 어루만지곤 했다.
내면화된 기억은 이렇게 무의식중에 ‘꿈’이라는 다른 형태의 의식작용으로 표현된다. 아마도 그 장면이 가슴 가장 깊은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꾸고 있는 내 얼굴에는 어린 시절의 순수한 미소가 살며시 지어져 있었을 것이다.
S의 생일에 우리는 함께 그녀의 집에 놀러 갔다. 당시에도 친구의 생일에는 자그마한 선물을 정성껏 포장지에 싸서 전해주곤 했었다. 나도 그녀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일주일 전부터 무엇을 살지 고민했다. 마음이 설렜다. 누군가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해 본적도,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생일 선물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들이었다. ‘설렘’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설렘’은 가슴 깊이 들어와 ‘추억’이 되었다.
그녀의 집은 전곡역 사거리 인근이었다. 여학생 방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보았다. 그녀의 방에서 당시에 아이들이 주로 했던 게임을 하며 함께 놀았다. 너무 재미있었다.
어른이 된 이후에 전곡읍에 갈 때면, 그녀의 집 부근을 지나치곤 했다. 전곡역에서 구석기 유적지로 가는 길의 초입(初入) 부근이다. 커다란 배수탑처럼 생긴 건축물이 있어 멀리서도 눈에 들어온다. 그 바로 아래쪽 하얀 시멘트 담장이 있는 집이 바로 S의 집이다. 집 옆의 길을 걸으며 힐끗 집 안을 쳐다보았다. 물론 누가 사는지는 몰랐다. 어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어쩌면 S의 부모님들께서 살고 계실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문을 두드려 볼 용기는 없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책이 1983년에 발간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극장에서 영화로도 개봉되었다. 당시 만화책은 ‘만화 가게’ 에서 볼 수 있었다. 그때의 ‘만화 가게’는 지금의 ‘만화방’과 비슷한 공간이다. 한쪽 벽은 온갖 만화책들로 가득했다. 가운데 공간에는 넓고 긴 소파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만화책을 한꺼번에 여러 권 빌려서 탁자에 쌓아두고 소파에 눕다시피 편하게 앉아서 만화책에 심취했다. 학창 시절, 내가 살았던 정릉동에도 여러 개의 만화 가게가 있었다. 만화책을 빌려서 집으로 가져가는 것도 가능했다.
고등학교 시절, 만화 가게에서 이 <공포의 외인구단> 만화책을 보았다. 야구 선수였던 남자 주인공은 어릴 적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을 잊지 못하고 편지를 계속해서 썼지만, 여학생 부모님 때문에 편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 만났던 여학생에게 남자 주인공은 이런 대사를 했다.
‘네가 곧 나에겐 신(神)이었고, 그 편지가 성전(聖殿)이었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나와 같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당시 유행했던 만화 속 이 대사는 너무나 감명 깊었다. 지금 보면 너무나 오글거리는 대사지만, 당시에 나 혼자 환상에 빠져서 나와 S가 만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었다.
전곡읍을 떠난 후 난 그렇게 혼자서 가끔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녀를 10여 년이 지나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1992년, 대학 4학년 때였다. 친구 J의 입대 소식이 들렸다. 늦은 입대였다. 그런데 그 친구의 자대(自隊)가 바로 연천군에 있는 어느 포병 부대였다.
절친한 친구인지라 당연히 면회 가야 했다. 여름방학 때였다. 전곡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친구의 부대로 가서 면회를 마쳤다. 다시 전곡역에서 서울 방면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왔는데, 문득 전곡읍의 친구들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때마침 친구 녀석은 자기 집에 있었다. 잠시 후, 다른 친구 서너 명이 왔고 그들과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 자리에서 우연히 여학생 S 이야기가 나왔다.
그동안 전곡에 몇 번이나 들렀지만 정말로 S를 만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친구 녀석이 S에게 전화로 연락하였고 드디어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전곡을 떠난 지 정확히 10년째이다. 일기나 편지에서 어떻게 변했는지 항상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고 묘사했던 그녀였다.
그렇게 S를 만났다. 헤어질 때는 5학년의 여자아이였었는데 다시 만날 때는 22살의 성인이었다. 그래도 목소리나 얼굴, 성격은 초등학교 시절 그대로였다.
함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 녀석들은 집으로 가고 나와 그녀만 남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 다시 만난 그 여학생은 변함없이 어여뻤고 우리는 오래전 이야기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 친구와 나는 함께, 나란히 길을 걷게 되었다.
수많은 별이 하늘을 가득 채운 그날 밤, 우리는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지나 한탄강 유원지까지 이르렀다. 한탄강 유원지의 자그마한 나무 벤치에서 함께 한 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다음은 2001년 무렵, 한 동창회지에 기고했던 필자의 글이다. 이 당시의 추억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계속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낯선 집에 들어가 이름을 묻고, 또 혹시 어디로 이사를 가 버린 건 아닌지, 또는 연락처를 알 수 있는지를 계속 묻고 있었다. 난 초등학교 6학년의 어린아이였다. 또 내가 찾는 사람도 어느 초등학생이었다. 그 사람을 찾는 이유조차 모르지만 난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난 왜 그 사람을 찾아야 했을까?
8월의 뜨거움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무덥던 5월의 어느 날, 오늘도 학교 근무에, 대학원 야간수업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시원스레 펼쳐져 있는 한강과 푸르른 신록 향기를 맡으며 귀가하던 날,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난 침대에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꿈속에서 누군가를 계속 찾아 헤매어야 했다.
초등학교 때 정말 많이도 전학을 다녔다. 초등학교 6년 동안 8번 학교를 옮겨 다녀야만 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여러 곳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무덤덤하게 부모님을 따라다닌 것 같다. 한 곳에서 친구들과 좀 친해 질만 하면 난 작별 인사를 해야만 했고, 또 다른 곳에서 적응할 만하면 어김없이 또 이별해야만 했다. 이런 나에게 친구의 소중함과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 준 곳이 있다.
그곳은 경기도 연천군의 한 작은 마을이었다. 난 꿈에서 이때의 친구들을 찾아다닌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에서 6학년 1학기 동안의 약 1년 8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난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친구들과 선생님, 내가 살던 마을, 그곳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전까지 나는 학급에서 그냥 ‘있으나 마나’한 아이였다. 공부를 뛰어나게 해서 선생님의 관심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또 운동을 잘해서 학급 여학생들의 관심과 남학생들의 부러움을 사지도 못했다. 표현 그대로 난 그냥 있는 둥 없는 둥 한 아이였다. 하지만 난 그곳의 학교로 전학 간 후 너무나 달라진 모습이 되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관심을 주게 되었고 선생님께서 나를 대하는 태도도 호의적이었다. 난 정말 학교 가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 오기 싫어서 학교에 남아서 놀기도 하였다. 학교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걸어서 거의 1시간을 넘을 만큼 멀었지만 정말 난 학교에 다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였다.
여학생들과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만큼 내성적이던 내 모습이 나도 모르게 변해갔다. 난 학급에서 임원이 되었고 또 친구들과도 어울려서 학급신문도 만들고 담임선생님의 일도 도와드릴 수 있었다.
정말 25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에도 그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그곳에 갈 때면 지나는 길, 내가 살던 집의 마당, 내가 다니던 문구점과 상점 앞을 지날 때면 드라마에서 보던,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이 지난 일들을 떠올리던 것처럼,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때의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서 지나간다.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너무 아련하여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선택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만큼 난 그때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 난 힘든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그곳을 찾아가곤 한다. 그곳에서 내가 다니던 좁디좁은 도로와 내가 친구들과 함께 노닐던 강가를 바라보고 상념에 젖곤 한다. 난 그럴 때면 힘든 모든 일들을 잊을 수 있었고 그 당시로 돌아가서 그들과 즐겁게 이야기하고 뛰어놀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난 지치고 힘들 때 가끔씩 그런 꿈을 꾸곤 한다. 그렇게 친구들을 찾아 헤매는 꿈을…
그만큼 나에게 그곳의 추억은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이다.
10년 만의 조우(遭遇) 이후, 서울에서 그녀와 두어 번 더 만났다. 하지만 첫 만남의 설렘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소 어색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S의 모습에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색할 뿐이었다. 작가 피천득의 <인연(因緣)>의 유명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어른이 된 후, 나도 S를 세 번 만났었다. 세 번째의 만남 후에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내가 S를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난 S를 오랜 시간 동안 그리워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만난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한 번은 꼭 보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이 지난 후, S가 결혼해서 전곡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S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수는 없었다. 다음은 1989년에 그녀를 그리워하며 일기장에 썼던 편지글이다.
S 에게
S야, 나는 지금 처음으로 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다. 유난히 춥고 긴 듯한 고3의 겨울방학과 88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해가 모두 지나버리고 지금은 온 세상이 생명으로 숨쉴 따스한 봄이 되어 가는구나.
우리가 알게 되고 말을 나눈 지 벌써 8년째로 접어든다. 하지만 우린 6년 동안 얼굴을 본 적도 없었고 물론 한마디의 말을 해본 적도 없었지. 정말 오랜 시간이야. 웬만큼 알게 지냈더라도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야. 하지만 나는 너를 잊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너는 항상 나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두었었지. 한 번씩 꺼내 보면서 말이야.
S야, 너는 지금까지 내 이상형으로 나에게 자리잡혀 있다. 내가 꼭 바라던, 내가 원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이상형의 여인으로 말이야.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젖어본다. 너와의 만남, 대화, 그리고 너와의 추억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5학년 때 어느 날인가 아주 추운 날이었지. 우리가 함께 귀가할 때였어. 모두가 헤어져야 할 네거리에서 네가 나에게 걱정 어린 눈빛으로 해주었던 말. 그것이 가장 가슴에 남아. 어쩌면 네가 무심결에 뱉은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은 나의 가슴 깊이 숨어서 지워지질 않는단다.
S야, 그때 우린 말다툼 한번 한 적이 없었지. 친구는 싸워야 더 친해진다고 하던데 우린 싸우지 않아서 더 친해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우리가 함께 부반장 하던 때 생각나? 너는 여자 부반장, 나는 남자 부반장이었지. 지금도 그때의 일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기억이 나. 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아이들 사이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느니 뭐 그런 말들이야. 참!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얘기지? 하지만 난 고백하고 싶어. 나는 너를 진심으로 좋아했었다고.
화이트데이때 기회만 있으면 너에게 선물하고 싶었어. 내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던 말이야. 나는 너에게 좋아했다는 말을 지금이라도 서슴지 않고 할 자신이 있어. 만약 우리가 만나기만 한다면 말이야.
너의 아버지께서도 초등학교 선생님이시지? 나도 예비 선생님이야.
초등학교 때 너의 집에 놀러 갔을 때가 기억난다. 우리 대여섯 명이 너의 방에서 함께 놀았었지. 여학생 방에 놀러 간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S야 지난번 고등학교 1학년 때 너의 집 쪽으로 지나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내 친구들이 길가에서 너의 방을 쳐다보기도 했었어. 친구들과 나는 식사하는 너를 보고는 용기가 없어서 그냥 돌아오고 말았어. S야, 정말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 네가 나를 정녕 기억해 주고 나를 그때의 나처럼 대해준다면 정말 좋겠어. S, 정말 보고 싶어. 오늘은 너의 꿈을 꾸고 싶어.
S야, 한 번이라도 너와 만나서 우리의 예전 추억을 나누고 싶어. 마주 앉아서 한 잔의 따듯한 차로 마음을 녹이고 싶어. S야, 이젠 펜을 놓아야 할 것 같아. 그럼, 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나의 꿈이 현실로 다가올 것을 기원하며, 그리고 네가 꼭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라며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