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다시 그곳에 간다면

03. 집에 오는 길

by 자화상

어느 가을,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날 무렵, 어머니께서 나를 기다린다는 말씀을 선생님께 들었다. 어머니께서는 우산을 받쳐 드시고 동생과 함께 학교 중앙현관 앞에 계셨다. 모처럼 전곡 읍내의 시장에 나오신 어머니께서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중국 음식점에 가서 자장면을 사 주셨다. 이때 먹은 자장면은 내 평생 어떤 자장면보다 맛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자장면이 아직도 기억난다. 당시 자장면 가격은 400원이었다. 2000년대 초반 어떤 그룹(가수)이 불렀던 노래 <어머님께>에 등장하는 자장면에 대한 가사가 가슴을 저민다. 어머니’와 ‘자장면’을 연결해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기가 막히게 감정을 자극하는 문장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품게 했던 노래였다.

이 식당은 연천군에서는 꽤 유명한 음식점인 ‘M 반점’이다. 전곡역 앞에 있으며 현재는 당시 주인의 며느리께서 이 식당을 경영하고 계신다. 전곡을 갈 때면 항상 그곳에서 식사했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기억나서인지 아직도 음식이 특별히 더 맛있다.


image07.png M 반점 앞 필자



어느 날이었다. 우리 반 친구가 다른 반의 학생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야외 학습장에서 정체 모를 귀신을 본 이야기였다. 어느 학교건 ‘학교 괴담’ 하나쯤은 있을 터이다. 아마 전곡초등학교에는 그 이야기가 ‘학교 괴담’으로 전해 내려올 것이다. 손발이 없고 검은 옷차림과 검은 모자를 쓴 중년의 아저씨가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아저씨의 손이 있던 자리에 지팡이가 둥둥 떠 있고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는데 얼굴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발도 없는데 천천히 걷다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행위를 계속 반복한다고 말했다. 1980년대 초반 전곡초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아마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치열한 전쟁으로 많은 억울한 희생자들이 죽어간 자리가 아니었을까?

비가 오는 날은 정말 학교에 가기가 힘들었다. 장마철이 되면 우리가 놀던 차탄천은 무시무시한 급류로 돌변했다. 그럴 때면 전곡읍으로 향할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다리인 ‘왕림교’는 물에 잠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작은 다리가 물에 잠기면 우리는 전곡읍으로 가는 방법이 없다. 연천읍 방향으로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그런 날, 관사의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가지 못했다.

관사 위편에서 내려 본 차탄천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굉음을 내며 흘렀다. 주변 산의 중턱까지 물이 불었다. 평소 놀던 바위는 흔적도 없이 물에 잠겼다.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나 무서웠다.

이렇게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도 힘들지만,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올 때 비가 많이 내리면 더 힘들다. 당시에는 우산도 거의 없었다. 우리도 우산을 잘 쓰지 않았다. 비가 오면 그냥 맞았다. 우산으로 비를 막을 생각도 별로 없었다. 내리는 비는 응당 맞아야 하는지 알았다. 덕분에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온몸이 모두 젖어 있었다. 가방, 신발, 옷 모두가 하나도 빠짐없이 젖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씻도록 하시고는 따듯한 안방의 아랫목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셨다. 너무나 따듯했다. 아직도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진다.

학교 수업이 모두 마쳤지만 우리는 바로 집에 오지 않았다. 축구부였던 내 옆집 친구의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운동장 뒤편에서 또 다른 친구들과 놀곤 하였다. 사실 집에 오기가 싫었다. 친구들과 더 놀고 싶었다. 아니면 친구를 따라서 전곡시장을 돌아다니거나 친구가 다니는 태권도 도장에 가서 창문 너머로 친구 녀석의 태권도 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친구 누군가의 생일이라도 되면 자그마한 선물을 사서 친구의 집에 가기도 했다.

어둑어둑해져서야 집에 가려고 마음먹었다. 오는 도중에도 계속 놀았다. 그냥 걷지 않았다. 개울이 보이면 물속에 들어가 보았다. 꽃과 풀이 있으면 엮어서 꽃반지를 만들었다. 지나가는 트럭이나 차가 있으면 멀찍이서 쳐다보며 차량 번호판의 숫자를 맞히는 놀이를 했었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집까지 오는 시간이 꽤 걸렸다. 여름은 해가 길어서 괜찮은데 겨울이 문제였다. 5시만 되면 완전히 어두워진다. 시골길에 가로등이 있을 리 없다. 주변에 인가(人家)가 없으니 당연히 불빛은 없다. 암흑이다. 무서웠다. 특히 집 근처에 오면 길가에 커다란 무덤이 몇 개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지나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큰 소리를 지르며 함께 뛰어서 지나갔다. 한참을 지난 후에야 걸었고, 이곳을 무사히(?) 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관사가 나왔다.


image08.png 왕림교가 있던 자리. 비가 오면 저 물길이 넘쳐 왕림교가 잠기곤 했다.


집에 오면 강아지가 반겨주었고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저녁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그렇게 학교에 다녔다.

난 정말 내 집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친구들처럼 전곡읍에서 살면 일요일이건 방학이건 아무 때고 친구들과 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곡읍에 사는 친구들이 너무 부럽기만 했다. 내가 살던 관사에는 우리들 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당연히 친구도 없고 놀거리도 없다. 그게 너무나 아쉬웠다. 텔레비전도 KBS 채널 한 개밖에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일요일 아침이면 만화영화를 보여주는 채널이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그 만화영화를 볼 수 없었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온통 그 만화영화를 이야기했다. 그저 부럽기만 했다. 우리는 집 밖의 산과 강에서 뛰어다니며 나뭇가지를 갖고 노는 등, 원시적인 방법으로 노는 수밖에 없었다.

따듯한 봄날이었다. 집 주변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자그마한 웅덩이에 까만색 방울 같은 것들이 수없이 많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올챙이였다. 올챙이가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웅덩이를 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우리는 손을 가운데로 모아 물과 올챙이를 한꺼번에 들어 올렸다.

손으로 만든 바구니 모양 속에 수많은 올챙이가 담겼고 그것들은 내 손바닥을 살살 간지럽히며 한껏 헤엄쳤다. 올챙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만졌던 경험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나 더 기억나는 일이 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왕림교 인근까지 이르렀을 때이다. 저 멀리 관사 부근에서 내가 기르던 강아지가 엄청난 속력으로 뛰어나온다. 저 멀리서 어떻게 알고 나오는지 궁금했다. 강아지들의 엄청난 능력일 것이다.

이 강아지는 아버지께서 자그마할 때 부대에서 집으로 데려오셨다. 간신히 눈만 뜨고 잘 걷지 못했다. 너무 귀엽고 예뻤다. 동생과 나는 이불 속에 조그맣게 자리를 만들고 이 녀석을 재웠다. 그리고 따듯한 물에 우유를 타서 손바닥에 담아 이 녀석에게 먹였다. 조그만 혀를 쏙 내밀고 우유를 맛있게 핥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이 녀석은 매일 조금씩, 조금씩 커갔다. 뒤뚱뒤뚱 걷기 시작하더니 금세 마루를 뛰어다녔다. 너무 커져 버려서 집안에는 둘 수가 없었다.

image09.png 전곡읍에서 왕림리 관사로 가는 길(은대리)


예전에는 개를 마당 한쪽에 집을 만들어 주고 그 속에서 키웠다. 개집에 군용 담요를 깔아주었더니 너무 따뜻했다. 집 앞에는 먹이 그릇을 두었다. 예전에는 다 이런 방식으로 개를 키웠다. 먹이도 전용 사료가 아니라 그냥 먹다 남은 음식을 모아서 밥그릇에 담아두면 강아지가 알아서 먹었다. 물도 마찬가지이다. 당시에는 사료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개는 영물(靈物)이다. 주인을 너무나 잘 알아본다. 그리고 너무 잘 따른다. 이 녀석도 그랬다. 6개월 정도 지나자, 덩치가 주인인 나보다 더 커버렸다. 집 주변에서 놀 때면 이 녀석은 마치 경호원처럼 내 옆에서만 맴돌았다. 이때부터 난 강아지를 기르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서울에 와서도 자그만 강아지를 마당에서 길렀다. 2025년 지금도 집에서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전곡읍에서 짧지만, 강했던 추억을 뒤로한 채, 난 전곡읍을 떠났다. 이 친구들과 졸업사진을 함께 찍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사단본부 발령 때문에 우리 가족은 모두 이사해야만 했다. 새롭게 가는 곳은 전곡에서 멀지 않았다. 동두천 부근이었다. 동두천에서 버스를 타면 20여 분이면 이곳 전곡역에 도착한다. 자동차로 약 20분 거리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냥 멀지 않다는 이야기만 부모님께 들었다.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난 전학 가기 싫다고 울며 부모님께 애원했다. 어리고 순수한 때였다. 그저 이곳에서 친구들과 더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묻고 이곳을 떠났다.

사실 전곡읍에서의 생활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늦가을에 가서 다음 해인 5학년을 온전히 보내고 그 이듬해인 6학년 봄에 다른 곳으로 다시 전학을 갔다. 길어봐야 1년 반이다. 심지어 여름방학은 딱 한 번만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남아있다. 참 신기할 노릇이다. 길지도 않은 그 시간이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뭘까.

어른이 되어서도 이곳을 수시로 들렀다. 일이 안 풀려 답답하거나 지칠 때, 그리고 그냥 조용히 쉬고 싶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어김없이 여기에 왔다. 혼자서 친구들과 물놀이하던 강가를 거닐거나 그때 다니던 초등학교에 들어가 아이들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 녀석도 이곳 연천군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 친구와도 함께 이곳을 가끔 찾았었다.

그렇게 자주 오다 보니 예전의 기억이 잘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신통한 기억력을 가졌다 해도 40년이 더 지난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말과 표정까지 그렇게 세세히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른바 반복된 회상(回想)의 효과라고나 할까?

‘내가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동요의 가사처럼 우리는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뛰어놀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나이 들어간다. 전곡읍이 나에겐 그런 장소이다.

그곳을 거닐다 보면 난 꿈 많은 어린아이로 변해있다. 여러 종류의 소음과 복잡한 차들의 행렬은 보이지 않고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가 뽀얗게 휘날려 입과 코를 가리게 되는 시골의 비포장도로를 걷는 내가 보인다.

추운 겨울이면 마른 논밭 사이로 허름한 시골집의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그 연기의 내음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코스모스는 비포장도로 길가에서 가을바람에 그 몸을 내맡기듯 살랑거리며 우리를 반겨준다. 지금도 나는 가을 코스모스를 가장 좋아한다. 긴 겨울을 힘겹게 보낸 논과 밭의 흙 내음과 코를 찌르는 듯 피어나는 퇴비의 고약한 냄새조차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일 뿐이다. 멀리 들리는 소들의 ‘음메~’하는 울음소리는 새로운 계절이 돌아왔다는 신호처럼 들린다.

유년 시절의 추억들은 평생 잊히지 않고 내 마음속 어느 한구석에 숨어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른다. 유년 시절이 그렇다. 잊을 줄 알았는데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면 많은 추억이 새록새록 솟는다.

그렇다! 나에게 이곳에서의 시간은 일생에서 진하게 밑줄을 그을 수 있는 소중한 흔적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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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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