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봉암리 아이들
SNS 쪽지로 문자가 왔다.
“혹시 어릴 적에 봉암리 살던 원(源)이 아니세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떠났던 학교 동창 밴드(band)에 가입하자마자 누군가로부터 쪽지 연락이 급히 온 것이다. 낯이 익은 이름이다. ‘삼이(가명)’였다.
사실 며칠 전 밴드에 가입한 후 회원 명단에서 이미 그의 이름을 보았다. 반가웠다.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직접 연락을 취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난 봉암리에서 채 4달도 생활하지 않고 서울로 전학을 왔기 때문이다. 난 기억을 하지만 그들이 날 기억을 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혼자 소탈한 옛 추억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고 그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메시지를 보는 정도로도 만족했으니 말이다.
쪽지에 대하여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내가 맞아”, 바로 삼이와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다. 3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지만 예전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 순간만은 우리 둘 다 겨우 6학년의 어린 학생들이었다.
시간은 30년 전에서 멈췄다. 30년 동안 우린 각자의 시간 속에 살았고 다시 그 시간이 하나로 만났다. 그렇기에 우리 기억에는 서로가 30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만 남아있었다. 어제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 놀다가 집에 가면서 “내일 봐” 하며 헤어졌다가 다음날 만난 느낌이었다. 각자의 삶은 30여 년간 치열하게 영위(營爲)했지만, 만나는 순간에 우리 둘은 그저 어제 오후에 헤어졌었던 어린 국민학교 6학년의 어린 학생들일 뿐이었다.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날 많이 그리워했고 여러 번 찾았노라고 말했다. 자신이 카드회사 직원이었을 때 내 이름을 검색해서 찾아보았다고도 했다. 삼이는 어른이 될수록 내가 많이 생각났고 꼭 한번은 보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그러던 와중에 밴드에 내가 스스로 가입해서 너무 반가웠다는 말도 해주었다.
봉암리에서의 4개월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이 그와 나를 평생 잊지 못할 친구로 기억 남도록 했을까? 난 그와 봉암리 친구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처음엔 어딘지도 몰랐었고 낯설기만 했던 그곳에서 어떻게 그 친구들과 생활했는지도 되짚으며 생각해 보았다. 언뜻언뜻 스치는 생각과 장면은 여럿 있었지만, 차분히 메모해 가며 생각해 보기는 처음이다. 그 기억을 이렇게 페이지로 엮어보려 한다.
1982년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나는 연천군 전곡읍에서 양주군(楊州郡, 지금의 양주시) 은현면(隱縣面) 봉암리(鳳巖里)로 전학을 갔다. 당시 연천군에는 전방대대와 연대본부가 있었고 아버지는 대대장이셨다. 그리고 상급 부대인 사단본부가 바로 봉암리 부근에 있었다. 아버지께서 사단본부로 배속(配屬)받으셨고 우리는 전곡에서의 추억을 마치고 봉암리의 군 장교 관사로 이사를 왔다. 당연히 나와 동생도 부근의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전곡읍에서의 추억이 너무 좋았기에, 그곳을 떠나기 싫어 눈물까지 흘렸다. 그렇지만 어린아이였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봉암리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봉암리(鳳岩里)는 양주시(楊州市) 은현면(隱縣面)에 속해있다. 동두천시 상패동과 접하고 있어 동두천 시내와는 멀지 않다. 양주시 보다는 동두천시 생활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다 보니 필자도 당시에는 봉암리가 동두천시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인근에 ‘하봉암동’이라는 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더 착각하기 쉬웠다.
봉암초등학교를 다닐 때, 교가의 첫 소절은 ‘감악산(紺嶽山)’으로 시작되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실제 감악산이 어디에 있는 산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감악산(紺岳山)이란 지명은 검푸른 바위산이라는 뜻인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보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의 높이는 675m이며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 파주시 적성면의 경계에 있다. 높고 웅대하며 송곳처럼 뾰족한 봉우리가 있어서 정상에 올라서면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다. 감악산은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 소요산(동두천시), 칠봉산(양주시), 왕방산(포천시)과 더불어 유명한 산으로 양주시를 대표하는 산이다(향토 문화 전자 대전).
최근까지도 친구가 감악산에서 촬영한 사진을 나에게 보내주곤 한다. 감악산 둘레길 등, 등산코스가 잘 꾸며져 있고 감악산 출렁다리도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동두천(東豆川)이라는 지명은 주한미군 동두천기지인 캠프 케이시(Camp Casey)와 캠프 호비(Camp Hovey) 경내의 일대를 흐르는 하천의 이름인 동두천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동두천에는 미군 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사단 앞’이라는 이름의 버스정류장은 바로 2사단 앞의 정류장 이름이다. ‘사단 앞’ 부근의 상점 간판은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었고 거리에는 미군들이 많이 보였다. 필자는 그 당시 동두천에서 외국인을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우리나라에 외국인을 볼 기회가 거의 없을 때였다. 커다란 덩치의 외국인이 참 신기했다.
토요일이면 봉암리의 친구들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동두천 시내 구경을 가기도 했다. 2사단 앞에서 봉암리까지는 자전거로 30~40분이면 갈 수 있었다. 검문소를 지나 ‘마고개’라 불리는 언덕을 힘겹게 넘으면 길가에 커다란 공동묘지가 보였고 그곳을 지나면 동두천 시내의 철길 건널목에 다다른다. 그 철로는 지금의 연천까지 이르는 경원선으로 이어진다. 서울에서 의정부를 거쳐 동두천을 지나 한탄강, 전곡, 연천, 대광리, 신탄리역에 이른다.
2사단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소요산(逍遙山)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소요산으로 소풍 갔다. 지금은 ‘소요산’ 역이 있지만 당시에는 역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때는 역까지는 가지 않았고 그냥 소요산 아래쪽으로 바로 갔었기 때문이다.
소요산은 약 600미터의 높지 않은 산이다. 서울에서 가깝고 지하철이 연결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는다.
소요산은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요석(瑤石)공주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장소이다. 소요산 입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자재암(自在庵)’이라는 작은 절이 있다. 절의 주변 경관이 너무 아름다웠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후 소요산에 들어와 수행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변신한 여자와 만나 깨달음을 얻고 암자를 세워 '자재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필자도 날씨 좋은 주말이면 가끔 소요산을 오르곤 했다.
서울에서 7호선 지하철을 타고 도봉산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하고 가다 보면 ‘소요산역(驛)’에 도착한다. 등산할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항상 이 역에서 하차한 후 소요산 입구 방면으로 향했다. 역 앞에는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하는 야구 놀이터가 있었다. 소요산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전곡읍까지도 이 십여 분이면 갈 수 있었다. 너덧 시간이면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으니 하루 등반 코스로는 딱 적당하다. 산세(山勢)나 등산로가 그리 험하지도 않다. 서울 인근에도 등반할 산들이 꽤 있었는데 이상하게 소요산을 자주 찾곤 했다. 그저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서울로 이사 오고 나서도 필자는 꽤 오랜 시간 이곳을 마음속에서 그리워했다는 증거이다. 동두천, 연천과 관련된 이야기가 책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면 귀를 기울였다. 방학 때나 휴일에 시간이 나면 이곳으로 여행을 오곤 했다. 그냥 이곳의 산과 강이 친숙하고 좋았다.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혼자 지하철이나 승용차로 잠시 들렀다 돌아갔다. 그냥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힘든 일이 있거나 마음이 지쳤을 때면 꼭 이곳 부근까지 오곤 했다. 여유가 있으면 연천까지 갔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동두천까지만 왔다가 서울로 돌아갔다. 특별히 뭘 하지도 않았다. 식당에 들러 간단히 음식을 먹거나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서울로 돌아갔다, 아무리 서울의 인근이라 해도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데도 말이다.
다시 국민학교 시절로 돌아가 본다.
육상대회 등 큰 대회들은 동두천에 있는 학교에서 열리기 때문에 봉암초등학교 학생들은 동두천에 자주 가야만 했다. 담임선생님께서 인솔하시고 반 전체 학생이 버스를 타고 동두천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과 버스에서 떠들면서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동두천까지 갔었다. 당시 큰 행사가 열릴 때면, 동두천여상 고적대가 와서 축하 공연을 했다. 밴드부원들이 힘차게 행진하며 관악기와 타악기를 커다란 소리로 절도있게 연주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특히 예쁜 색의 단복을 입고 큰 모자를 쓴 채, 맨 앞에서 큰 지휘봉을 연신 휘저으며 지휘했던 리더 학생은 정말 멋져 보였다. 아마 우리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동두천여상 고적대의 명성이 기억날 것이다. 동두천여상 고적대는 1982년 프로야구 개막식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규모 행사에서도 공연했던 유명한 팀이다. 1980년대 동두천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물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고적대도 없어지고 학교도 ‘한국문화영상고등학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전에 살았던 전곡읍에서 봉암리까지는 그리 멀지는 않았다. 버스로 30여 분이면 이를 수 있는 거리다. 난 봉암리에 와서도 전곡읍과 전곡 국민학교의 친구들을 계속 그리워했다. 그때의 그리움과 추억은 지금도 내 글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요즘에도 시간이 나면 낚시도 할 겸해서 전곡과 한탄강 인근을 습관적으로 찾는다.
어쨌건 봉암리의 첫 기억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특별히 이곳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냥 전곡의 추억이 원체 좋아서 봉암리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봉암 국민학교에 처음 전학 갔던 날.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를 많이 반겨주었다. 시골 학생 특유의 정감에 군(軍) 장교의 가족이라는 이점까지 더해져 대부분의 친구와 선생님들께서는 날 살갑게 잘 대해주었다. 전곡 국민학교는 한 학년에 6학급도 넘을 만큼 연천군에서는 가장 큰 학교였다. 서울의 큰 학교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골 학교라고 부를 정도로 작은 학교는 아니었다. 전교생이 1,000명이 넘는 큰 규모였다. 그에 비해 봉암 국민학교는 한 학년에 한 학급씩만 있었다. 6학년에서 우리 반이 그냥 끝이었다. 우리 반에서 1등을 하면 자동으로 전교 1등이었다. 전곡 초등학교에서 나는 1등은커녕 반에서 5등도 간신히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봉암리에 오니 특별히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그냥 1등이었다. 1등을 하니 온 마을에 다 소문이 났다. 지나가는 마을 어른까지 나한테 전교 1등이라고 칭찬해 줄 정도였다.
담임선생님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셨고 아기를 키우시던 남자 선생님이었다. 친절하셨다. 학교 뒤편 조그만 관사에서 살고 계셨는데 아이들이 수시로 찾아가도 친절하게 맞이해주셨다.
5학년 선생님인 젊은 여자 선생님도 계셨다. 어린 우리들이 보기엔 너무 예쁘고 착하신 선생님이셨다. 학교의 규모가 작다 보니 학년에 상관없이 모든 선생님과 학생들이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 진정한 학교-마을(지역사회) 공동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우리 반에 ‘명희(가명)’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남자아이들은 명희를 심하게 놀려댔다. 덩치가 큰 명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화를 내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놀린 아이들을 혼내지도 않았다. 그냥 자포자기한 모습이었다. 여자아이를 그렇게 심하게 놀리는 건 나로서는 처음 봤던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가엾다는 마음을 들었으나 도와줄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전학을 와서인지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때, 내가 명희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무언가 했으면 명희의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직도 가끔 생각에 빠져본다.
한심하게도 난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자고 하거나 명희에게 살갑게 말을 붙여 위로해 주지 못했다. 어떤 날은 나조차 그들의 가해에 맞장구를 치면서 놀리는 말을 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마음이 너무 불편해졌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도 쉬운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결국 ‘아! 이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어쨌든 나도 학교 폭력의 방관자였다. ‘침묵의 카르텔’로 폭력에 동조했다.
30년이 지나 친구들과 다시 만난 자리에서 명희의 안부를 물었다. 일순간 모임 자리가 조용해졌다. 모두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며칠 후, 삼이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명희가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 했다는 것이다. 남자 동창들은 자신들이 왜 그리 명희를 괴롭혔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한다고 말해줬다. 명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고 여자아이라서 내가 말을 걸거나 편을 들어줄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저 나라도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라도 위안을 삼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설렁탕~ 곰탕~’이라고 하면서 명희를 놀려만 댔다. 명희는 덩치가 큰 편이었지만 너무나 얌전했다. 아이들이 아무리 놀려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조차 명희를 도와주지 못한 죄책감을 느낄 정도이니 다른 친구들은 마음이 너무 안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명희에 대한 안타까움은 기억의 흔적으로 아직도 남겨져 있다. 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서도 아이들이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관찰했던 이유가 바로 이 경험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수시로 내 경험을 들려주었다.
여러 명이 약한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은 너무 나쁜 행동이고 나처럼 평생을 후회하게 된다고 말해주었다. 대다수 아이는 나의 말을 이해하고 잘 따르는 편이었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를 맞아 죽는다’라는 흔해 빠진 이야기를 곁들이며 비유하면서 잔뜩 분위기를 잡은 채 말하면 아이들은 무슨 죄라도 지은 양, 자신이 행여 다른 친구한테 조금이라도 나쁘게 했던 일이 있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한다. 쉬는 시간이면 나에게 와서 자신이 며칠 전에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다고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묻기도 한다. 참 순수한 녀석들이다.
삼이는 두뇌가 명석했으며 말이 없는 편이었고 성격은 매우 차분했다. 시골 아이 특유의 거친 모습이 없었고 덩치는 평범했다.
어느 날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서너 명과 함께 삼이 집에 놀러 갔던 적이 있다. 시골이라 주산, 태권도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은 그저 어울려 다니며 자전거를 타거나 친구 집에 놀러 다녔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했던 나는 시골 아이들의 놀이 문화가 당연히 낯설었다. 그냥 아이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들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며 놀았다.
그날 삼이 집에서 배운 것은 낚시였다. 낚시라고는 아예 본 적도 없었다. 삼이는 떡밥을 물에 적당히 개는 방법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당시 떡밥은 지금처럼 제품으로 팔지 않았다. 동네의 텃밭에 가서 깻묵을 주워다 물과 적당히 섞은 뒤, 손으로 조물조물 반죽해서 둥글둥글하게 뭉쳐 콩알 크기로 만들었다. 낚싯대는 긴 대나무를 잘라 한쪽 끝에 고리를 만들어 붙인 다음 낚싯줄을 걸고 바늘을 직접 묶어서 만들었다. 그런 모습들이 생소하면서도 재미있고 신기했다.
낚시를 위한 사전 작업을 마치면 삼이를 따라서 인근의 봉암저수지에 갔다. 저수지는 마을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차가 지날 때마다 뿌연 흙먼지가 눈을 뜨지 못할 만큼 휘날렸다. 흙길을 한참 따라 저수지에 이르러 삼이와 친구들이 시키는 대로 낚싯대를 드리웠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낚시다. 그런데도 물고기를 쉽게 잘 낚았다. 낚싯대를 드리우면 바로바로 입질이 오고 건져 보면 손바닥보다 더 큰 물고기들이 바늘에 걸려있었다. 너무 신기했다. 그때 배운 기술로 아직도 낚시를 취미로 즐긴다.
봉암저수지는 지금은 정식 낚시터로 영업한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붉은빛의 노을과 그 노을에 반사된 저수지의 풍광이 너무 아름답다.
낚시 말고도 다른 놀잇거리가 있었다. 저수지 아래쪽의 좁은 흙길을 걷다 보면 1미터 정도 폭의 배수로가 있었다. 저수지에서 논으로 물을 보내는 좁다란 수로(水路)이다. 친구들이 족대와 큰 양동이를 들고 그 수로에 들어갔다. 한 방향으로 물이 흐르기 때문에, 우리 중에 누군가가 발로 첨벙거리며 물고기를 몰아내면 반대편에서는 준비한 족대로 물고기들을 잡는다. 이른바 족대질이다.
주로 미꾸라지들이 많이 잡혔다. 새카맣게 떼 지은 미꾸라지들을 족대로 퍼 올리다 보면 양동이 몇 개가 금방 가득 찬다. 친구들이 여럿이서 낑낑대며 양동이를 들고 마을 식당에 미꾸라지를 갖다주었다. 서툰 솜씨로 나도 그들을 거들었다. 친구들은 나를 그냥 동생처럼 어리게 생각했다. 자신들과는 조금 다르고 시골 생활을 잘 모르고 금방 서울로 떠날 예정인, 시골 생활을 잘 모르는 약한 아이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달리 말하면, 서울 아이인데 여기 잠시 머무는 친구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무엇이든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었고 서툴다고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식당에 미꾸라지를 갖다주면 그 대가로 주인아줌마는 우리에게 돈을 조금씩 줬다. 우리는 그걸로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사 먹었다. 그리고 저수지 흙바닥에 여기저기 묻혀있는 유리병들도 자주 주우러 다녔다. 큼지막한 비료 포장지를 질질 끌며 그 속에 빈 병 이른바 ‘공병(空甁)’을 모아서 슈퍼마켓에 갖다줬다.
당시만 해도 알루미늄 캔이 존재하지 않았다. 소풍을 가거나 기차를 탈 때면 마시던 유리병에 들어있는 사이다를 영화의 한 장면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 병을 주워서 갖다주면 십 원 정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꿀맛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사실 영관급 장교의 가족이었던 필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부모님께 용돈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냥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노는 게 재미있어서 그들과 함께 다녔다.
난 그렇게 삼이를 비롯한 봉암리 친구들과 매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필자는 교사가 되고 난 후 서울의 학생들에게 시골에서 놀았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줄 수 있었다. 서울의 학생들은 흥미진진하게 내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나로서는 참 색다른 시골 생활의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