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다시 그곳에 간다면

01. 새로운 곳, 새로운 시작

by 자화상

이 장(章)은 필자(筆者)의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5~6학년 시절인 12세에서 13세 무렵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어린 나였다. 지금의 난 12세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그리고 12세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었을까? 12세 때 난 40년 후에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길 원했을까?

길가의 검은 현무암 바위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개천 건너편에는 분홍빛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잔잔히 흐르는 부드러운 물결에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졌다. 물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귀를 기울이면 ‘졸 졸 졸~’ 소리가 간신히 들려왔다. 담배를 물었다. 허연 안개가 하늘로 번져갔다. 눈물 두 가닥이 볼을 타고 흘러 신발 앞쪽에 떨어졌다. 일부러 닦지 않았다. 닦고 싶지도 않았다. 왜 울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10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곱슬머리에 몸은 마른 편이다. 얼굴은 조그맣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책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를 들고 있다. 손가락은 여자애처럼 가늘었고, 다리는 상대적으로 튼튼한 편이었다. 하얀색 운동화는 약간 낡았고 끈은 단단히 조여 있었다.

“아저씨, 왜 울고 있어요?”

그 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윗동네에 사니?”

“네! 아저씨. 울지 마세요. 괜찮을 거예요.”

“녀석! 뭔지도 모르면서 괜찮다니. 여하튼 고맙다. 학교는 재미있어? 멀리 걸어서 다닐 텐데 힘들지 않니?”

아이가 웃음 띤 얼굴을 대답한다.

“아니요. 동네 친구들이랑 함께 다녀서 그냥 재미있어요.”

“그렇구나.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힘든 사람들 도와주는 사람? 뭐가 되든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저씨도 기운 내세요. 어른은 울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창피하네. 그만 울어야겠다. 넌 이름이 뭐니?”

“원(源)이요.”

“ ……”

너무나 놀라웠다. 그 아이는 40년 전의 ‘나’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익숙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어릴 적 내가 지금의 나에게 기운을 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선명하게는 아니지만 나의 고민과 물음에 다정하게 방향을 알려준 사람,

“저 산비탈을 지나 좁은 숲길을 지나면 바로 큰 느티나무가 보일 거야…”

이렇게 웃으며 따듯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는 사람이 있는 곳, 바로 이곳이다.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다. 정신을 놓은 모습으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래. 원(源)아! 고맙다. 나도 기운 내서 이겨내 볼게. 너도 겨우 열두 살인데 고생 많이 했지? 네가 되고 싶은 꿈을 잘 이룰 거니 지금처럼 열심히 생활해라.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동생이랑도 사이좋게 지내. 밥 많이 먹고, 엄마 아빠 말씀 잘 듣고. 알겠지?”

깨어서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눈물이 눈에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닦을 수도 없었고 닦이지도 않았다. 가슴에 사무칠 만큼 그립고 그리웠다. 어릴 때의 내 모습이…

어릴 적 ‘나’를 만났던 곳은 경기도 연천의 어느 마을이다. 가끔 이렇게 꿈을 꾼다. 연천은 나의 물음에 언제나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런 의미가 스며있는 곳이다.

1980년 가을. 아버지께서는 육군본부 근무를 마치시고 전방부대의 대대장으로 가셨다. 햇살이 따사로운 초가을, 우리 가족은 경기도 연천의 어느 시골 작은 관사로 이사 갔다. 커다란 대한통운 트럭에 어머니, 동생, 내가 함께 타고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너무나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간 것이다.


image06.png 전곡읍 입구(2025년 6월)

아주 어릴 적, 강원도 양구군의 전방부대 관사에서 잠시 살았던 적을 제외하면 초등학교 시절 거의 모두를 서울에서만 생활했었다. 그러니 시골 생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연천군은 최전방 지역이다. 휴전선과 가까워 군인들이 많이 보이고 가끔 야포(野砲)를 발사하는 소리와 전차(戰車, 탱크)가 이동하는 굉음이 들려온다. 서울 등 도시에서만 살았던 사람들은 탱크 소리가 얼마나 거대한지 전혀 모를 것이다. 관사 바로 인근에 포(砲) 마당이라 하여, 군인들이 포 사격 훈련하는 너른 평지가 있었다. 야포, 전차 소리는 정말 컸고 두려웠다. 나뿐 아니라 접경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모두가 겪었던 일상이었다.

서울 반포대교 인근의 군인아파트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한참을 달렸다. ‘의정부’와 ‘동두천’이라고 써진 간판을 본 것 같았고, 조금 더 가다 보니 ‘연천군’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리고 한탄강 다리를 건넜던 것이 얼핏 기억났다. 도로 옆에는 ‘38도선’이라는 큰 돌로 된 표식이 서 있었다. 이곳이 38도선이라는 뜻이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바로 여기까지 북한 땅이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한을 나누었으니 말이다.

전곡읍까지는 아스팔트 도로였지만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부터는 비포장도로였다. 차가 한번 지나가면 흙먼지가 주변을 뒤덮었다. 상상을 초월한다. 눈과 코를 막은 채로 한참을 서 있어야 한다. 그래도 시커먼 매연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전곡읍은 대부분이 평지였고 산지 쪽으로 야트막하게 솟은 고지(高地)들이 몇 개씩 자리한 평범한 지형이었다. 우리가 살던 관사는 고지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큰 언덕 위편에 있었다. 거대한 트럭은 그 언덕 경사길을 잘 올라가지 못했다. 중간에 여러 차례 ‘쉬었다’, ‘가다’를 반복했다. 흙먼지와 검은 매연을 동시에 내뿜으며 간신히, 아니 ‘기어이’ 관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왕림교(旺林橋)를 바로 건너서 있는 전곡읍(全谷邑) 왕림리(旺林里)이다. 왕림리와 은대리(隱垈里)는 왕림교라는 조그마한 다리를 두고 인접한 곳이다. 차탄천(車灘川)은 연천군(漣川郡) 일대를 흐르는 하천이고 길이는 약 36km이다. 강원도 철원군에서 발원하여 연천군의 신서면 대광리와 연천 읍내를 거쳐 전곡읍에서 한탄강과 만난다. 차탄천도 용암대지 위를 지나가기 때문에 하류 쪽(전곡읍)에서는 그 주변에 주상절리(柱狀節理)가 나타난다. 주상절리는 글자 그대로 기둥 모양의 절리, 즉 단층면이다. 이 주상절리는 용암이 급격하게 식어서 굳을 때 주로 육각기둥 모양으로 굳게 된다. 기둥의 모양이 서로 얽혀 멀리에서 보면 장관을 이룬다. 바로 이곳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왕림리와 차탄천, 어수물의 유래이다. 몇 해 전 연천을 소개하는 책자를 출판한 적이 있었는데 집필 과정에서 알게 된 내용이다. 왕림교, 차탄천, 어수물 등 필자의 글에서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지명들이다. 그 유래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다음의 글로써 소개해 본다.

왕림리(旺林里)는 원래왕림리(王臨里)’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한자가 바뀐 연유 또한 있으나 여기서는 그 설명을 생략하고자 한다. 일제(日帝)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이 어릴 적 동문수학하던 옛 친구인 금은 이양소(李陽昭)를 만나기 위해 연천을 찾게 된다. 금은 이양소는 고려 말의 문신이며 1382년(고려 우왕 3년), 평소 친교가 두터웠던 동갑내기 이방원과 함께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태학에도 같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양소는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자, 신하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곧은 절개와 신념으로 벼슬을 버리고 연천의 도당골이라는 곳으로 숨어들어 일체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은둔하며 살았고, 이방원은 이양소를 힘들게 찾아냈다.

이렇게 어렵게 찾은 옛 친구를 그는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서두르다 결국 개천에서 수레가 빠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차탄천(車灘川)이라 불리는 연천읍 주위에 있는 냇가 이름의 유래가 된 것이다. 차탄천이라는 것은 수레가 빠진 개울이라는 뜻이며 수레울 또는 수레 여울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론 이와 인접한 동리 이름도 차탄리(車灘里)가 된다.

군남면 왕림리(王臨里)라는 마을의 이름도 이때 붙여지게 된다. 태종이 이양소를 만나기 위해 이양소가 머물고 있던 도당골을 가던 중 이양소가 장진천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타고 오던 어가(御駕)를 다시 돌려 왕림리에 쉬면서 이양소를 기다렸는데, 당시 태종이 친히 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느티나무를 심고 정자터라 명명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왕림리(王臨里:왕이 임하신 동리)라 지었던 것이다.

또한 현재 전곡읍 은대리에 있는 어수물(御水井)은 태종 이방원이 이양소를 만나기 위해 연천으로 친행(親行)하던 중 이곳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마셨다 하여 이 우물을 '어수물'로 명명했다 한다(연천문화원 자료).

연천군 곳곳에 차탄천의 옛 이름인 ‘수레울’, ‘수레여울’을 붙인 지명이나 상호명이 자주 보인다. 연천군청에서 운영하는 ‘연천 수레울아트홀’ 등이 대표적이다.


20250808_152656.jpg 연천 수레울아트홀(2025. 8월)





2025년 7월 4일, 은대리의 어수물 인근에는 ‘은대리 문화 벽돌공장’이 개관되었다. 폐공장의 흔적을 유지하면서 전시, 공연, 문화 예술교육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과거에 이곳은 10여 개의 벽돌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1988년 준공되었다가 2001년 폐업된 ‘전곡 벽돌공장’을 연천군에서 매입하여 복합문화공간으로 구축한 것이다. 옛 모습을 간직한 채, 현대예술의 옷을 입힌 좋은 아이디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50726_103901.jpg 은대리 문화 벽돌 공장


이 문화 벽돌공장은 전곡읍에서 연천읍으로 가는 국도의 우측, 은대 교회에서 우회전해 조금만 들어가면 야트막한 평지의 한적한 농촌 마을의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높고 길쭉한 거대한 굴뚝이 멀리서도 보여 찾기가 편했다. 굴뚝은 그라피티(전철, 건물, 벽, 교각 등에 스프레이나 페인트로 그리는 예술)로 멋지게 꾸며져 있었다. 내부에는 현재 ‘예술과 평화’를 주제로 한 설치미술, 연천군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 미디어아트, 패트릭 아트 작품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어 예술적 감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차탄천 주상절리, 은대리 물거미 서식지와 함께 은대리와 연천군을 대표하는 명소가 될 것이다.

차탄천은 여름이면 매일 수영을 하던 곳이다. 어수물은 내가 어른이 되어 자주 들러 견지낚시 하던 곳이다. 아마 전곡읍이나 연천군에 사는 주민들은 어수물을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은대리, 왕림리가 이렇게 태종 이방원과 관련이 있는지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힘겹게 도착한 군(軍) 관사(官舍)에는 십여 채의 벽돌집이 있었다. 이런 형태의 주택은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었다. 이곳은 인근 군부대에 근무하던 대대장급 ‘장교’들의 임시 숙소였다. 주변에는 민가(民家)가 한 채도 없었지만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관사 입구에 바로 부대 위병소(衛兵所)가 있었고 그곳에는 24시간 동안 초병(哨兵)들이 계속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의 부관(副官) 아저씨와 장병 십여 명이 이삿짐 내리는 것을 도와주셨다. 아버지 부대의 병사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그들에게 밥을 지어 주셨다. 다른 지역에 이사 갈 때는 어머니께서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셨는데 이곳 전방에 오니 이런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관사에는 내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지척인 은대리(隱垈里)에는 은대 국민학교라는 자그만 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관사의 다른 아이들은 전곡읍에 있는 전곡 국민학교까지 멀리 다니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전곡읍이 연천군의 중심도시였다. 연천으로 오는 군인이나 주민들은 연천군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전곡읍에 머물렀다. 시외버스터미널도 규모가 컸고 유동 인구도 적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큰 학교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들이었을까? 어머니의 권유로 나도 은대 국민학교가 아닌 전곡 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우리 반에는 관사에 함께 살던 동갑내기가 있었다. 5~6개 반이 있었는데 아마 학교에서 같은 반이 되도록 배려해 준 것 같았다.

어른 걸음으로도 학교에서 집까지는 1시간은 족히 걸렸다. 아침 등교는 전곡읍에 나가는 군용(軍用) 버스를 탔다. 하지만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일이 문제였다. 전곡역 앞의 군용 터미널에 가면 군 버스나 트럭이 가끔 있었는데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무리 지어 걸어서 집에 와야 했다. 그런데 힘들다기보다는 더 재미있었다. 집에 일찍 와봐야 할 일이 없었다. 어차피 노는 것이었고 학교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더 놀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전방부대 대대장은 꽤 많은 권한을 가진다. 대대장이 관리하는 부대원은 대략 600여 명이다. 소대장과 중대장을 휘하에 두고 적지 않은 병력을 통솔해야 한다. 그만큼 책임도 크다. 대대장은 가장 일선의 지휘관일 것이다.

전방부대는 해당 지역의 학교, 지역사회와도 서로 연계가 잘 되어 있다. 학교 운동회 때면 장병들이 와서 여러 가지 일을 도와준다. 천막을 쳐주거나 운동장을 평탄하게 하는 등, 힘든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리고 농번기(農繁期) 대민 지원으로 농사일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럴 때면 동네 어르신들께서는 장병들에게 막걸리나 새참을 넉넉히 주셨다. 그렇게 군과 주민이 서로를 도와주며 생활하는 곳이 전곡읍과 같은 ‘군사 도시’이다.

지금은 PPT로 브리핑을 하지만 당시만 해도 커다란 괘도(掛圖, 차트)에 두꺼운 검은색 매직으로 글씨를 써서 발표하던 시절이었다. 차트에 쓰는 글씨는 일반 글씨와는 달랐다. 두꺼운 매직으로 잘 보이도록 예쁘게 글을 써야 한다. 그만한 고급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잘 이해가 가지 않으면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주인공 형사가 새로 부임한 서장에게 사건을 브리핑하는 장면을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두꺼운 나무 작대기 두 개로 프레임을 만들고 사이에 커다란 용지를 끼워서 쉽게 넘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전문적인 글씨를 선생님들께서 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대에는 이런 차트 글씨만 전문으로 쓰는 병사들이 있다. 차트를 쓰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차트 병(兵)’이라 불렀다.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께서 날 조용히 부르시곤 말씀하셨다. 혹시 차트 병사를 두어 명 학교에 보내주실 수 있는지 아버지께 여쭈어보라는 내용이었다. 난 차트 병이 뭔지도 몰랐지만, 선생님 부탁이라 아버지께 그 말씀을 드렸다. 다음날 아버지께서는 선생님과 통화를 하신 후에 바로 차트 병을 몇 명 보내주셨다. 그날 오후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덕분에 나도 뿌듯해질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사소했던 그런 종류의 일들은 내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기가 죽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가 학교생활에 조금씩 자신감이 생겨난 것이다.

선생님께서도 나를 자상하게 대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 서울에서는 1년 내내 담임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시지 않았다. 아마 내 이름도 모르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호의적이었다. 그렇게 난 서울에서와는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학교생활에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학급 임원과 같은 당시의 ‘부반장’이 되기도 했다. 부반장이 되면 동그란 모양의 명찰을 학교로부터 받으며 왼쪽 가슴에 핀으로 꼽고 다닌다. 이름만 있는 명찰 옆에 자랑스럽게 함께 붙이는 또 다른 명찰 아니, 휘장(徽章)이나 다름없었다.

서울의 초등학교에서는 나보다 훨씬 똑똑한 녀석들이 많았다. 임원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난 조금씩 학급에서 주류가 되고 있었다.

이곳에 이사 온 후, 첫 여름방학이었다. 관사 아래편은 하천이 흘렀다. 한탄강의 지류인 차탄천이다. 우리는 아침밥을 먹고 나면 수영복만 입은 채 물가로 갔다. 개울보다는 훨씬 컸다. 폭도 넓고 깊이도 몇 길(한 길:사람 한 명의 키 정도 깊이) 정도는 되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화산활동의 흔적으로 기암절벽이 있었고 그 아래로 검은색 물이 흐르고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바위들이 하천의 곳곳에 여기저기 솟아 있었다. 하천 주변에는 자갈밭이 있었다. 이곳은 ‘은대리 주상절리길’로서 은대리 주상절리, 왕림교, 은대리 판상절리, 선바위, 장진교, 은대리성까지 걸을 수 있는 코스로 소개되고 있다(연천 군청 홈페이지 참조, 2025년 기준).

처음엔 신기했지만 자주 보니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그 차탄천에서 온종일 놀았다. 강가이다 보니 햇빛을 피할 곳이 당연히 없었다. 온몸이 뜨거운 햇살에 그슬렸다. 등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껍질이 벗겨졌다. 얼굴과 온몸이 일광욕이라도 한 것처럼 검게 변했다. 밤에는 등을 바닥에 대고는 잘 수 없을 정도였다.

선크림은 당연히 없었다. 집에 와서 상처 치료 연고를 바르고 다음 날엔 또 그렇게 놀러 나갔다. 정말 신나게 놀았다. 아침에 학교 가듯 물가에 가서 놀다가 점심때면 집에 잠시 와서 밥을 먹고, 다시 그곳에 가서 오후 늦게까지 놀았다.

난 원래 수영을 전혀 못 했었다. 그런데 한 달을 그리 놀다 보니 헤엄으로 오랫동안 물에 떠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 차탄천(車灘川)을 가로질러 횡단하거나 어느 한 바위를 정해놓고 친구들과 먼저 다녀오는 시합을 하기도 했다. 차탄천의 물살은 몹시 거세다. 거센 물살을 거스르며 수영하니 실력이 빨리 늘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익힌 수영 실력이 지금도 여전하다. 한탄강은 원래 지형이 험해 익사 사고가 빈번한 지역이다. 그 위험한 곳에서 멋도 모르고 그렇게 놀았다.


image05.png 은대리 주상절리, 필자가 수영하던 곳(2025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이웃 마을 은대리 아이들이 강 건너편에 보였다. 그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에게 특별히 원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우리가 군인 가족이라 싫었나 보다.

강 건너편에 서성이는 그들은 얼굴이 새카맣고 거칠어 보였다. 그냥 가만히 놀고 있는 우리에게 갑자기 욕설하며 돌을 던졌다. 우리도 같이 대항하니 그들은 물에 뛰어들어 강을 건너 이쪽으로 오려고 했다.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인근의 군 초소(哨所)로 도망갔다. 군인 아저씨가 초소에서 나오니까 그들은 다시 건너편으로 돌아갔다. 사실 학교에서 집에 올 때 은대리 마을을 지나야 한다. 우리는 항상 조마조마하며 그곳을 지나가야 했다.

4학년 때의 학급이 그대로 5학년의 학급이 되었다. 한 학년에 5~6개의 학급이 있었지만, 새롭게 학급을 편성하지 않고 그대로 다음 학년으로 올려보냈다. 그게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던 친구들과 헤어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1~2년 잠시 머물던 때라 어차피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다. 그냥 조금이라도 익숙한 아이들과 1년이라도 함께 생활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앞서 말했지만, 서울에서의 나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친구들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똑바로 하지 못했다. 손들고 발표하기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다. 선생님께서 발표라도 시키시면 난 기어드는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다른 녀석들이 내 목소리가 안 들린다고 난리였다.

공부도 그냥 그런 수준이었다. 친구라고는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녀석들 한두 명밖에 없었다. 달리기도 느리고 축구도 못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관심받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주도하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건 다른 녀석들의 이야기일 뿐, 나는 당연히 할 수 없다는 패배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숫기가 없어서 여학생 근처에도 못 갈 정도였다. 당연히 여자아이와는 이야기해 본 적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곳 전곡읍에 와서는 달라졌다. 아이들이 먼저 와서 이야기도 하고 뭔가 잘해주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내 얘기를 수군대는 모습도 가끔 보였다. 내 이름으로 장난치거나 내가 누굴 좋아한다느니 집이 어디라느니 아버지가 군인이라느니 뭐 그런 신변잡기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었다. 오히려 친구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 같아 뿌듯하기까지 했다. 바위에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 이끼처럼 살았었다. 그렇게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친구들의 관심이었기 때문에 낯설기도 했지만, 그 이면(裡面)으로 또 다른 새로운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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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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