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대학입시의 기억

by 자화상

1988년 겨울, 학교 종이 마지막으로 울렸다. 교실의 먼지 낀 창틀 너머로 흐린 빛이 들이쳤고, 나는 책가방을 메고 교문을 나섰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이어진 12년의 학창생활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오랜 시간 누적된 피로와 긴장, 그리고 어딘가 불투명한 내일을 앞에 두고, 나는교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1989년 2월. 나는 지옥 같던 입시에서 벗어났다. 단순히 시험이 끝났다는 말이 아니다. 시간과 삶과 자존의 전부를 걸었던 싸움이었다. 그때 나는 너무도 어렸고, 또 그만큼 무거웠다. 그렇다! 1989년 2월, 난 지옥 같은 입시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당시에도 1987년의 민주화 열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시기였지만 아직 사회 곳곳에는 군부독재의 그림자는 남아있었을 것이다. 사실 1989년의 나는 아무런 힘없는 어린 학생이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서 들려오는 이야기로 대충 상황은 파악했지만, 사실 큰 관심은 없었다. 특히, 고3 입시생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3에게 입시 이외의 일에 신경을 둘 여유는 없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건, 하지 않건 다른 일에 관심을 둘 시간과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 국민의 관심사인 1988년 서울올림픽은 그냥 텔레비전으로 접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굴렁쇠를 굴리며 자그마한 소년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호랑이 모양의 마스코트인 ‘호돌이’가 귀엽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께서 사 오신 88 올림픽 기념주화가 우리 집에 있었다. 외국인에게 보여 주기 부끄럽다면서 길거리 노점상을 강제로 철거하는 뉴스가 나왔다.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는 캠페인이 계속해서 보였다. 주말 아침에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청소하는 운동도 있었다. 1984년에 이미 개고기, 일명 '보신탕' 판매를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했으며 올림픽을 앞두고 해외에서 개고기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혐오 식품'이라며 정부가 강력하게 규제에 나섰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한국에서의 고3은 인생에서 사라진 시간이나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다.


내가 졸업했던 고등학교는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명문 사립고등학교였다. 학교가 생긴 지 10여 년에 불과하지만, 신흥 명문고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꽤 괜찮은 학교였다. 당시 좋은 학교의 판단 기준을 명문대 합격자 수이다. 신문이나 진학 관련 잡지에 전국 고등학교의 진학률, 명문대 진학 학생 수 등이 모두 공개되었다. 특히 서울 소재의 사립고등학교에서는 한 명이라도 더 명문대에 보내려고 학생의 적성을 무시한 채 대학 진학에만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명문대의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학과에 학생의 의지와 관계없이 입학하도록 지도한다는 의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다. 후에 그 학생들은 자퇴하고 다시 대입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 사람의 인생을 낭비하게 만든 너무나 좋지 않은 사례들이다.


같은 재단에는 여자 중학교, 여자상업고등학교, 외국어고등학교와 야간대학까지 함께 있었다. 선생님들끼리도 서로 이동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 학급에 60명 정도였으며 모두 15개 학급이었다. 따라서 한 학년이 거의 900명에 이르렀다. 워낙 학생 수가 많다 보니 학생들끼리도 서로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2학년부터는 인문계, 자연계로 구분되어 같은 계열끼리만 분반 수업을 했기 때문에 필자의 경우 자연계 아이들은 거의 볼 기회도 없었다. 인문계 아이들끼리나 겨우 안면을 트는 정도였다. 난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말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학교에 가면 거의 말이 없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정도 되어야 간신히 말을 나누는 정도였다. 한번 책상에 앉으면 내 자리에서 거의 일어나는 일이 없었다. 화장실이나 간신히 다녀오는 정도였다. 당연히 친구가 있을 리 없다. 점심시간에는 그래도 두어 명과 함께 도시락을 먹을 정도는 되었는데 소속 학급과 관계없이 별도로 학급을 편성하는 야간 자율학습 전의 저녁 도시락을 함께 먹을만한 친구가 없었다. 나 혼자 먹기도 애매해서 밥을 먹지 못한 적도 있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 아니었다. 그냥 상위권 중에서 중간 정도의 애매한 위치였다. 서울의 명문대학에 갈 만큼 여유롭지는 않고 명문대의 하위 학과에 간신히 갈 정도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험이 끝날 때마다 학교 중앙현관의 큰 게시판에는 상위 1등부터 70등 정도까지의 석차가 공개되었다. 어느 선생님께서 직접 쓰신 석차와 학생 이름, 학급이 커다란 나무 액자 속 종이에 차곡차곡 써져서 게시되었다. 1년 내내 하나씩 게시판이 누적되어 현관을 가득 채워간다. 사실 70등이면 상위 10%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이다. 이곳에 게시된 학생들은 마치 사설 독서실과 같은 시설을 갖춘 학교 내 별도의 학습실에 들어갈 수가 있다. 물론 다음 시험에서는 그 대상자는 바뀐다. 학습실은 ‘의숙(義塾)’이라는 이름을 붙여 학생들로 하여금 특수성과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독서실처럼 개인 책상이 있고 좌석별로 조그만 형광등이 있어 조용히 공부하기에는 좋은 환경이다. 아이들은 70등 안에 드는 것을 목표로 주로 공부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70등 밖으로 밀려난 적은 없지만 30등 안에 들면 또 다른 특별실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 현재에도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전체 학생 수 대비 대학 정원을 보면 당시가 훨씬 더 경쟁률이 높았다. 비단 우리 학교뿐 아니라 전국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침 자율학습이 8시에 시작된 것으로 기억난다. 정규수업, 보충수업을 마치면 5시 무렵이 된다. 그때부터 도시락이나 매점의 음식을 먹고 6시부터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된다. 8시 무렵에 잠시 휴식 시간이 있고 밤 10시 30분에 야간 자율학습이 종료된다. 그 시간이면 수많은 학생이 정문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집으로 가는 학생이 있는 반면, 어떤 학생들은 이어서 사설 독서실로 향한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고도 독서실로 향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견뎌냈을지 참 신기하다. 그렇게 공부해도 실제 대학교에 진학하는 학생 수는 너무나 적었다. 그야말로 ‘입시지옥’이었다.


베이비붐 세대라고 일컬을 만큼 우리들은 대학 진학도 어려웠고 취업도 어려웠다. 사는 게 모두 경쟁이었다. 부모는 끝까지 책임지고 봉양해야 한다는 유교 사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장남에 대한 특별한 의식 또한 그 이전과 거의 비슷했다.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어려서부터 장남(長男)이니까 달라야 한다는 말을 친지들에게 많이 듣고 자랐다. 사춘기가 지날수록 그 현실은 나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내가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하고 동생도 건사해야 한다는 의식은 어려서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어느 순간에는 무거운 책임감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고등학교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으로부터 은연중에 장남의 책임감에 대한 말을 자주 들었었고 그 무거움은 공부에 대한 재미보다는 생존에 대한 목적으로 방향성이 바뀌어갔다. 쉽게 말해 공부는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부담감을 안고 하는 공부는 하기 쉽지 않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입시인데 중압감은 동기유발보다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날 짓눌렀다. 당연히 내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난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힘들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공부에 대한 재미를 다시 느꼈던 것은 대학에 와서였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다른 부담감이 없었기에 너무나 편안했다. 난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찾고자 도서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정말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책을 읽은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부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토록 힘들었던 수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홀가분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의 발목을 잡았던 수학에 대한 부담이 사라진 데다 좋아하는 영어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공부해도 힘든지 몰랐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시절 내가 얼마나 큰 중압감을 안고 공부를 했는지 내가 생각해도 안쓰럽기까지 했다. 난 재수(再修)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결론지었다. 재수(再修)의 중압감은 고등학교 시절보다 훨씬 더 할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내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다음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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