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랑은 느리다.

그리고 소소하다.

by 초예민

내 남편은 느린 사람이다.(나에 비해서) 그래서 늘 답답했다. 대체로 모든 행동이 느리고, 무언가를 다짐한 다음 실행도 늘 연착이다. 그래서 결혼 20년간 갈등도 많았지만, 양쪽 끝에서 동시에 시작된 우리 결혼의 터널 공사는 드디어 희미하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연애 6년 결혼 20년 차의 부부지만 아직 소소하게 기념일을 챙긴다. 다가오는 발렌타인데이를 맞이해 작은 선물을 모올래 준비했다. 고작 세일하는 이월상품이지만 꾸안꾸 스타일을 지향하는(사실 멋을 모르는 남자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고하다.) 남편을 위해 헐찍한 맨투맨 티셔츠 하나를 온라인으로 구매해서 남편 방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 두었다. 퇴근하여 귀가한 남편은 현관 앞에 있는 본인 방을 패싱하고 간단히 손만 씻고 식탁에 앉았다. 모른척하기 조바심이 났지만 스스로 발견하고 서프라이즈해 주기를 기대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내 남편은 생각도, 행동도, 결정도 나무늘보다. 천천히 저녁 만찬을 즐기고 슬로모션으로 자기 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에 어찌나 두근거리던지. 방에 도착해서 전등을 켠 남편의 목소리. “엇, 이게 머야?” 바로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다. 내 입꼬리가 스르륵 나도 모르게 올라간다.


세상에 모든 연인이, 부모가, 또는 애정하는 어느 대상을 위해 기획하고, 결제하고,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가는 이유는 기뻐하며 깜짝 놀라는 그 순간을 목표로 한다. 준비하며 고민하고 또 결제가 아깝지 않은 이유는 이것 한 가지! 사소한 기쁨을 선물하기 위해서다. 9번 불행을 겨우 면해도 한 번 소소하게나마 행복하면 그나마 행복한 삶이 된다.


남편이 내 속도와 다르다고 해서 나는 그 사람을 ‘느리다’라고 정의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속도와의 이질감일 뿐 누가 그 사람을 함부로 ‘느린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너무 주제넘은 생각이다. 내 생각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 아니다. 죽는 날까지 완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끊임없이 맞춰가는 중이다. 이해와 인정이 뒤섞인 조율의 시간이 끝없이 이어진다. 싸우고 대화하고 각성하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예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 남편도 그렇게 나를 대한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내 남편이 대하는 나는 세상 사람들이 보는 같은 시야의 예민한 사람이 아니다. 내 남편에게는 나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 고루 뒤섞여 있다. 그런 감정이 항상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삐쭉 올라와 내게 닿는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어, 이거 나한테는 좀 커 보이는데.”라고 히실히실 웃으면 새 옷을 걸쳐본다. 요래조래 몸을 돌려보며 매무새를 거울에 비춰본다. “입으니까 사이즈도 잘 맞고, 나한테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맘에 들어.”라고 말하며 “땡큐!”라고 한마디 덧붙인다. 저녁상을 치우고 한두 시간 뒤 같이 TV를 보다가 다시 선물 받은 옷 생각이 났는지 “옷 맘에 들어, 고마워.”라고 말하며 뺨에 쪼옥 뽀뽀를 발사한다.


이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


ps. 우리 부부는 천생연분인 듯.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혼동하여 지난달(2월 14일)엔 남편이 나에게 립스틱 선물을 보내왔고 이번 달엔 내가 남편에게 선물을 했다. 이런들 그런들 어떠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