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의 건너편에서 바라본 와룡대(臥龍臺). 안내판에는 ‘용이 서린 곳이라‘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하나, 조선말 강용하(姜龍夏)라는 선비가 쓴 글에 의하면 제갈공명을 기리는 뜻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거대한 암반에는 와룡대와 계원 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지러지는 매미소리가 폭염으로 달구어진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귓전을 파고드는 이 소리가 이명처럼 반복되던 7월 하순에 접어 드는 날 ‘천왕봉로(60번 지방도)’를 따라 함양군의 ‘엄천강’을 찾았다. 뱀사골, 백무동, 칠선계곡 등 맑고 아름다운 지리산의 물길이 모여 흐르는 강이다.
물길의 흐름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데도 ‘용유담’에 이르러 강의 이름이 ‘임천’에서 ‘엄천’으로 바뀌는 것은, 옛적 이 부근에 ‘엄천사’라는 큰 절이 있어 그렇게 불리게 되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그런데 지리산 이야기에 뜬금없이 ‘물길’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자연을 사람의 몸으로 보았을 때, ‘산줄기와 산자락은 뼈와 근육이고, 물줄기는 핏줄과 같아 한 몸을 이룬다’는 옛사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니, 이 점 독자여러분의 이해를 바란다.
얼마 전, 130년 전 엄천강의 풍경을 노래한 ‘화산십이곡(華山十二曲)’이라는 옛글이 발견되고, 번역과 답사까지 이루어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조선 말엽 강용하(姜龍夏), 정환주(鄭煥周)라는 선비들이 주희(朱熹, 朱子)가 지은 산북기행(山北紀行)의 운(韻)을 그대로 사용하여 엄천강 12곳의 풍경을 오언율시로 읊은 것이라 한다.
화산(華山)은 함양군 휴천면에 있는 법화산(法華山)을 일컫는다. 동부 지리산의 북쪽에서 지리산 산줄기를 마주보며 서있다. 엄천강은 이 법화산과 지리산 산자락 사이로 흐른다. 엄천강은 대부분 지리산의 물길이 모여 흐르지만, 옛사람들은 이 강의 진산(鎭山)을 법화산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화산십이곡’으로 일컫는다고 글머리에 밝히고 있다.
12곡은 엄천강이 시작되는 ‘용유담’이 1곡이고, 강을 따라 흐르며 2곡 수잠탄, 3곡 병담, 4곡 와룡대, 5곡 양화대, 6곡 오서, 7곡 한남진, 8곡 독립정, 9곡 사량포, 10곡 칠리탄, 11곡 우계도, 12곡 함허정으로 이어진다. 시작과 끝의 거리는 약 10여Km에 이른다.
함양군 휴천면 문정마을 앞, 엄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송문교’에 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거대한 암반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와룡대(臥龍臺)가 보인다. 안내판이 서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끊어진 옛 다리를 통해 다가갈 수 있다. 안내판에는 ‘용이 서린 듯’해서 이름 지어졌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곳에서 계(契)를 조직하고 글을 남긴 강용하 선생의 글에 의하면, 뜻밖에 ‘삼국지’의 영웅 제갈공명을 기리며 지은 이름이라고 역자는 밝히고 있다.
와룡대 북쪽 바위 면에는 ‘와룡대’와 계원 8명의 각자(刻字)가 선명하고, 암반 중앙 위에는 1985년 그 후손 중의 한 명이 세웠다는 비석이 서있다. 이곳에서 용유담은 약 4Km 거리에 있다.
오래전 와룡대에서 강변의 자갈과 바위지대를 걸어 용유담에 이르는 트레킹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1Km도 채 못가서 깊은 물길을 만나 걸음을 잇지 못하고, 오른쪽 언덕으로 탈출해야만 했었다. 송문교로 되돌아와 다리를 건너 오른쪽 도로로 향했다. 지리산둘레길(4구간 금계마을~동강마을)과 함께 하는 길이다.
도로를 따라 약 1Km 정도 걸으면, 강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온다. 강으로 다가가니 거대한 바위들에 남겨진 세월의 흔적이 경외롭고, 짙푸른 소와 우레 같은 소리를 내는 여울이 반복되며 엄천강의 얼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저녁 무렵, 강의 하류를 향해 차를 달려 엄천교에 섰다. 엄천강을 가로지르며 남호리와 동강마을을 잇는 다리이다. 9곡 ‘사량포’가 동강마을 쪽 강안 어딘가 있었다고 한다. 강의 상류가 용이 서린 신령스런 곳이라면 이곳은 사람의 강이다. 수심이 낮고 물의 흐름이 비교적 느린 강에는 저무는 햇살에 다슬기를 잡는 사람들로 뜻밖의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해질 무렵 엄천강에서 다슬기를 잡는 사람들
언젠가 엄천강의 노래를 잇는 길이 온전히 이어지길 기대하며, 화산십이곡의 번역과 답사자료를 제공해 주신 ‘이재구’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201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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