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모정 아래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입구에 있는 명창 권삼득 선생 유적비
때 아닌 추위와 비바람이 차례로 지나간 4월도 하순에 접어들자 지리산자락은 연록의 숲으로 눈부시다. 수달래가 피어난 계곡은 우렁찬 물소리와 어우러지며 봄의 기운이 넘쳐흐른다. 지리산 서북능선 고리봉, 정령치, 만복대 등에서 발원한 물이 모여든 구룡계곡은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지리산의 첫 번째 물길이다. 예로부터 ‘으뜸가는 하천’이라는 의미로 ‘원천(元川)‘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곳은 행정구역통폐합(1914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상류지역은 상원천면, 하류지역은 하원천면으로 불리어왔다.
육모정에서 계곡 상류 구룡폭포에 이르는 구룡계곡 탐방로는 약 3km 거리로, 왕복 3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짧은 코스이지만 수려한 풍광을 지니고 있고, 용호구곡(龍湖九曲)을 이루는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서려있어 사계절 내내 트레킹하기 좋은 곳이다. 그런데 육모정 아래 약 1km 지점에 있는 호경삼거리에서 걷기 시작하면 뜻밖의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호경삼거리는 지리산둘레길 주천탐방지원센터(외평마을)에서 약 300m 거리에 있다. 호경삼거리에서 도보답사를 위해 잘 조성해놓은 인도를 따라 걷다보면 호경마을이 나오는데, 이 길에서 누석단과 짐대, 석장승, 그리고 조선중기 청백리로 이름난 옥계(玉溪) 노진(盧禛)선생(1518~1578년)의 별묘(別廟)를 차례로 만나게 된다. 누석단이라는 돌을 쌓고 그 위에 짐대를 세운 것은, 배의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마을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또 돛대 역할을 하게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짐대 위의 오리 세 마리는 마을에 복을 물고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중 한 마리는 날아가 버리고 지금은 두 마리만 짐대를 지키고 있다. 남악대장군이라는 이름의 석장승은 마을의 인재와 재물이 빠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외부의 악귀와 질병을 막아 마을과 지리산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경남 함양 태생인 옥계 노진선생은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육모정에서 계곡 방향 반석으로 내려서면 거대한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이 굉음을 내며 소(沼)를 이루는 용소를 만난다. 용소 위,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입구에는 조선 정조~순조 시대에 활약한 판소리 8명창 중의 한 분인 권삼득 선생의 유적비가 서있다. 전북 완주의 양반가 출신으로 소리꾼이 되어 집안에서 쫓겨난 그이는 외가가 있는 남원으로 와서 용소에서 소리공부를 했다고 한다. 콩 서 말을 지고 와서, 소리 한바탕하고 콩 한 알을 용소에 던져 넣으며, 콩 서 말이 다 비워질 때까지 수련을 한 끝에 득음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구룡계곡은 판소리의 고장이자 동편제의 탯자리로 일컬어지는 남원으로서는 상징성이 매우 큰 곳이다. 남원 출신의 명창들은 대부분 용소와 구룡폭포에서 소리공부를 하였고, 특히 구룡폭포는 동편제의 비조라 할 수 있는 가왕 송흥록이 득음한 장소로 전해지며, 그 후 송만갑, 박초월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도 이곳에서 득음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구룡계곡길은 ‘소리길’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용호구곡 제6곡 '지주대' 앞 구룡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용소 바로 위에 있는 정자 용호정에 올라 길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계곡 옆 소나무 예닐곱 그루가 서있는 곳에 담을 쌓아놓은 곳이 보인다. ‘송력동’이라는 곳이다. 담 뒤쪽 산자락으로 작은 계곡이 있는데, 이곳은 음기가 세어 마을 아녀자들이 바람이 난다하여, 그 기운을 막기 위해 돌로 담을 쌓아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으로 나있는 산길은 순환코스로 20분 정도 따라 걸으면 힘들지 않게 다시 육모정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
▲구룡폭포. 10월 초의 모습이다.
용호구곡을 이루는 구룡계곡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구곡(九曲)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구룡폭포’는 제9곡으로 남원8경의 으뜸가는 제1경이다. 폭포 옆으로 올라서면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이라는 글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수달래가 피어있는 아름다운 계곡, 판소리의 절절한 울림이 서려있는 ‘소리길’ 구룡계곡에 하염없이 빠져들고 싶은 계절이다. [2018.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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