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현장, 우리 역사의 타임캡슐
남하하던 백두대간 마루금이 여원재를 지나 정령치 인근 고리봉에 닿으면, 그 유장한 흐름을 지리산이 이어받게 된다. 그런데 천왕봉을 향해 달리던 백두대간 지리산 산줄기가 만복대 이르기 직전, 서쪽으로 또 하나의 마루금이 슬그머니 가지를 친다. 이른바 ‘견두지맥’이다.
현재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의 경계를 이루는 이 산줄기는 예전 남원부 관내의 주천방과 산동방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숙성치는 이 산줄기 상에 있는 고개이다. 숙성령으로 부르기도 한 이 고개는 신증동국여지승람(16세기)과 용성지(18세기)에 “숙성현(宿星峴) 부(府:남원부를 말한다)의 동남쪽 30리에 있다”라는 동일한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다. 지금은 고개를 넘나들던 길은 사라지고, 능선의 산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만 덩그러니 서있다.
▲숙성치 이정표
1611년 지리산 유람을 마치고 임지인 남원부 관아로 귀로에 올랐던 남원부사 유몽인이 이 고개를 넘었고(肅星嶺), 1618년 쌍계사 일원의 유람을 마치고 남원으로 돌아오던 조위한도 지리산 유산기에 그 이름을 남기고(肅星峙) 있다. 특히 고전소설 『최척전』의 저자로 잘 알려진 조위한은 숙성치를 비롯한 견두지맥 상의 고개들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구례를) 새벽에 출발하여 중방리를 거쳐 성원(星院) 정랑 최유장의 우거(寓居)에 들어갔다. 시냇가 돌 위에 앉으니 주인이 술상을 차려와 오래도록 담소하다가 시를 지어 그에게 주었다. 현주는 먼저 숙성치(肅星峙)를 넘어 남원으로 가고 양자발은 율치(栗峙)를 넘어 술산(述山)으로 돌아갔다. 나는 방군과 함께 둔산령을 넘어 저물녘에 말을 달려 월파헌에 이르러 묵었다.”
즉 지리산을 함께 유람했던 일행 중, 삼도토포사로 임명되어 남쪽 지방으로 내려왔던 그의 동생 조찬환(현주)은 남원관아로 가기 위해 숙성치로 향하였고, 지금의 노암동(술산) 근처에 살고 있던 양형우(자발)는 율치로 향하였는데, 율치는 바로 오늘날 밤재로 부르는 고개이다. 용성지에는 남율치(南栗峙)로 나오는 이 고개는 현재 남원에서는 앞밤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조위한과 방원량(방군)은 둔산치를 넘어 수지를 거쳐 지금의 주생면 제천리 요천 변에 있었던 월파헌(월파정)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고개들은 조위한 일행이 지나가기 전 불과 20여 년 전만해도 임진왜란의 전장으로서 긴장감이 팽팽하게 서려있던 곳이다.
남원출신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는 2차진주성전투(1593년 6.22~29)와 남원성전투(1597년 8월) 당시 이 고개들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조명연합군과 왜군들의 움직임이 상세하게 나온다.
“(1593년 7월) 7일 적병 수천 명이 산동촌을 분탕질하고 숙성령으로 향하니...송대빈이 마병(馬兵) 3백여 명을 숲에 매복시켰다가 스스로 천여 명을 거느리고 숙성령 위에서 막으니 적병이 물러가 마침내 둔산령을 넘어 수지 등 촌락을 분탕질하였다.”
왜군의 진주성 공격을 앞두고 강화협상 기간 중에 공격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명나라 심유경의 항의에 대해, 소서행장은 관백의 명령이니 진주성만 함락하고 물러나겠다고 하였지만, 진주성을 함락한 후 당초 약속과는 달리 하동과 구례에 차례로 진출한 후 남원까지 엿보며 대치하는 상황이 이 고개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로부터 4년 후인 정유재란 때에 남원성을 향해 물밀 듯 쳐들어오는 왜군들의 모습과 이를 방어하기 위해 움직이는 조명연합군의 모습도 다음과 같이 나온다.
▲숙성치 가는 길목에 있는 류익경 효자비각. 이 비각도 정유재란 때에 불탔는데,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지리산둘레길과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가 지나간다.
“(1597년 8월) 7일 적병이 구례에 들어왔다. 양원이 성중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원천으로 향하는데, 정기원‧임현이 따랐다. 숙성령에 이르러 군사를 사열하고 돌아왔는데, 이날 밤에 성중에 있던 우리 군사는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11일 오후에 흉악한 적이 숙성령(宿星嶺)을 넘어서 혹은 10여 명 혹은 20여 명씩 끊임없이 잇따라 내려와 원천(原川)의 촌락을 정탐하고, 밤에는 성 밑에 들어와서 엿보고 돌아갔다.”
이처럼 숙성치는 한반도를 뒤흔든 참혹한 전란의 상황을 생생하게 목도한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역사인물이 구례-산동-남원을 잇는 노정 상에 있던 ‘성원’이라는 곳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서산대사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의 고승 청허휴정은 15세 때에 하동 의신마을 원통암에서 불교에 입문한 후, 3년 뒤에 정식으로 승려가 되어 인근의 여러 암자에서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대사가 23세 무렵이던 1542년 경 어느 날 남원(용성)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 성촌星村을 지날 즈음에 한낮의 닭소리를 듣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서산대사가 지은 시의 제목이 “봉성을 지나며 한낮의 닭소리를 듣고 2수(過鳳城聞午雞二)”이다. 즉 구례(봉성)을 지나 남원으로 가던 도중에 성촌을 지났다는 것이다. 또 대사는 “용성 김 악사를 만나 성원에서 묵다(遇龍城金樂士宿星院)”라는 시에서도 남원에서 숙성치를 넘어온 김 악사와의 동선이 성원에 머물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성촌‧성원이라는 이름은 숙성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불렸던 이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조위한이 성원에 머물 때, ‘시냇가 돌 위에 앉아 차려주는 술상을 받았다’라는 풍경묘사로 보아, 성원은 비교적 큰 하천이 지나가는 지금의 산동면사무소가 있는 원촌마을이었고, 이곳 어딘가에 성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공무상의 일을 보기 위해서는 대부분 숙성치를 넘었던 것으로 보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기 위해 순천에 머물던 도원수 권율을 만나러 남원에서 구례로 향할 때에도 숙성치와 이 마을을 지나갔을 것이다.
▲위 사진 : 견두지맥 상의 880.9고지. 사진 아래 : 880.9고지와 서쪽 솔봉 사이의 안부
필자는 추석연휴 첫날 주천면 안용궁마을을 출발하여 숙성치가 있는 능선에 이른 후, 880m(국사봉으로 부르는 듯하다) 봉우리까지 진행하였다가 되돌아 나오며, 이 산줄기의 고개들을 살펴보았다. 고도를 겨우 400여m 오르는 길에서 산길을 차지하고 있는 찔레나무와 키 낮은 나무에 엄청 시달렸고, 웃자란 초목으로 길이 희미한 능선에서는 수차례 길을 놓치기도 하였다. 지리산국립공원 경계지점인 솔재를 지나 숙성치에 도착하였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과 군마, 그리고 우마차가 지나갔을 길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이 좁고 막혀있어 막힌 길만큼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그 다음 ‘앞밤재 순환길’로 소개되어 있는 ‘가마바위고개’ 안부에서 남원 방향으로 내려섰다. ‘숙성골 0.1km' 이정표가 서있는 고개 부근은 비교적 길 정비가 잘 되어 있었지만, 30여m 쯤 내려서자마자 마치 튕겨내기라도 할 듯 빽빽이 들어서서 길을 막고 있는 나무들 때문에 결국 길을 되돌아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야만 했다.
▲솔재. 지리산국립공원지역과 경계로, 숙성치 동쪽 만복대 방향 1.3km 지점에 있다.
▲가마바위 고개. 숙성골 방향 30여m 아래로 내려가니 잡목이 길을 막아 진행할 수가 없었다.
▲밤재. 견두지맥 산줄기와 지리산둘레길이 교차하는 고개이다.
어둠이 산자락에 깔릴 무렵 겨우 밤재에 도착하여 지친 몸을 눕히자, 오래전 ‘여원재 옛길’ 복원을 시도할 때 되뇌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길을 버렸고, 길은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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