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호 양경우의 지리산 유람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초교 왕성분교장 앞에 있는 푸조나무, 고운 최치원이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1618년 음력 윤4월 15일, 장성현감 제호 양경우(1568~1638)는 전라감사로부터 남해안 연안 각 군현에 소속된 노비의 등록사항을 조사하라는 임무(續案)를 받고 한 달 여에 걸친 출장길에 오른다. 나주, 영암, 해남을 거쳐 진도로 간 뒤, 다시 육지로 돌아와 해남에서 강진-장흥-보성–흥양(고흥)-낙안-순천-광양으로 이어지는 노정이다. 전라우수영의 여러 고을과 전라좌수영 관할의 다섯 군현(五官)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5월 8일 광양에서 공무상 업무를 마친 제호는 귀로에 잠시 짬을 내어, 두치에서 섬진강을 건너 악양-화개로 이어지는 지리산 유람에 나선다. 5월 19일에 다시 장성에 귀임하는 왕복 30여 일간의 출장기간 중 유람기간은 고작 2박3일, 하지만 이 유람록의 제목이 「연해의 군현을 모두 돌아보고 두류산에 들어가 쌍계사와 신흥사를 구경한 기행록(歷盡沿海郡縣 仍入頭流 賞雙溪神興紀行錄)」이라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이 유람이 남다른 의미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호는 2달 전 늦봄 어느 날, 삼도토포사 임무 차 고창에 들른 절친 현주 조찬환(1572~1631)과 만나, 현주의 형인 현곡 조위한(1567~1649) 등과 더불어 4월 중순 지리산 유람을 약속하였지만, 정작 그는 감사로부터 휴가 승낙을 받지 못해 동행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람을 다녀온 지인들은 어느새 그들이 수창한 시축(詩軸)까지 보내와 더욱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다. 그런데 뜻밖의 출장 명령이 지리산과 가까운 광양으로 이어지자, 귀로에 짬을 내어 현곡 일행이 다녀간 노정대로 지리산 유람을 하고, 자신이 지은 시도 시축에 넣자고 한 것이다.
따라서 제호는 현곡 일행이 다녀간 쌍계사-불일폭포-신흥사 노정을 따르며, 곳곳에서 만난 풍경에 대해 차운(次韻)하여 시를 남기거나, 자신의 느낌을 담은 경물묘사를 유람록에 남기고 있다. 특히 불일폭포를 만났을 때는 ‘마치 긴 무지개가 고개를 숙이고 물을 마시는 듯, 비단 띠가 허공에 드리운 듯하다’라는 묘사로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쌍계사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들렀던 신흥사에서는 당대의 고승 벽암각성(1575~1660)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벽암각성은 임진왜란 때에 불탄 신흥사를 중창하였고, 1615년 입적한 스승 부휴선수대사의 법을 잇고 이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날 벽암각성은 절집 앞 계곡 물가에 마중 나와 있다가 친구처럼 제호를 반갑게 맞이했다고 한다. 이때 계곡을 건너는 외나무다리의 이름을 ‘홍류교’라 하는 것에 대해 제호가 의아해하자, 벽암각성은 옛날 시내에 5칸의 뜬 누각이 다리에 걸쳐져 있었는데, 병화에 불타버린 후 아직 중건하지 못했지만 다리의 이름은 그대로 부른다며 아쉬워한다.
이 다리와 누각의 풍경은 법맥(法脈) 상으로 벽암각성의 백부(伯父)가 되는 청허휴정, 즉 서산대사가 1564년에 지은 ‘두류산 신흥사 능파각기’에, 절집 앞에 계곡을 가로지르며 있었던 홍류(紅流)라는 이름의 다리와 능파(凌波)라는 이름의 누각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었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화엄사에 주석하다 입적한 벽암각성은 화엄사, 쌍계사 등 지리산의 절집은 물론, 법주사, 해인사 등 당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거찰들의 중창불사를 주도하였고,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조선후기 불교 중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날 제호는 절집을 둘러본 후 각성과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귀로에 오르는데, 글의 말미에 지금까지의 유람 감흥과는 다른 뜻밖의 속내를 비치고 있다.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앞 계곡. 옛 신흥사 절터는 범왕분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옛 사람들의 묘사로 보아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홍류교와 다리 위에 걸쳐있었다고 하는 누각인 능파각은 이 곳 어디쯤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전경. 옛 신흥사 절터로 알려져 있다.
남원 출신의 제호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접반사의 제술관으로 세 차례나 불려갈 정도로 탁월한 문재(文才)로 명성이 자자했고, 부친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동 공로도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대과에 급제까지 하였지만 서자라는 신분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늘 변방의 작은 고을수령을 전전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광해군 대의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은 그를 더욱 무력감에 빠져들게 했을 것이다. 가깝게 지내던 현곡이 귀거래사를 읊으며 그리했던 것처럼, 지천명에 이른 제호 역시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을 스스로를 다스리고 위무하는 공간으로 삼아 살아가겠다는 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4월 중순, 한바탕 꽃비가 내리고 연록의 옷으로 갈아입은 화개 산자락의 모습은 생명력이 넘쳐난다. 이러한 숲과 하늘을 품은 옛 신흥사 절터 앞 계곡에서, 헤어지기 아쉬워 몇 차례나 뒤돌아보며 동구 밖을 향하는 시인과 먼발치에서 배웅하는 선승의 모습을 그려본다. 암울했던 주변상황을 떨쳐내고 오롯이 자신만의 삶을 일구며 살다간 옛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2022.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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