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담 정시한 『산중일기』에 담긴 17세기 지리산 불교 현장
▲함양군청 앞 '학사루'. 우담 정시한은 1686년 3월 강원도 원주를 출발하여 음력 4월 11일 사근역(현 함양 수동초교)을 거쳐 함양 읍내로 들어섰다.
『산중일기』의 저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은 1625년(인조 3) 서울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부친(정언황)을 따라 원주로 거주지를 옮긴 후, 대부분 이곳에서 생활을 하다가 1707년(숙종 33) 83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우담의 본관은 나주(압해정씨)로 조부를 제외하고는 조상들이 모두 당상관 이상의 높은 관직을 역임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우담은 출사를 포기하고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문음(門蔭)으로 여러 번 관직에 추천되었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청장년기는 오로지 부모를 봉양하며 효행으로도 이름이 높았고, 직접 농사일을 관리하면서 실천적 삶을 살아왔다. 또한 퇴계 이황을 사숙하며 학문정진에 매진하여 도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우담의 이러한 삶에 대해 방계 후손인 다산 정약용은 ‘우뚝하여 산악과 높이를 가지런히 하며 빛나, 일월과 빛을 다툰다.’라는 글로 극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담은 부친과 모친이 차례로 작고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에 산사에서의 독서를 통한 학문연구에 매진할 뜻을 세운다. 그리고 62세 때인 1686년 3월 원주의 집을 출발하여 여행에 나서며 실행에 옮긴다. 1649년 부친이 안동부사에서 파직되어 원주 법천에 머물 때에도 논어 1부를 가지고 산사를 왕래하며 10여 년 동안 읽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청년기에도 오랫동안 산사에서 독서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담이 지리산 산중암자에서 독서하던 『근사록』, 『심경』, 『주자서절요』 등은 그가 청장년 시절에도 반복해서 읽었던 책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담의 산사순례는 단순한 유람이 아니라, 독서를 통해 자신의 학문을 정립하려는데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중일기』는 우담이 전국을 여행하며 산중암자에 머물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매일의 생활을 기록한 책으로, 상하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권의 내용은 그 일정에 따라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를 감안하면 모두 4차례의 여정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1차 여정(1686년 3월 13일~1687년 1월 22일)에 지리산 권역에서 머문 내용이 들어있다.
『산중일기』에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길 때마다 ‘리里’와 ‘보步’ 등 거리 단위를 사용하여 이동 거리를 기록하였고, 산중암자와 주변의 자연세계는 물론, 그곳에서 만난 승려들의 모습까지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산중일기』는 ‘사찰사’를 비롯한 불교사에 있어 귀중한 사료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우담은 원주의 집을 출발한 후 속리산을 거쳐 남행하여, 가야산의 사암들을 들른 뒤 함양에 도착하였다. 사근역(현재 수동초교 자리)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고는, 읍내 서쪽 ‘서원마을’에 살고 있는 김후달의 집으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1686년 음력 4월 11일 저녁 무렵의 일이다. 그리고 우담은 이날의 일기 말미에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이곳의 고을수령을 하였기 때문에 이 서원이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라는 글을 남기며 백연서원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함양으로 들어온 첫날, 우담은 함양군수 심도명의 방문을 받고 함께 잠을 자게 된다. 그런데 이 날 ‘기쁘고 꿈속의 일처럼 좋아서 할 말을 잊었다’라는 뜻밖의 소회를 남기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심도명의 본명은 심철(沈轍)이며, 도명은 그의 자(字)이다. 그의 사위가 바로 24년 전, 23세의 나이로 요절한 우담의 맏아들 정도원이다. ‘꿈속의 일처럼 기쁜 일’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이 글의 행간에는 ‘전도유망한 아들이자 사위인 청년의 죽음’,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이자 딸’이라는 안타까운 사연을 품고 살아온 사돈 간의 애틋한 마음이 서려있다.
함양에서 이틀을 더 머문 우담은 읍치를 출발하며 장장 170여 일에 이르는 지리산 사암(寺庵) 순례 대장정에 나선다. 순례 첫날 우담은 안양암(법화사의 옛 이름)에서 하루를 머물고는 용유담을 거쳐 군자사에 도착하였다. 이 노정에 대해서는 본 지면 ‘용유담 이야기’(2018년 8월)로 소개한 바 있다.
우담은 군자사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본격적인 절집 방문을 시작한다. 사전 기별이 있었던지 주능선 쪽이 아닌 하천(임천)을 건너 안국사와 금대암을 먼저 들러 3일을 머물고는, 다시 임천을 건너 곧장 삼정산(중북부능선) 자락으로 올라선다. 두타암-무량굴-상무주암으로 이어지는 노정이다. ‘벼랑에 걸려 있는 바위지대’를 힘들게 올라 동대(東臺)에 도착한 우담은 드디어 저 멀리 웅장하게 솟아있는 천왕봉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기괴하여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다’라는 소감과 함께, 지금도 여전히 감로수가 솟아나오는 샘(石井석정)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는 ‘절터는 만 길 높은 곳에 있지만, 평온하고 남향이라서 정말로 명당이라 할 만하다’며 상무주암에서 여름을 나고 싶다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우담이 산사순례를 하며 ①상무주암에서 산중생활을 시작한 후, 한 달 남짓 지내다가 칠불암으로 이동하는 노정, ②칠불암에서 금류동암에 도착하여 115일간 머물던 산중생활, ③연곡사로 내려선 후 쌍계사와 불일암에서 지낸 4일간, 그리고 ④화엄사에서 머물던 내용에 대해서는 필자의 아래 기사를 참고 바란다.
‘쌍계사’(2017년 11월), ‘연곡사’(2018년 1월), ‘불무장등’(2019년 3월), ‘실상사’(2020년 12월), ‘불일폭포’(2021년 3월), ‘화엄사’(2021년 10월)
이러한 과정에서 눈여겨볼 내용은 우담이 도솔암(함양 마천)을 출발하여 반야봉을 등정한 후 칠불암에 이르는 힘든 노정에, ‘석겸’과 ‘사철’이라는 승려가 동행하는 것이다. ‘석겸’은 우담이 ‘노장’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서로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짐작된다. 고된 일정 끝에 금류동암에 도착한 날, 우담은 ‘인품이 믿을만하고 착실하여 진실한 마음이 곳곳에 보인다. 손수 식사를 만들어 주는데, 마치 친구를 대하는 듯한 정이 느껴진다.’라며 석겸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이렇듯 우담의 사찰순례에 동행한 승려는 단순한 길 안내를 하는 승려(지로승)가 아니라, 서로 마음이 통하는 동반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2년 후, 60대 중반의 우담이 꽤 먼 거리에 있는 경남 양산 원효산의 불지암을 찾아가, 그곳에 머물고 있던 석겸과 사철 두 승려와 재회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신분과 종교를 초월하여, 도학자와 승려가 교류하며 소통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 하겠다.
▲화엄사 효대. 석탑 뒤에 보이는 건물에는 ‘견성전’이라는 연혁의 안내판이 있는데, 홈페이지에 탑전(塔殿)으로 소개하고 있다. 1487년 이곳을 들른 추강 남효온 역시 ‘탑전’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1686년 들른 우담 정시한은 ‘부도암(浮屠庵)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는 언덕 일대를 오래전부터 효대로 불러왔다.
▲운봉 황산대첩비지. 1686년 우담이 '비전의 승장실에서 점심을 해먹었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당시 황산대첩비의 관리를 승려들이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순례 막바지 화엄사를 출발한 우담은 남원부의 산동 운주원-숙성치-응령역-여원재를 거쳐 운봉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황산대첩비에 있는 비전(碑殿)의 승장실에서 점심을 먹은 후 실상사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남기는데, 이 내용에서 당시 비전 관리를 승려들이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월 24일 실상사에서 하룻밤을 머문 우담은 다시 함양 마천의 산자락으로 올라 천인암-상무주암 등에서 여러 승려들과 만나며 머물다가, 9월 3일 금대암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나흘간을 머무는데, 안국사 동암에 주석하던 문옥(文玉)이라는 수좌승과 매일 만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옥이라는 승려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나, 안국사의 불서간행에 ‘증명’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법력이 높은 승려임을 알 수 있다. 9월 7일 우담은 드디어 오도재를 넘어 함양 읍내 김후달의 집에 다시 도착한다. 170일에 걸친 우담의 기나긴 지리산 절집 순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20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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