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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섭 May 26. 2021

어우 유몽인의 지리산 유람②

조용섭의 지리산 이야기  남원 백장암~뱀사골

[뱀사골 풍경. 410년 전 어우 유몽인이 머물던 풍경이 그대로 오버랩되는 곳이다]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49>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지리산 유람②     


1611년 3월 29일(음), 아침 일찍 남원 목동마을을 출발한 남원부사 유몽인 일행은 오후에 백장사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이날 유몽인은 절의 위쪽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지리산의 참모습을 구경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백장암 경내에서는 지리산이 보이지 않는다. 서남쪽으로 시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당시 백장사는 120여년 가까이 폐사상태에 있던 실상사를 대신하여 본사 역할을 하고 있었을 터라 절집 규모가 현재 백장암 사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꽤 넓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몽인은 현재의 해우소 뒤편 능선 너머 어딘가에 동남쪽을 향하고 있는 암자에서 장쾌한 마루금을 이루고 있는 지리산 풍경을 만났을 것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데 본격적인 지리산 탐승이 시작되는 다음날 노정에서 유몽인 일행은 당시 천왕봉 등정의 주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인근의 백무동으로 바로 가지 않고 황계(黃溪) 하류로 향하였다. 유람 동선과 폭포, ‘벽력이 번갈아 치는 듯하다’라는 계곡 묘사를 볼 때, 황계는 지금의 만수천을 일컫는듯하다. 현재 만수천 하류에 위치한 산내면 삼화마을에는 거대한 암반 사이로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흐르는 물길이 여전하다. 하천 옆에 직립한 거대한 바위에는 후대 사람들이 지은 이름인 ‘소동폭포(蘇東瀑布)’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유몽인이 황계폭포로 일컬은 곳일 가능성이 크다. ‘황계’라는 이름은 만수천 상류인 달궁계곡 위 어딘가에서 이 물길의 시원을 이루고 있는 ‘황령(黃嶺)’에서 연유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지리산향토사를 공부하며 이번 답사에 동행한 ‘신강’님은 1959년 ‘사라호 태풍’ 때에 폭포를 떠받치고 있던 바위가 붕괴되어, 소동폭포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였다는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소동폭포.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폭포를 떠받치던 바위가 무너져 내려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다]


[바위 중앙에 소동폭포(蘇東瀑布)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유몽인 일행은 황계폭포를 출발하여 뱀사골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룡암이라는 암자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머문다. 이 유람노정에는 현재의 지명과 일치하는 곳이 없어 확실한 동선을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소동폭포가 있는 곳에서 만수천 동쪽(왼쪽)으로 옛길이 있었고, 이 길은 내령마을과 횡치(빗기재)마을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유몽인은 유람록(유두류산록)에 ‘영대촌(嬴代村)’, ‘환희령’, ‘내원(內院)’, ‘와곡(臥谷)’ 등의 지명과 풍경묘사를 남기고 있어 어렴풋이나마 길에 대한 동선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천왕봉을 등정하기까지의 유몽인의 지리산 유람은 현재 내령마을 인근 ‘도탄(桃灘)’에 은거하고 있다가 1580년 봄에 지리산 유람에 나선 도탄 변사정(1529~1596)의 노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유람록에서 변사정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으나 도탄 즈음에 이르렀을 때, ‘골짜기에 두세 집이 있는데 영대촌(嬴代村)이라 하였다’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영대촌은 진(秦)나라 왕족의 성(姓)을 딴 마을이름으로,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사람들이 숨어살던 무릉도원을 일컫는다. 이곳 물길의 이름이자 변사정의 호(號)인 도탄 역시 ‘복숭아꽃 흐르는 여울’로 해석할 수 있으니, 임진왜란이라는 국란을 함께 겪었던 의병장 변사정을 회고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내령은 신선바위(영대靈臺)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령(內靈)으로 표기되고 있다.  

 

유몽인 일행은 영대촌을 지나 높은 언덕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협곡을 오른 뒤, 흑담을 거쳐 내원(內院)에 도착하였다. 이 길에서 올랐던 고개가 유몽인과 변사정이 언급한 ‘환희령’으로 짐작된다. 현재 뱀사골로 오고가는 ‘지리산로’ 도로가 아닌, 만수천 건너편 산자락 ‘빗기재(횡치)마을’로 넘나드는 옛길에 마을사람들이 ‘큰고개’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동선 상으로 환희령과 비슷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몽인 일행이 도착한 내원에서는 ‘두 줄기 시냇물이 합치는 곳에 절집이 있었다’라고 하여 길의 단서를 남기고 있다. 뱀사골과 달궁계곡 두 물길이 합수하는 곳, 옛 절터 흔적이 있었다는 현재 뱀사골전적기념관 있는 곳의 위치와 정확히 겹쳐지는 것이다. 유몽인 일행은 내원에서 뱀사골 방향인 ‘동쪽 시내’를 따라 올라 정룡암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대암으로 추정되는 바위]


[뱀사골 풍경.  ‘시퍼렇게 보이는 깊은 못(潭)이 있었지만 겁이나 내려다볼 수 없었다’라는 유몽인의 표현처럼, 암반 왼쪽 아래 계곡으로 눈이 시릴 정도로 시퍼런 물빛을 이루는 못이 있고, 정면 계곡 위 오른쪽에는 대암((臺巖)으로 추정되는 큰 바위가 서있다]


5월 하순이 시작될 무렵, 유몽인 일행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뱀사골로 들어섰다. 매점 입구에서 계곡 탐방로로 내려서서 오른쪽으로 잠시 향하면 거대한 암반,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에 옥빛 못을 이루는 곳이 있다. 계곡 위 오른쪽으로는 거대한 바위도 서있다. ‘시퍼렇게 보이는 깊은 못(潭)이 있었지만 겁이나 내려다볼 수 없었다’라는 유몽인의 표현처럼, 암반 왼쪽 아래 계곡으로 눈이 시릴 정도로 시퍼런 물빛을 이루는 못을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유몽인 일행이 머물렀을 정룡암, 대를 이루는 큰 바위인 대암(臺巖), 그리고 가사어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졌다는 깊고 시퍼런 물빛의 풍경이 그대로 오버랩된다.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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