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지식인 님효온, 지리산 유람 걸음걸음 희망을 싣다
[화엄사 산내암자인 봉천암((鳳泉菴). 화엄사는 신라시대부터 팔원(八院)과 81암자로 이루어진 큰 절집이었는데, 그 팔원 중에 봉천원(奉天院)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화엄사에는 한자 이름이 다른 봉천암(鳳泉菴)이 구층암 안쪽에 있다.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 일과」에 보면 화엄사 승려들이나 추강이 화엄사에서 봉천사를 쉽게 다녀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대웅전 뒤에 있는 현재의 ‘구층암-봉천암 사역’이 추강이 머물렀던 ‘봉천사’로 추정된다는 의견에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얼마 전, 조선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록’ 자료를 정리하다가 마음에 닿는 글을 만났다. 「지리산일과」라는 글을 남긴 추강 남효온(1454~1492)의 지리산 유람과 관련된 내용이다. 생육신, 방외인 등의 수식어가 그러하듯, 순탄치 않은 삶을 살다가 39세의 나이로 요절한 추강의 지리산 유람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유람노정과 더불어 문집 편찬 시 별도로 떼어놓은 시문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인 추강은 25세 때인 1478년(성종9)에 올린 상소 중, 소릉(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능) 복위 내용이 문제가 되어 당시 훈구파 대신들로부터 ‘미친 선비’로 지목되며 제도권 정치에서 배척당하였다. 그 후 추강은 출사를 포기하고 노장사상에 심취하는가 하면, 유랑을 하며 불우한 삶을 이어가는데 그런 그가 1487년 9월 하순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섰다. 병을 앓던 둘째 아들이 사망한 이듬해 늦가을, 세상을 등진 고독한 지식인의 지리산 산행이 시작된 것이다.
추강은 1487년 9월 27일(양력 10월 13일) 진주 여사등촌이라는 곳을 출발하여 단속사-덕산사(현재 산청군) 등을 거쳐 9월 30일 천왕봉에 올랐다. 그런데 추강은 힘들게 오른 정상에서 그의 스승 점필재나 도반인 탁영 김일손이 한껏 고양된 모습으로 천왕봉 등정의 글을 남긴 것과는 달리, ‘유천왕봉’이라는 시 말미에 ‘정상에 오르니 더욱 처참하다’라는 내용으로 자괴감에 빠져 있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어떠한 이룸도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며 깊은 회한에 젖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추강은 주능선을 따라 이동하여 영신봉 인근의 빈발암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영신암-의신암을 거쳐 산을 내려와 칠불사로 이동하여 여장을 푼다. 60리 길, 만만찮은 힘든 산행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칠불사를 출발하여 주능선 화개재로 올라선 후, 반야봉 아래 뱀사골 상단 어딘 가에 있었을 초막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두 차례나 길을 잃으며 ‘연동골’로 올랐을 이 노정에서는 ‘발이 부르터서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라며 고단했을 산행 모습을 전하고 있다. 추강은 다음날 이곳의 움막에서 기거하던 설근, 덕산사에서부터 동행한 의문(義文) 두 승려와 함께 반야봉을 오른 후, 사방을 조망하며 곳곳의 봉우리들을 짚어보고는 다시 움막으로 돌아와 하루를 더 머문다.
드디어 10월 5일, 설근과 작별한 추강은 연령(淵嶺 임걸령)과 고모당(노고단)을 지나,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서서 봉천사(奉天寺)에 이르렀다. 오늘날 주능선에서 화엄사로 하산하는 코스를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6년 전(1481년) 송악산을 유람할 때 개성(開城)의 감로사에서 만났던 육공(六空)이라는 승려와 재회하게 된다.
[봉천암 인근의 구층암 천불보전. 왼쪽 구층암에는 죽은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후 추강은 봉천사에서 3일 동안 머물며 그를 찾아온 최충성, 김건 두 선비에게 성리학을 강론하는가 하면 황둔사(화엄사) 구경도 다녀온다. 이때 절 뒤에 있던 금당, 금당 뒤의 탑전, 그리고 탑전을 에워싸고 있던 차나무와 석류나무 등의 풍경을 전하고 있으며, 특히 이곳 뜰 가운데에 있던 석탑(사사자삼층석탑. 효대)의 유래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법주 설응’, ‘비물선사’ 등 ‘화엄사 연혁’에 등장하는 고승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며, 절집의 오래 전 역사를 증거하고 있기도 하다.
[사사자삼층석탑 보수 안내문. 금년 말까지 계획되어 있다]
추강은 봉천사 도착 다음날 비 때문에 출발하지 못하고 머물 때, 아래의 시를 지어 누각 창에 적었다.
이 늙은이 서른에 선비들을 떠나오니
구월의 두류산은 비단 숲이 되었구나
비바람 비껴 쳐서 누각 밖이 요란하고
시냇물 대밭 뚫어 난간 앞이 졸졸대네
서리가 온 숲 잎사귀 떨어지게 하지만
가을도 나무의 생기는 시들게 못 하네
메말랐던 회포가 다시 살아 움직이니
차 마신 뒤 새벽 창엔 온 산이 어둑하네
(봉천사 누각 창에 적다/한국고전번역원)
천왕봉에 올라 자괴감에 빠져들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힘들었을 지리산 산행에서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긍정의 에너지를 느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자존감을 되찾고 마음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었던 것일까? 비 내리는 늦가을 새벽에 느꼈을 추강의 희망과 명징한 정신을 그려보며 절집 마당을 서성인다.[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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