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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섭 Jul 29. 2024

집북재, 그 깊은 그리움

천성산에 들다

집북재그 깊은 그리움

[2006.5.31.]


[천성산 산하계곡 때죽나무 낙화]

                                                     

산길 들머리, 훤하게 뚫린 신작로 때문인지, 맑고 고운 수많은 물길이 모여든 계곡은 헐벗은 느낌으로 안타깝다. 도(道)를 구하는 이들도 세속의 편의성과 규모의 유익성을 외면할 수는 없는가 보다. 새롭게 들어선 튼실한 흰색 콘크리트 다리는 초여름 정오의 태양 아래, 속절없이 마냥 눈부시기만 하다.     


계곡 합수점, 공룡능선은 이제 어엿한 이정표를 거느리고 있다. 하긴 8~900m대의 고스락을 3시간 이상 긴장감으로 걸으며 산행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곳이 어디 흔하던가. 이 곳 저 곳, 손길 발길 두던 곳들에는 예전에 없던 시그널(표식리본)들이 어지러이 달렸다. 주저 없이 성불암 계곡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내 악우비가 있는 암자 갈림길 오른쪽의 평탄한 숲길로 들어서며 계곡의 속살로 들어선다.     



[천성산 성불암 숲]


우리 산자락에 '하지 마라'라는 위압적인 경고판이 별로 없던 시절, 스무 살을 갓 넘긴 한 청년은 이 계곡 오른쪽 능선 너머(중앙능선) 계곡(내원사)에서 야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입영을 앞둔 이른 봄에는 친구들과 밤새 소주잔 기울이며 그곳에서 아련한 청춘의 추억을 쌓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며, 밀려드는 행락객과 차량들에게 그 계곡의 길과 물길을 넘겨준 후부터는 시나브로 지금 찾는 이 길로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는 산길 주변,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만 있으면 발들 들여놓고, 거미줄처럼 그려지는 개념도에 만족해하던, 비록 치기 어리나 열정에 들떠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오늘 산행코스는 ‘성불암계곡-집북재-산하계곡’으로 이어지는 이른 바 계곡산행코스, 아니 산보라고 해도 좋을 길이다. 굳이 산 정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이 곳을 찾게 된 것은 바로 집북재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천명의 성인이 나와서 천성(千聖)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 산은, 산자락 곳곳에 원효대사의 체취가 서려있다. 집북, 한자와 우리말이 섞여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천명의 대중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북을 걸어 두던 곳’이라는 의미는 쉽게 다가온다.     


정상(현재는 천성2봉)에서 내려서거나, 

공룡능선을 힘들게 오른 후, 완만한 산자락을 내려서며 한숨 돌리고픈 마음이 들 즈음, 

혹은 꾀를 내어 중앙능선에서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슬그머니 왼쪽으로 끼어들면 만나게 되는 곳...     

낙동정맥마루금에서 옹달샘을 들른 후, 가파른 산자락을 내려와 가풀막진 오름길을 힘들게 올라서면 닿는 곳, 

오늘 걷는 성불암 코스가 자연스레 숲과 만나는 이 곳은, 

신갈나무를 비롯한 참나무들이 성기게 서있는 너르고 평평한 고개이다.       


[천성산 집북재]

                                     

 이곳에서는 삼삼오오 무리지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넓은 공간만큼 넉넉한 평화로움을 느끼거나, 혹은 ‘길이 사방으로 열림은, 길이 사방에서 모임’이라는 당연한 명제를 떠올리며 삶의 한 방편을 세워도 좋을 일이다.   

   

나는 집북재라는 이름만으로도 ‘편안함과 위로’를 느낀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엄격하자며 채근하던 나도, 그 터무니없이 짧은 걸음에도 나를 질책하지 못할 것을 안다. 모처럼의 게으른 걸음은 계곡의 3단폭포를 여유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쁨을 덤으로 안겨 준다.     


다만, 집북재를 오르는 동안 내내 마음에 자리 잡은 한 가지 아쉬움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풀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동행한 아우에게 한마디 던졌다.     

“얘들, 삐졌나 보다!”   


집북재에서의 늦은 점심 후, 나의 바람과는 달리 그 곳에서 여유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텅 빈 그 곳에는 뜻밖에도 외로움이 한 움큼씩 묻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괜스레 서두르듯 내려서는 아우에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고개 넘어 비탈을 내려서며 하산 길에 들어선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 이 계곡은 아직도 때를 덜 타 조신한 모습이다. 예전 산하계곡으로 부르던 이 곳이, 안적암 계곡과 만나는 합수점 인근 이정표에 '한듬계곡’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노전암 텃밭, 초여름 햇살에 발갛게 달아오른 낯으로 수줍은 웃음 짓는 비구니스님의 모습이 해맑다.                                    

                           

[천성산 산하계곡. 답사 당시는 '한듬계곡'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저께 내린 비로 계곡의 수량이 적지 않았음에도, 문득 적요함이 느껴진 것은 그 때 즈음이었다. 가로로 늘어선 때죽나무 꽃잎을 하염없이 쳐다보자, 제 몸을 툭 떨구던  꽃잎에 내 장년의 시간이 압축되며, 저만치 고개 숙인 채 계곡을 내려서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인다. 


[때죽나무 꽃잎]


                             아, 나의 아름다운 디딤들이여... 


 

[천성산 공룡능선]


                     짙은 찔레꽃 향기에, 문득 맑은 산자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공룡의 등뼈가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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