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를 펼쳐두고

by 초율

이번에는 두 개의 큰 트렁크를 꺼냈다.


지퍼를 열어 바닥에 펼쳐두니
텅 빈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 공간에 무엇을 채울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지난번 후쿠오카에는 배낭만 메고 갔었다.
쇼핑을 좋아하는 가족들에게는 아쉬운 선택이었다.
공항이 유난히 붐비는 관광 시즌이어서 수하물 줄을 피하고 싶었고, 가볍게 떠났고, 몸은 편했다.


하지만 여행 내내 자제하며 가챠를 돌리던 아이들이 사고 싶던 것을 내려놓으며
“다음에 오면 사자.”라고 말하던 얼굴이 오래 남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벌써부터 무엇을 사 올지 이야기한다.
미리 봐둔 쇼핑 리스트를 말하며 신나게 떠드는 모습에 여행의 설렘이 더 커졌다.


“엄마, 이번엔 진짜 많이 사도 되지?”


들뜬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고 싶은 것이 별로 없는 나는
꼭 필요한 것들만 트렁크에 넣는다.
예전에는 “혹시 필요할지도 몰라.”라는 생각으로 불안을 대비하듯 짐을 쌌다.


이번에는 다르다.


필요한 것만.
정말 필요한 것만.


여행을 다녀오면 입지 않았던 옷들까지 다시 세탁해야 했던 기억 때문이다.
패션에 민감한 남편은 사진마다 같은 옷이라며 웃는다.


“또 그 옷이야? 여행 사진이 다 비슷해.”


나는 대답 대신 옷을 한 번 더 반듯하게 접는다.
빠르게 가족을 챙겨야 하는 나는
간결해야 마음이 덜 불안해진다.


사진은 반복될지 몰라도,
여행하는 동안의 마음은 매번 다르니까.

나는 같은 옷도 나쁘지 않다.


아이들은 이제 제 짐을 스스로 챙긴다.
나는 마지막으로 가방을 열어보고,
금속류는 빼라고 말한다.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키링도 몇 개는 내려놓게 한다.


예전에 남편이 들고 다니던 작은 빅토리녹스 멀티툴을 공항에서 버리고 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짐을 다 챙기고 나면
내 가방이 가장 가볍다.

필요하면 가서 사면 된다.


트렁크를 닫기 전,
비밀번호를 여러 번 확인했다.
혹시 몰라 사진까지 찍어두었다.


지퍼를 끝까지 밀어 올린다.
철컥.


그 순간,
에잇, 몰라.


포기하듯 마음을 하나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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