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성지를 찾아서,이케부쿠로

by 초율

아사쿠사 도착의 '럭키'했던 안도감도 잠시, 이케부쿠로로 향하는 길은 아침부터 조금 부담스러운 여정이었다.

숙소 문을 나서며 남편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눈을 보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몸과 마음의 체력을 정비하듯 나서는 이 길.

오늘 하루는 신이 나서 구경할 아이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냐야 할 '체력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숙소 바로 앞에 다와라마치역이 있었다.

전날 미리 연습해 둔 덕분에 도쿄 지하철 72시간 티켓을 막힘없이 구매해 탑승했다.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는 나는, 남편과 아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어린아이처럼 차례를 기다렸다.

10년 전 오사카나 후쿠오카에 갔을 때는 영어 표지판이 거의 없어 막막했는데, 지금의 도쿄는 영어 표시가 꽤 친절하게 눈에 들어왔다.

세월만큼이나 도시도, 우리 가족도 조금씩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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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굿즈와 키링을 좋아하는 두 아이에게 일본은 그야말로 성지였다.

온갖 캐릭터가 모여 있는 곳. 처음에는 막연히 아키하바라를 떠올렸지만, 남성향 캐릭터가 많다는 정보를 듣고 여성향 상점이 밀집한 이케부쿠로로 방향을 바꾸었다.

사실 나는 남성향과 여성향의 차이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여성향’이라는 그 낯선 말에서 왠지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떠올랐고, 그것이 우리 딸들의 취향에 더 가까울 것이라 믿었을 뿐이다.


이케부쿠로역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마주한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붐볐다.

건물 전체가 가챠숍인 곳과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던 숍들의 거대한 간판이 빼곡히 시야를 채웠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인파의 물결에 밀려갈 것 같은 그 번잡함 속에서도, 캐릭터 분장을 한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모여 웃고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그들의 표정은 즐겁고 당당해 보였다.

캐릭터를 진심을 다해 분석하고 코스튬을 한 채 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그들을 보며, 문득 내 안의 '꼰대 본능'이 고개를 들려다 멈췄다.

'애들이 학교도 안 가고 저기서 뭐 할까' 하는 걱정 대신, 그들의 진심 어린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이 학생이 아닐 수도 있고, 내가 걱정하는 나쁜 일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나루가 "나도 코스튬 대회 나가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어쩌면 나 역시 그 당당한 세계에 함께 참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에게도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영상이나 상품으로 탄생시키고 싶은 꿈이 있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생각을 나누고 함께 그 꿈을 이루어갈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다는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니 아예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들만의 세계.

그 당당함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오! 애니메이트!”

“엄마, 저기 봐봐!

나 이 캐릭터 알아!”


아이들만 알아듣는 언어로 외치며 인파 사이를 누비는 모습은 이미 들뜰 대로 들떠 있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많아 대화에 온전히 섞이기는 아쉬웠지만, 나는 최대한 크게 반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지에서만 허락되는 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의 환상 속 세계를 함께 응원해주고 싶은, 오직 엄마만이 해줄 수 있는 응원이니까.


취향마저 다른 두 아이는 각자 좋아하는 캐릭터가 달라 함께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넷이서 뭉쳐 다니다가는 각자 원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게 뻔했다.

우리는 결단을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각자 자유시간!"


거대한 애니메이트 건물 안으로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비로소 남편과 나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이들은 뜨거운 열기 속으로, 우리는 차가운 칼바람이 부는 거리로.

잠시 동안 각자의 성지를 찾아 헤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의 세계를 존중해 주기로 했고, 그 대가로 잠시 동안의 고요한, 어쩌면 추운 자유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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