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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준란 Dec 25. 2020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동주>

팟캐스트 차이나는무비 플러스 



영화 이야기에 인문학을 얹었다! 한중일 횡단 토크쇼 <차이나는무비 플러스>입니다! 오늘은 이준익 감독의 <동주>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빛나던 미완의 청춘 우리가 기억해야할 이름, 동주 “


영화 <동주>는 2016년 2월에 개봉한 영화로 이준익 감독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황산벌>(2003), <왕의 남자>(2005),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사도>(2014) 그리고 최근 <박열>(2017) 까지 꾸준히 역사물에 많은 관심을 보여온 감독입니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근현대사 속 인물들과 그들에 대한 현대의 이해 방식을 집중적으로 다뤄왔죠. 

영화 <동주>가 다루는 윤동주 시인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가 그의 시 첫 줄 정도는 알고 있을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감독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큰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콘텐츠가 흥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관객들에게 익숙할 때 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인의 삶의 흔적이 한국보다는 중국과 일본 도처에 남아있었고 또 그의 주변 인물들 중 월북을 한 이들도 있어 모든 것을 드러내지 못했던 이유 등으로 우리가 윤동주 시인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이죠. 이런 면에서 이 영화가 가지는 의미가 돋보입니다. 감독은 우리에게 윤동주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의 삶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조명한 것이죠. 사실 조선족 사회에서는 시인 윤동주와 송몽규 열사의 삶에 조금 일찍부터 주목해왔다고  합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출판이 되지 않았지만 송몽규 열사의 평전도 있죠. 영화를 통해 알게된 송몽규 열사의 삶도 함께 조명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영화 <동주>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한편 영화는 멋과 기교를 부려 윤동주의 삶에 의미 부여를 하기보다는 잔잔하게 있는 그대로의 동주의 삶을 보여줍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기 직전 과거를 회상하며 진행되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되는 연출은 윤동주의 시선에서 그가 시를 쓰는 마음과 느낌을 전달하죠. 이로써 관객은 윤동주의 삶을 체험하며 그의 삶 내면에 몰입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흑백으로 된 화면은 영화를 형무소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윤동주의 죽음을 기리는 일종의 장례식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흑백 사진으로만 봐오던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열사. 스물 여덟 청춘의 시절을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낸 이 분들의 영혼을 흑백의 화면에 정중히 모시고 싶었습니다.”


                                                                                                            - 이준익 감독 인터뷰 중

 

 영화 속 동주(강하늘 분)는 일종의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특히 몽규(박정민 분)와의 관계에서 그렇죠. 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고 본인은 낙선이 되었습니다. 또 뭔가 애틋함이 보이는 여진(이여진 분)과의 관계에서도 몽규는 무언가 더 친해보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몽규는 민족과 이념 그리고 국가를 이야기하는 논설문을 쓰고 연설을 하는데 비해 자신은 일상과 자신의 감정을 담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렇게 영화가 보여주는 동주의 열등의식을 다르게 표현해본다면 그의 시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정서,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자신을 늘 돌이켜보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정서입니다. 영화에서 정지용 시인(문성근 분)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였죠.


동방의 기둥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 동주(東柱). 스물 여덟이란 나이에 부끄러움을 간직한 채 너무나 안타깝게도 짧은 생을 마쳤지만 결국에는 한국의 근대 뿐만 아니라 한중일 세 나라에서 영원한 기둥으로 남아있는 윤동주의 삶을 영화 <동주>를 통해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투비오어낫투비(TO BE OR NOT TO BE)'

<차이나는 무비 플러스>의 킬러 콘텐츠! '투비오어낫투비(TO BE OR NOT TO BE)’, 말그대로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영화 속에서 살리고 싶은 캐릭터와 이야기, 장면들(TO BE)은 살리고, 그렇지 않은 부분(NOT TO BE)은 다시 자신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영화에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더해 색다르게 상상해보는 ‘리(Re)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죠! 윤동주의 삶을 담담히 담아낸 영화 <동주>에는 어떤 TO BE와 NOT TO BE가 있을까요?


이루고 싶은 꿈이 많아 잠도 많은 '꿈꾸미'는 NOT TO BE로 후쿠오카 형무소의 의사를 뽑았습니다. 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바닷물 주사를 맞을 때 언젠가 실험을 주도하는 의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간호사를 통해 동주의 상태를 확인한 뒤 동주에게 산수 문제가 적힌 종이를 건네줍니다. 이런 모습은 일본이 근대적인 서구의 문물을 제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서구 근대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고귀한 정신과 육체를 인식과 깨달음에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대의 껍데기만 받아들인 것이 일본식 근대, 즉 메이지 유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장면에서 꿈꾸미가 떠올린 시 한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를 보면 길을 잃어 형무소에 가고 형무소에서 또다시 길을 잃게 되는 동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 시는 1941년 가을에 쓰여진 시입니다. 형무소에 가기 한참 전이지만 마치 자신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한 듯 쓰여진 시이죠. 역시나 반복되는 ‘부끄러움’이라는 정서 역시 길을 잃었다는 동주의 감정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영화에서 동주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홀로 앞천을 따라 산책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언젠가 하늘 길이 열리면 동주를 따라 그 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실제로 명동촌, 명동학교, 윤동주 생가와 묘역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니 동주를 따라 중국도 일본도 여행해보면 좋을 것 같네요! 물론 서울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을 먼저 가봐야겠죠. 


지갑은 텅 비었지만 지식은 충만한 '신여성'은 동주가 릿쿄 대학 영문학과 재학 시절 수업 중에 들어와 동주의 머리를 잘라버린 일본 군인, 신지대좌(조하석 분)을 NOT TO BE로 선정했습니다. 그는 동주가 존경하는 선생님의 수업 중에 문을 차며 들어와 교련 수업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주를 교단 앞으로 끌어내어 머리를 잘라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업 중에 무슨 짓이냐고 따지는 다카마쓰 교수(김우진 분)에게 그는 더러운 서양물이든 문학 따위를 가르치면서 수업이라고 할 수 있냐고 모욕을 줍니다. 천조 대신과 예수 그리스도,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중 무엇이 위대하냐고 물으며 다른 학생들 역시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죠. 자신의 믿음에 취해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신지대좌가 죽이고 싶은 캐릭터로 뽑혔습니다.


영화 <동주>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책을 사랑하는 책사는 TO BE를 골랐는데요 바로 동주가 존경한 다카마쓰 교수입니다. 그는 동주를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바라보며 동주의 시적 감수성을 존중해줍니다. 끝까지 동주를 믿어주고 또 지지해준 그를 보면 어느 시대에나 양심 있는 사람들은 있다는 것을 믿게 해줍니다. 그와 관련해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에 대해 동주와 이야기 하는 장면입니다. ‘방랑’에서 워즈워스가 의도했던 바를 동주에게 묻자 동주는 ‘인간들 감정들 중에 마음 속에서 활동하지 못하거나 가치가 절하된 것을 상키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고 대답하죠. 대답을 들은 다카마쓰 교수는 워즈워스 본인도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며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건 개개인의 깊은 내면의 변화들이 모인 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본 군국주의가 ‘대동아 공영’이라는 허상이라는 비판도 덧붙이죠. 동주를 언제 어디에서나 비추어주는 별빛 같은 선생님, 다카마쓰 교수가 책사의 TO BE, 살리고 싶은 캐릭터입니다.


먼저 자막달린 중국 영화는 필요 없는 자영업은 명동촌에 남겨진 사람들을 TO BE, 살리고 싶은 캐릭터로 선정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전쟁 이후에 남은 사람들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 구분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 한 가지 부류가 더 있습니다. 바로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승자도 패자도 아닌 피해자이죠. 이 부분을 명동촌에 대입해본다면 명동촌은 일제와 중국 공산당 정권 양쪽에게 피해를 입었습니다. 1899년과 1900년 명동촌을 개척했던 5가문 모두 1945년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이와 관련이 되죠. 명동촌은 앞서 잠시 언급하였듯 명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가문들 모인 기독교 문화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만주에서 공산당 정권이 승기를 잡으면서 이곳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애써 가꾼 마을을 떠나 다시 조선으로 오게 된 것이죠. 이렇게 5가문들이 떠났지만 그럼에도 명동촌에 남아 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계속 그곳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마을을 지켜 온 이들이죠. 이들로 인해 지금까지도 명동촌이 유지되고 윤동주를 기념하는 공간들이 생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죠. 이 부분은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아 조금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명동촌의 이미지를 차용했지만 세트장이 아닌 실제 명동촌에서 촬영을 했거나 혹은 현재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면 또다른 의미가 있었지 않을까 생각해 명동촌에 남겨진 사람들을 TO BE로 선정했습니다.


길 위의 인문학 드레싱’

이번에는 <차이나는 무비 플러스>의 두번째 코너. 영화를 보고 떠오른 역사, 문학, 음악, 철학 등 인문학적 감성을 더하여 조선의 근대를 들여다보는 시간, 길 위의 ‘인문학 드레싱’입니다. 조선족 자치구의 역사와 일제강점기 시인과 독립운동가의 삶이 담긴 영화 <동주>에 어떤 드레싱을 얹어볼까요?


책사는 윤동주를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드레싱으로 가져왔습니다. 형무소에서 삶을 마친 윤동주의 시집이 그의 사후에 출판될 수 있었던 데에는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후배이자 문학적 동료였던 정병욱 교수의 역할이 컸습니다. 윤동주가 직접 쓴 원고를 직접 증정받은 정병욱은 일제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 본가에 맡겼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마루바닥을 뜯어 그 안에 항아리를 묻고 그 안에 이 원고를 보관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켜진 원고가 해방이 되고 1948년 정음사를 통해 처음 출판된 것이죠.(이 출판 전 10권 정도만 독립적으로 발행한 초간본은 현재는 울산박물관에 1권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1955년에는 그 증보판이 출판되었죠. 영화에서도 소개된 강처중 역시 윤동주가 일본 생활 당시 사용했던 모든 유품들을 수습하여 보관하였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출판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후에 월북을 하여 앞서 잠시 언급한 윤동주 평전에 처음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후에 개정판에서 이름이 언급된 것이죠. 한편 일본에서도 윤동주를 기억하려는 노력을 보였던 인물도 있습니다. 송몽규와 윤동주와 관련된 모든 문서 작업을 도와준 우지 고츠요시(宇治鄕毅)입니다. 그는 윤동주와 같은 도시샤 대학 출신으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던 중 윤동주의 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우연히 한국을 방문해 윤동주 유고전을 관람하였는데 이때 전시에서 독립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윤동주와 관련된 문서들, 심지어 비밀 문서들까지도 검토하고 공개하여 윤동주와 송몽규가 독립 운동가였음을 실질적 증거를 토대로 밝혀냈습니다. 이렇듯 윤동주를 기억할 수 있게 된 인물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시인의 시를 통해 감동을 받고 또 역사를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 (출처 : 울산박물관)

우리나라에도 청운문학도서관과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하숙집 터를 비롯해서 그를 기억하려는 공간과 전시들이 많이 있듯이 일본에서도 여전히 윤동주를 그리는 콘텐츠들이 있습니다. 후쿠오카, 도쿄, 교토 세 곳 모두에 윤동주와 관련된 시 모임이 있고 지난 10월에는 윤동주를 소재로 한 연극도 공연되었습니다. 한중일 세 나라를 아우르는 문학가로서 윤동주를 다시 바라볼 필요도 있을 듯 합니다. 


신여성은 문익환 목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드레싱으로 가져왔습니다. 영화 초반부에 방앗간에서 <신명동>이라는 잡지를 함께 만드는 3인방 중 한 명으로 등장하였죠. 실제로도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는 어릴 적부터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윤동주가 시로써 부끄러움의 정서를 통해 저항의 심정을 드러낸 것처럼 문익환 목사 역시 시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문익환 목사의 <동주야>라는 시 일부를 먼저 만나보겠습니다. 


동주야 문익환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이렇게 시를 쓰게 된 것은 문익환 목사가 11년 간 투옥생활을 할 정도로 강한 저항 의식을 가지고 활동을 하며 느낀 소회를 시를 통해 이야기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사실 신학교를 졸업 후 독실한 복음주의자로 구약을 번역하는 학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절친했던 장준하가 의문사로 세상을 달리하자 의문사 규명을 요구하면서 거리의 투사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긴 옥살이 끝에 사면을 받게 된 것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전날이었죠. 이에 사면 후에도 계속해서 거리의 투사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죠. 이러한 이유로 문익환 목사와 관련된 두 가지 콘텐츠를 소개해보자면, 하나는 『문익환 평전』(김형수 저, 다산책방, 2018)이고 다른 하나는 <북간도의 십자가>(2019)입니다. <북간도의 십자가>는 故 문동환 목사의 회고를 따라 북간도에 남은 이들과 머물렀던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 <동주>를 통해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저항과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관람해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자영업은 명동촌에 관한 이야기를 드레싱으로 가져왔습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명동촌은 다섯 가문이 이주해 만든 마을입니다. 기존에 있던 마을이 아니라 허허벌판에 다섯 가문이 와서 새롭게 마을을 일군 것입니다. 이 마을은 후에 북간도에서 한인사회의 중심점과 같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마을의 형성 과정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면 1899년 문치정·남위언·김하규·김약연 등 네 가문이 먼저 이 지역으로 이주를 시작합니다. 이 네 개 가문의 식솔이 142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윤동주 가문은 이듬해 1990년에 이곳으로 이주해왔죠. 이주를 한 가문들은 당시 이 일대의 지주인 중국인 동한(董閑)으로부터 1,000여경 규모의 땅을 매입합니다. 당시 1경은 소 한 마리가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크기라고 하니 매우 넓은 땅을 매입한 것으로 지금 남아 있는 명동촌보다 오히려 규모가 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908년에는 명동서숙(이후 명동학교)가 세워지고 이듬해에는 명동교회가 세워집니다. 교회가 세워짐으로써 유교적 문화를 기반으로 한 한민족 전통과 다른 기독교적 문화를 기반으로 한 마을 공동체 가 형성된 것이죠. 명동촌이라는 이름은 영화 <후쿠오카>를 다루면서도 말씀드렸듯이 일제강점기에 망국의 설움 속에서 조국이 다시 밝게 빛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지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당시 그 외 다른 북간도 지역 마을에도 마을의 이름을 지을 때 특정한 규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민족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를 담아내는 것입니다. 첫번째 규칙은 이주하기 전 조선에서 자신이 살았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연변 지역에 가면 갑산촌, 무산촌, 회령촌, 어랑촌, 무산촌과 같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들은 이북 마을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강원도 마을, 원주 마을, 충청도 마을이라고 작명한 경우도 있는데 충청도 마을의 경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두번째 규칙은 ‘명동촌(明東村)’과 같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북간도 지역 초창기에는 ‘창동학교’, ‘정동학교’가 있었는데 ‘창동(昌東)’과 ‘정동(正東)’ 모두 ‘명동’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新韓村)’ 역시 이와 유사한 작명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꿈꾸미는 윤동주와 같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시인, 이상을 인문학 드레싱으로 가져왔습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상은 1910년 생으로 1917년 생인 윤동주와는 7살 차이가 납니다. 이상은 1937년, 만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시 미완의 청춘인 것이죠. 이상의 <오감도>나 <거울>과 같은 시를 보면 굉장히 모던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매우 해석하기 어렵죠. 이상 스스로가 기호학적 수수께끼를 내는 것처럼 시를 썼기에 해석의 어려움은 배가 됩니다. 한글 시어를 통해 일상적이고 평이한 단어들 속에 깊은 순수함과 열정을 담아낸 윤동주의 시인과는 매우 상이한 모습입니다. 이런 차이점을 토대로 이상과 윤동주를 비교해 두 시를 읽어본다면 또다시 새로운 동주의 세계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가, 시인 이상(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오늘 <차이나는무비플러스>는 영화 <동주>를 통해 감독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윤동주의 시를 한 편 읽으며 마무리 하려합니다. 동주가 영원으로 떠나던 날 읽혔던 시, <새로운 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새로운 길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영화 <동주>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이야기에 인문학을 얹었다! 한중일 횡단 토크쇼 <차이나는무비 플러스>는 다음에 또 좋은 영화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ㅣ팟캐스트ㅣ
 더 자세한 내용을 들으시려면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세요! 
 http://www.podbbang.com/ch/13254        


또 있습니다. 팟티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podty.me/cast/182234 


ㅣ네이버 오디오 클립ㅣ

오디오클립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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